20.02.08(토)
어제 사 온 자석 블록이 아내와 나의 아침을 좀 편안하게 만들었다. 잘 보이도록 일부러 소윤이 책상 위에 두고 잤는데 아주 좋은 한 수였다. 잠에서 깨서 거실의 소리에 집중해 보니 소윤이와 시윤이가 열심히 자석 블록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덕분에 아내와 나는 눈을 뜨고도 한참을 더 누워 있었다.
"엄마, 아빠. 배고파여"
"엄마아아. 배고파여어엉"
소윤이와 시윤이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아내와 나를 깨웠다. 그 와중에도 아내만 일어나고 난 좀 더 잤다. 다시 잠에서 깼을 때는 거실의 분위기가 썩 좋지 않았다. 블록으로 뭔가를 만들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짜증을 내는 시윤이, 자기가 뭘 만들려면 저게 필요한데 시윤이가 안 준다는 소윤이, 그런 둘을 향해 중재와 훈계를 반복하는 아내의 소리가 번갈아가며 들렸다.
나도 거실로 나가서 일단 소파에 앉았다. 등장하자마자 싫은 소리를 하면 좀 그러니까 일단 상황을 지켜봤다. 자질구레한 갈등이 많았다. 서로 필요한 블록이 겹치는 경우가 많았다. 참고로 어제 사 온 블록이 개수로 250개 정도였다.
"소윤아, 시윤아. 블록이 이렇게 많은데 서로 같은 걸 하겠다고 싸우고 있는 거야? 그럼 앞으로 블록은 못하게 되는 거 알지? 서로 양보하면서 하지 않으면 둘 다 못하는 거야"
한 번의 경고 후에는 서로 조심했다.
"누나아. 나 이거 해도 돼에?"
"응. 그럼 누나는 이거 할게?"
감시자의 응징을 받지 않기 위한 연출된 연기일지도 모르지만, 양보와 배려는 이렇게라도 연습과 훈련을 해야 한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정말 오랫동안 블록을 했다. 그동안 소유했던 장난감을 통틀어 연속 시간으로는 가장 많이 가지고 놀았다. 중간에는 나도 합류해서 아이들에게 뭐 좀 참신한 걸 만들어 줄까 했는데 역량 부족으로 의욕을 상실하고 이탈했다.
"여보. 내가 살 테니까 여기 갈래?"
아내가 보여준 건 [맑음케이크]의 할인 이벤트 공지였다.
"아빠. 제가 딸기 케이크와 에그 타르트가 먹고 싶은데 사 주실 건가요?"
라고 묻는 롬이의 음성이 들렸다.
"응, 롬이야. 가자. 그런데 아빠는 아니고 엄마가 산대"
내가 먼저 샤워를 했는데 그 사이 거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마치 아까 방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들렸던 소리랑 비슷했다. 차이가 좀 있다면 아침보다 더 심각한 상황 같았다. 아내의 목소리가 더 높고 컸으니까.
"여보. 왜?"
"아, 정리하자고 했더니 둘 다 고집부리고 떼써서. 월요일까지 블록 못한다고 했어"
애석하게도 하루 만에 블록 금지령에 처해졌다. 이럴 때는 애들한테도 굳이 말을 보태지 않는 게 좋다. 이미 아내에게 충분히 훈계를 들었을 테니 난 그냥 조용히 블록을 치우면 된다.
어쩌다 보니 소윤이와 시윤이를 곱게 차려 입혔다. 화창한 봄날에 반가운 누군가를 만나러 갈 듯한 복장이었다. 비록 카페에 케이크 먹으러 가는 거여도 기왕 나가는 거 기분 내면 좋으니까.
차를 타고 30분 정도 거리였다. 시윤이의 낮잠 시간이 지난 뒤였으니까 당연히 잘 거라고 생각했지만 시윤이는 자기는커녕 쌩쌩했다. 이제 시윤이도 점점 낮잠과 멀어지고 있음을 자주 느낀다. 아내와 나도 시윤이의 [낮잠 패싱] 사태를 그리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고. 자면 자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고. 낮잠 안 자면 밤에 일찍 잔다는 보상도 있고.
아내는 아이스 라떼, 아이스 아메리카노, 우유 두 잔, 마카롱 두 개, 딸기 케이크를 주문했다. 마카롱 두 개를 먼저 가지고 왔다. 일단 소윤이와 시윤이는 가래떡을 쥐고 있었다. 점심 대신 간단하게 요기라도 하라고 사 준 걸 맛있게 먹고 있었다. 시윤이가 먼저 가래떡을 다 먹고 마카롱을 뜯었다. 야물차게 한 입, 한 입 베어 먹었다. 소윤이는 시윤이가 마카롱을 다 먹었을 때쯤 가래떡을 다 먹었다. 그때 마침 딸기 케이크와 커피도 나왔고.
대자연의 협곡 앞에 선 어느 관광객처럼 초라한 딸기 케이크 한 조각이 우리 앞에 놓였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곧바로 포크를 들더니 생닭을 본 호랑이처럼 으르렁댔다.
"소윤아, 시윤아. 진정해. 욕심내지 말고 천천히 먹어"
세 사람의 정신없는 포크질이 시작됐다. 두 녀석의 먹성에 포크질을 멈칫거리는 아내를 독려했다.
"여보도 얼른 먹어. 애들한테 양보하지 말고"
"여보는 왜 안 먹어"
"난 괜찮아"
"뭘 괜찮아. 여보도 좀 먹어"
케이크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장 큰 입인 내가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빠아. 빵 또 두데여어. 빠앙"
"무슨 빵?"
"빠앙. 이거어어"
"다 먹었잖아. 너네가"
"또 없떠여엉?"
"응. 다 먹은 거야"
그때 소윤이는 보란 듯이 부스럭거리며 마카롱을 꺼냈다. 시윤이는 부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고. 시윤이도 스스로 안다. 무작정 떼써서 얻어먹을 나이는 지났다는걸. 강력한 바람보다 따사로운 태양이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기 더 쉽다는 걸 깨닫는 중이다.
"누나아. 나 또곰(조금) 줄 거야아?"
"알았어. 조금 줄게"
소윤이가 먹을 걸 나누는 데 있어서 박하지는 않다. 먹을 걸 앞에 뒀을 때는 이런 경우가 많다. 시윤이는 항상 빨리 먹기 때문에 남은 누나의 몫을 탐하거나, 탐하지 않더라도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기 마련이고 소윤이는 그걸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내나 내가 나눠주지 않다고 얘기하며 자기 몫을 지켜주려고 해도 선뜻 양보한다. 그런 걸 보면 막 더 사 주고 싶다.
마카롱은 애초에 크기도 작은 데다가 소윤이가 워낙 좋아하는 건데도 후했다. 마지막 한 입도 시윤이에게 넘겼다.
"소윤아. 그냥 너 먹으라니까"
"왜여. 제가 좋아서 주는 건데여"
먹을 게 모두 사라지자 아내는 공책과 스케치북을 꺼냈다. 소윤이는 그림일기를 썼고(그렸고) 시윤이는 스케치북에 미술 활동을 했다. 우리가 보기에는 낙서지만 엄연히 주제가 있었다.
"아빠아. 이거똠 보데여엉"
"우와. 이게 뭐야?"
"이거늠. 기딘(기린). 기딘에여엉"
기린을 0.1이라도 유추할만한 요소는 당연히 없었다. 그래도 소윤이와 시윤이는 꽤 진득하게 앉아 있었다. 아내와 제법 대화의 진도를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대화를 나누던 아내는 갑자기 이렇게 얘기했다.
"아. 케이크 맛있다. 진짜 맛있다"
아마 아쉬웠을 거다. 혼자 먹었어도 성에 안 찰 판인데 그걸 아이들과 나눠 먹었으니까.
"여보. 또 먹자. 내가 살게"
"에이, 됐어"
"뭘 돼. 또 먹으면 되지. 골라"
"됐다니까. 여보는 먹지도 않잖아"
"나도 먹으면 되지. 얼른 고르라니까"
"진짜?"
아내는 에그 타르트를 골랐다.
"엄마. 우리는여?"
"너희는 나중에 먹어"
"왜여?"
"많이 먹었잖아"
"히잉. 먹고 싶은데"
저녁은 집에서 먹어야 했다. 며칠 전에 사 둔 토막닭이 오늘을 넘기면 안 될 거 같았다. 아내와 찜닭을 해 먹기로 얘기가 됐다. 집에 가려던 차에 형님(아내 오빠)네한테 연락이 왔다. 같이 저녁을 먹일지 말지 얘기가 오고 갔다. 형님이 몸이 좀 안 좋아서 낮잠을 자는 중이라 깨서 상황을 봐야 한다고 했다. 저녁을 같이 먹게 되면 우리 집으로 부를 생각이었다. 토막닭을 오늘 써야 하니까. 형님네는 고기를 먹지 않지만 그래도 부르려고 했다. 풍성한 밑반찬과 생선을 구워주면 되니까. 그리고 우리는 토막닭을 써야 하니까.
소윤이와 시윤이는 숙모와 삼촌이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신이 났다. 아직 올지 안 올지 모른다고 얘기해줬지만 올 거라고 확정 지은 듯 기뻐했다. 안타깝게도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소윤아. 삼촌이랑 숙모 못 오신대"
"왜여?"
"삼촌이 몸이 좀 안 좋으시대"
"......"
소윤이는 울상이 됐다. 아내와 나는 요즘 너무 잦아진 소윤이의 눈물과 울음에 약간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소윤아. 또 울지 말고. 아까부터 얘기했잖아. 뭘 이런 걸로 울려고 그래"
소윤이는 눈물을 꾹 삼켰다.
찜닭은 성공적이었다. 객관적인 맛 평가는 불가능한 구성원이기 때문에 제쳐두더라도 어쨌든 모두 맛있게, 배부르게 먹었다. 소윤이는 특유의 다채로운 표정과 함께 엄지를 치켜세우며 "진짜 맛있어여"라고 말했고, 시윤이는 행동으로 보여줬다. 닭고기를 발라주기가 무섭게 먹어 치웠다. 밥도 더 퍼서 줬고.
이렇게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마침표를 찍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애들한테 얘기했었다.
"소윤아, 시윤아. 오늘은 아빠랑 잘 거야"
"왜여?"
"엄마가 맨날 너희 재워주셨잖아. 오늘은 주말이니까 엄마도 좀 쉬셔야지"
"알았어여"
미리 말해 놓은 덕분에 마음의 준비가 됐는지 잘 시간에도 큰 문제가 없었다. 엄마와 기분 좋게 인사를 나누고,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거 같은 각자의 루틴(그냥 막 뭐 엄청 자질구레한 의식들이 있다. 다 집어치웠으면 좋겠는)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하루가 끝나나 싶었는데 소윤이가 갑자기 엄마한테 할 말이 있다면서 나가겠다고 했다. 사실 그러라고 하면 간단한 일이었는데 그때 내 마음이 그렇지가 못했다. 이미 그전에 오만가지 핑계와 자기만의 수면 의식을 거쳤다. 이건 겪어본 사람만 아는 인내심 시험이다. 그렇다 보니 나도 마음이 넉넉지 못했고 나가지 못하게 했다. 소윤이는 울기 시작했고 멈추지 않았다. 단순한 울음이 아닌 고집이 결부되어 있다는 게 문제였다.
하아. 자다 말고 일어나서 강력한 훈육의 시간을 가졌다.
오늘도 슬픔을 안고 잠들어야 하는 소윤이가 안쓰러웠다. 마땅한 훈육이기는 했지만 나의 짜증이 좀 섞였다는 게 개운치 못했다. 소윤이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꽤 한참을 옆에 누워서 기다렸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소윤아. 아빠는 이제 나갈게. 얼른 자. 알았지?"
"네. 아빠. 내일 만나여"
그러고 나와서 한 시간쯤 지났을까 난 작은방에 있었고 아내는 거실에서 [사랑의 불시착]을 보고 있었는데 방문이 열렸다. 시윤이가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아내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거실 커튼 뒤로 숨었다. 정말 모르겠다. 왜 숨었는지.
"시윤아. 왜 나왔어?"
"목 말라여엉"
시윤이에게 물을 한 잔 줬다. 시윤이는 자다 깨면 혼자 들어가서 잔다. 가끔 서럽게 울며 엄마를 찾을 때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혼자 들어간다. 오늘도 그랬다. 들어가는 시윤이를 배웅(?)하는데 소윤이도 눈을 뜨고 있었다.
"소윤아. 소윤이도 깼어?"
"아니여. 안 잤어여"
"뭐라고? 아까부터 안 잤다고?"
"네"
"왜? 안 자고 뭐 했어?"
"그냥 잠이 안 와서여"
"무슨 소리야. 얼른 자야지"
"아빠. 저도 목 말라여"
"알았어. 너도 물 마셔"
"쉬도 할래여"
"쉬도 하고 와"
소윤이는 거실을 슥 둘러보며 화장실로 갔다.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아내가 숨은 거실 커튼을 봤다. 그것도 유심히, 시선을 고정하고.
"아빠. 엄마는여?"
"어, 글쎄. 일단 얼른 쉬 해"
"아빠. 엄마는 어디 있어여?"
"몰라. 아빠도"
"왜 몰라여? 나갔어여?"
"어, 그런가 봐"
소윤이가 분명히 아내를 봤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황해서 횡설수설했다. 소윤이가 '저기 커튼 뒤에 엄마 아니냐'고 물을 거라고 확신했는데 의외로 순순히 방으로 들어갔다. 도대체 아내는 왜 숨었을까.
"소윤아. 이제 얼른 자. 알았지?"
"네"
아내도 커튼 뒤에서 나왔다.
불시착한 북한 장교와 남한 여인의 사랑 시청을 마친 아내와 잠깐 얘기를 나눴다. 요즘 우리가 소윤이의 감정을 너무 받아주지 않는 건 아닌지, 우리의 의사나 의견을 바꾸는 게 아니더라도 전달하는 방식에서 좀 더 배려하고 친절할 여지는 없는지, 소윤이가 자꾸 우는 게 혹시 그로 인한 거절 감정 때문은 아닌지. 언제나처럼 명쾌한 결론이나 답은 없었다. 다만 노력하기로 했다.
모든 말과 행동에 조금 더 사랑을 담도록.
다짜고짜 거절하기 전에 마음을 읽어주도록.
아내가 자러 들어갈 때 잠시 들어가서 소윤이와 시윤이의 볼따구를 매만졌다. 시윤이가 어릴 때는 소윤이를 겪어 봤으니 좀 낫겠지 싶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닌 듯하다. 경험으로 능숙해지기는 해도 성숙되지는 않는 게 육아인 것 같다.
롬이야, 미안하다. 아직 반숙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