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9(주일)
아내가 어제 자기 전에 가위바위보를 하자고 했다.
"갑자기 왜?"
"내일 누가 애들 아침 차려 줄지"
"뭐야. 내가 일어날게"
"왜. 가위바위보 하자"
"됐어. 여보 자. 내가 일어날게"
"진짜지? 그럼 여보가 일어나서 아침 차려줘"
"오케이"
"우리 몇 시에 일어나야 되지?"
"그래도 8시 30분에는 일어나야지. 여보가 알람 맞춰 줘"
"알았어. 잘 자"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나 혼자 방이었다. 마침 소윤이가 날 깨우려고 방에 들어왔다.
"어? 아빠 일어났어여?"
"응. 아침 먹었어?"
"그럼여. 먹었져"
아내는 거실에서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얼른 아내에게 가서 계약 파기한 것에 대한 사죄를 했다.
"여보오. 미아안"
"아니야"
"그런데 난 알람 소리 못 들었는데"
"내가 금방 껐어"
"깨우지"
"내가 하면 되지 뭐"
이렇게 기록해 놓으면 아내가 마치 이런 일로 자주 토라지거나 화를 내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아내는 결혼하고 한 번도 집안일 가지고 불쾌함을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름 열심히 동참한다고 해도 아내만큼은 아닐 거고 시기에 따라 소홀했던 적도 분명히 있었을 텐데 아내는 그럴 때에도 나를 향해 직접 날을 세운 적은 없다. 물론 그녀의 말과 행동에 어두운 기운이 묻어 나오는 때도 분명히 있었겠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은 게 없는걸 보면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과 아닌 사과(장난과 애교가 가득한 분위기의)를 하는 이유는 이렇게 하면 조금 더 매끄러워지기 때문이다. 당연한 것도 당연하지 않게 여기는 태도는 모든 관계를 한층 깊게 만든다. 내가 다른 사람을 상대할 때는 이게 영 미숙한데 아내한테만큼은 잘 지키려고 노력한다. 어쨌든 일어나기로 해놓고 안 일어났으니 그건 명백한 죄(?)이기도 했고.
소윤이의 최대 관심은 이번 주에는 새싹꿈나무 예배에 가는지 아닌지였다. 어제부터 물어봤는데 오늘 아침에 답을 주겠다고 했다. 오늘은 보내기로 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의 삶을 돌아보니 철저한 격리의 삶을 살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전염병이라는 게 어떻게든 감염의 확률을 낮추는 쪽으로 행동하는 게 맞지만 한편으로는 확률에 치여서 너무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소윤아. 오늘은 새싹꿈나무 예배 가자. 대신 예배 시간에도 마스크 쓰고 있어야 돼. 시윤이도. 알았지?"
아내는 아침부터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배가 살살 아프다고 했다. 임산부가 배가 아프다고 하면 일단 긴장이 된다. 어떤 배가 아픈 건지 물어봐야 한다.
"화장실 배? 롬이 배?"
"롬이 배는 아닌데 뭔가 기분 나쁘게 살살 아파"
"그래? 화장실 가고 싶은 건 또 아니고?"
"그런 거 같기도 한데 나도 잘 모르겠어"
사실 임신하면 이런 게 굉장히 많다. 통증이나 불편함을 느낄 때마다 이게 임신에서 비롯되는 변화와 아픔인지 아니면 그냥 질병의 신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이 많다. 임신의 0.00000001도 경험하지 못하는 나는 순전히 아내의 진술에 의존해 상황을 판단해야 하는데 아내 스스로도 명쾌하게 설명을 못하는 게 많다. 도대체 원인이 뭔지도 모르고 막 엄청 대놓고 아픈 것도 아니고, 무시하지는 못할 정도로, 내내 불쾌함을 느낄 정도로 은근한 아픔이 많아진다. 이게 나의 아내만 그런 거 같지는 않다. 임신하면 모든 신체 기관이 아이를 키우고 내보내는데 집중하고 변하다 보니 생기는 영광의 통증이 아닐까 싶다.
아내는 예배 시간에도 매우 힘들어 보였다. 헷갈렸다. 이게 졸려서 그러는 건지 배가 아파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임신으로 인한 만성 체력 고갈 때문에 그러는 건지. 나의 질문이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여보. 괜찮아?"
괜찮다고 해도 안심이 안 되고 안 괜찮다고 해도 딱히 해결책을 주지는 못하는 처지에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롬이(아내의 배)를 한 번 쓰다듬고 아내의 손을 꾹 잡아주는 게 다였다. 건조하게 글씨로 남겨서 그렇지 아내는 간당간당했다. 더 심해졌어도 이상할 게 없었고, 나아지면 천만다행인 상태로 보였다.
예배를 마치고 내가 소윤이와 시윤이를 데리러 갔다. 선생님 손을 잡고 문쪽으로 나오는 소윤이와 시윤이가 나를 발견하고 반갑게 눈짓을 보냈다.
"소윤아, 시윤아. 마스크 계속 쓰고 있었어?"
"네"
"시윤이도?"
"아빠아. 더늠(저는) 음, 음, 요고또(요거트) 먹으 때 버더떠여엉"
"아, 요거트가 간식이었어? 그거 먹을 때만 벗었어?"
"네에"
"그래, 잘 했어"
오늘은 간만에 벅찬 주일이었다. 아, 물론 나 말고 아내에게. 나의 축구 모임과 목장 모임이 모두 열리는 건 오랜만이었다. 다행히 아내의 상태는 더 나빠지지 않았다. 롬이와 관련해서 어떤 문제가 생겨서 그런 건 아닌 듯했다는 말이다. 점점 커지는 롬이와 롬이의 집 덕분에 아내의 각종 장기 및 신체 기관의 기능이 일시적으로 위축되는 거 같다.
"소윤아, 시윤아. 아빠 갈게. 엄마 말씀 잘 듣고"
예배가 끝나고 잠시 카페에 들렀다가 아내와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주고 곧장 다시 교회로 갔다.
첫 번째 축구 경기가 끝나고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았다. 여러가지 가능성이 존재했다. 애들하고 너무 치열하게 보내느라 차마 휴대폰 볼 시간이 없었거나 누군가(그게 장모님, 장인어른인 경우가 가장 많다) 방문해서 자거나 쉬느라 휴대폰 볼 시간이 없었거나 연락이 왔다는 걸 알아챘지만 귀찮아서 그냥 미루거나(아내는 의외로 이런 경우가 많....읽ㅆ....) 그냥 휴대폰을 어디 던져두고 잊었거나. 쉬는 시간마다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다시 걸려온 전화는 없었다. 이럴 때는 치열하게 보내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적었다. 물론 진짜 너무 치열해서 그럴 틈이 없었으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실 내 마음대로 추측한 거고 정답은 아내만 안다.
마지막 경기를 뛰기 전 다시 한번 전화를 했을 때 아내와 연결이 됐다. 역시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오셨다고 했다. 아내는 한참 동안 누워서 쉬었다고 했고. 소윤이와 시윤이의 저녁을 일찌감치 파스타를 해서 먹였고 아내는 장인어른, 장모님과 함께 치킨을 먹을 거라고 했다. 내가 전화했을 때는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치킨을 사러 나가시고 안 계셨다.
"애들은 괜찮았어?"
"응. 이 정도면"
"여보는?"
"나도 아까보다는 훨씬 괜찮아"
"다행이다"
축구를 마치고 집에 도착했는데 시윤이가 주방 쪽에서 험상궂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심술과 고집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시윤아. 왜 그래?"
"........"
장모님과 장인어른은 거실에 앉아 계셨고 아내는 소윤이를 씻기고 나왔다.
"여보. 시윤이 왜?"
"아, 안 씻겠다고 난리야. 너무 졸려서 그런 거 같아"
내가 막 들어왔을 때가 오히려 괜찮았다. 그 후로는 계속 심해지더니 결국 아내와 따로 방에 들어가서 진한 훈육의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이 짧지 않았다. 난 씻지도 못하고 현관 앞에 앉아서 기다렸고(오염된 몸이니까) 장인어른과 장모님도 가시지 못하고 기다리셨다. 훈육이 끝나고 아내의 도움을 받아 씻은 시윤이는 여전히 슬픔이 가득했다. 할머니한테 갔다가 할아버지한테 갔다가. 중간중간 격렬하게 훌쩍거리기도 하고.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가시고 아내와 아이들은 곧바로 자러 들어갔다. 아내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치킨이랑 새우튀김 먹어"
"알았어"
먹고 남은 치킨이 거의 한 마리였다.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낮잠을 안 잤으니 아내가 애들을 금방 재우고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소식이 없었다. 사실 요즘은 낮잠 여부와 상관없이 아내가 먼저 잠드는 날도 많다. 홀로 거실 식탁에 앉아 치킨 발골을 시작했다. 치킨을 거의 다 먹었을 때쯤 아내가 문을 열고 나왔다.
"여보. 잠들었어?"
"아니. 소윤이가 좀 늦게 잤어"
"아, 그래?"
"응. 그래도 다행이다. 이렇게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나와서"
"왜? 사랑의 불시착할 시간이야?"
"응"
아내는 정말 딱 시작할 시간에 맞춰서 나왔다. 햇수로 8년 차에 접어든 결혼 생활의 경험을 종합해 보면, 아내가 가장 강력하고 단호하게 시간을 통제할 때는 드라마 볼 때인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