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0(월)
간만에 아침부터 일이 있어서 부지런히 집을 나섰다. 반드시 들어야 하는 교육이 있었는데 막상 갔더니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출석 확인만 하고 끝났다.
"여보. 나 벌써 끝났어"
"왜?"
"코로나 때문에 교육 안 한 대.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아, 진짜? 그럼 욕조 어떻게 하지?"
"한 번 연락해 봐. 더 빨리 받을 수도 있는지"
어제 울산에 사는 아내의 친구(라고만 표현하기에는 우리 가족을 여름마다는 물론이고 울산에 갈 때마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울산의 각별한 두 가정 중 한 가정)가 자기 아이들이 커다란 반신 욕조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고 있는 사진을 아내에게 보냈다. 플라스틱 욕조였는데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도 딱이었고 필요하기도 했다. 욕조라는 게 물 받아놓고 아이들 물장난 칠 때 필요한 것이니, 과연 그게 정말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들지도 모르겠다. 여러 육아의 놀이와 행위 중 아이들의 만족도도 높고 별로 해로울 게 없는 건강한 놀이가 물놀이인 걸 생각하면 필요하다고 본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목욕(물놀이)과 담을 쌓은지 오래였다. 아주 가끔, 올겨울 구경하기 힘든 눈처럼 아주 드물게 목욕을 하긴 했다. 소윤이 아주 어릴 때부터 썼던 고래 욕조와 그와 비슷한 크기의 아기 욕조에서. 이게 어떤 느낌이냐면 아내 정도 체형을 가진 성인이 김장할 때 쓰는 붉은 고무 대야에 물 받아서 물놀이하는 거다. 아내와 나도 욕조를 살까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보관이 문제였다. 좁은 화장실에 둘 데도 없고 그렇다고 마땅한 다른 장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던 차에 울산의 친구가 어제 그 사진을 보낸 거다. 아내는 즉시 나에게 보여주며 괜찮지 않냐고 물었다. 좋아 보였다. 울산의 친구는 중고 거래를 통해 만 원에 샀다고 했다.
"여보. 여보도 당근마켓에서 구해 봐"
"그럴까? 만 원이면 진짜 살만하지?"
"그럼. 뭐 정 아니면 다시 팔면 되지 뭐"
"새 건 좀 아깝고"
"응. 새것까지 살 필요는 없을 거 같고"
잠시 후 아내가 막 웃으면서 나에게 왔다.
"왜?"
"아, 이한나 진짜 웃겨"
"왜?"
"아니, 자기가 새 거를 사 주겠다는 거야"
"엥? 한나가 왜?"
"그러니까. 자기는 중고 사 놓고. 당연히 내가 됐다고 했지"
"그런데?"
"그랬는데 중고나라에 누가 만 오천 원에 팔겠다고 올렸거든?"
"어"
"이한나가 자기가 댓글 달았어. 내 핸드폰 번호 알려주면서"
"진짜?"
"어. 그래서 그 사람한테 지금 연락 왔어. 내일 가지러 올 수 있냐고"
"대박이네. 추진력 좋네"
"그런데 만 오천 원이면 살만하지?"
"어. 사. 내일 간다고 해"
여기까지가 어제의 일이다.
그리하여 오늘 나의 두 번째 일정은 욕조 중고 거래였다. 만 오천 원을 현금으로 건네고 욕조를 받았다. 트렁크에는 안 실리고 뒷좌석에 꽉 차서 실렸다. 다행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욕조에 관해서는 전혀 몰랐다. 갑자기 커다란 욕조를 봤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하니 내가 기분이 다 좋았다.
욕조 거래 다음의 일정은 케이크 배송이었다. 지난 토요일, [맑음케이크]에 갔을 때 형님(아내 오빠)네 갖다 줄 케이크 한 조각을 샀었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그날 못 갖다 줬고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오늘 전달하기로 했다. 집 근처 스타벅스에 있던 형님에게 케이크를 넘겨줬다. 민망스럽게도 한 조각.
[여보. 욕조 받아서 오빠 케이크 갖다 주고 카페라도 갔다 와용]
기왕 나간 거 바로 육아의 바다로 돌아오지 말고 평안과 자유를 좀 누리고 오라는 아내의 배려였다. 아내의 말대로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집으로 갔다. 아내가 힘들까 봐도 아니고 혼자 있는 게 싫어서도 아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얼른 욕조를 보여주고 싶었다. 방방 뛰며 좋아할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도저히 집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아빠가 들고 들어오는 저 커다란 하얀 물체가 무엇인지 파악이 안 됐는지 질문부터 던졌다.
"아빠. 그게 뭐에여?"
"이거? 욕조?"
"욕조?"
"응. 소윤이, 시윤이 들어가서 목욕하는 욕조. 엄청 크지?"
"에엥? 우와아아아아. 신난다아아아아아"
내가 상상하던 것과 거의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뿌듯했다. 그 뒤의 소윤이 반응도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아빠. 그럼 오늘 목욕해도 돼여?"
사실 난 상황에 따라 바로 목욕을 시켜주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아내와 사전 합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솔하게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됐다. 열쇠를 아내에게 넘겼다.
"글쎄. 엄마한테 여쭤봐. 엄마가 된다고 하시면 되는 거고 아니면 안 되고"
아내는 소윤이와 시윤이 입장에서는 애가 타는 답을 내놨다.
"음, 지금은 안 되고 이따 저녁에 시간이 되면 목욕하자. 그런데 다른 일이 있어서 시간이 안 되거나 너무 늦으면 오늘은 못 할지도 몰라. 알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할 거라고 약속하는 건 어렵다. 육아에 '무슨 일이 있어도'는 매우 위험한 조건이다. 5초 뒤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판에 무슨 일이 있어도라니. 만용이다. 특히나 득이 되는 약속은 하늘이 두 쪽 나도 기억하는 소윤이 같은 아이에게는 더더욱. 소윤이는 아내의 애매모호한 답변을 들은 이후 하루 종일 혼잣말을 가장한 대화를 시도했다.
"아, 오늘 목욕을 할 수 있을까 없을까? 너무 궁금하다"
혹시 못하게 된다면 참 가혹한 일이라는 생각은 했다. 이럴 때마다 어렸을 때 게임팩 샀던 날이 떠오른다. 아빠와 함께 용산전자상가에 가서 게임팩을 산 날이면 엄마에게 그렇게 사정을 했다.
"엄마. 오늘 산 거니까 딱 한 판만 하게 해주세요. 네?"
"오밤중에 무슨 게임이야 게임은. 안 돼"
"아, 엄마. 오늘 샀으니까요. 딱 한 판만"
"아이 진짜. 그럼 딱 한 판이야"
"엄마. 엄마. 한 판은 너무 짧으니까 딱 30분만"
"알았어. 그럼 딱 30분"
그럼 새로 산 게임팩을 꽂고 아빠랑 나란히 앉아서 황홀한 30분을 보냈다. 그때는 엄마를 위해 내 모든 살과 피를 쏟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엄마의 은총이 감개무량했다. 소윤이도 바로 목욕을 승낙 받았으면 그런 심정이었겠지만 결정은 미뤄졌다.
오후에는 아름다운 가게와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다. 옷 정리를 하면서 꽤 상태가 괜찮은 옷이지만 주변에 물려줄만한 사람이 없는 옷들을 따로 분류했는데 그 양이 꽤 많았다. 아름다운 가게에 갖다 주기로 한 걸 미루고 미루다 오늘에서야 실천에 옮긴 거다. 100리터 쓰레기봉투로 한가득에 조금 더 있었다. 양이 많아서 기증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가르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 사이 아이들은 차 안에서 점심까지는 아니고 허기를 달래는 목적으로 주먹밥을 먹었다. 다음은 알라딘 중고서점. 처치홈스쿨에 필요한 책과 우리 집에 비치할 책을 사러 갔다. 소윤이는 책 몇 권을 고르더니 자리에 앉아서 한참 책을 읽었는데 시윤이는 시종일관 목줄 없는 강아지처럼 돌아다녔다. 여기저기 참견하고 만지고.
"강시윤. 쉿. 여기 서점이야. 조용히 해야지"
이 말을 도대체 몇 번이나 한 건지. 그래도 큰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무사히 책을 샀다. 사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엄청 얌전하게 있어준 편이다. 소윤이야 그렇다 쳐도 한창 혈기패기왕성한 네 살 남자아이를 데리고 '정숙'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한 시간을 넘게 머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여보. 오늘 소윤이, 시윤이가 잘 기다려줬으니까 우리 어디 카페라도 갔다 갈까요?"
"그래, 좋아"
과연 정말 소윤이와 시윤이의 노고를 보상하는 의도인 건지 의심스럽긴 했다.
'그냥 여보가 커피 마시고 싶은 거 아니야?'
마음의 소리로만 담아뒀다. 롬이가 커피도 좋아하나.
자주 가는 독립된 공간이 있는 카페라 애들이 좀 자유롭게 있었다. 오늘도 아내와 나는 나름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시간도 가졌고. 커피를 다 마시고 일어날 때쯤 소윤이가 얘기했다.
"아빠. 저번에 은율이랑 왔을 때처럼 돌 던지기 하고 싶어여"
"소윤아. 오늘은 시간이 없어. 얼른 집에 가야 너네 목욕 시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지"
"오늘 목욕할 거에여?"
"응. 엄마한테 여쭤봐"
"엄마. 오늘 목욕해도 돼여?"
"어. 목욕하자. 대신에 나오라고 하면 울거나 떼쓰지 말고"
"알았어여"
집에 가자마자 소윤이와 시윤이의 머리를 감겼다. 그다음 욕조를 씻어서 물을 받고 아이들을 넣어줬다. 물을 받을 때부터 이미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신나는 표정이었다. 이제는 소윤이와 시윤이를 욕조에 넣어 놓고 굳이 지켜보지 않아도 불의의 사고가 걱정되지 않을 정도로 애들이 컸다. 네 살짜리 시윤이 혼자였으면 여전히 불안했겠지만 듬직한 여섯 살 소윤이가 있어서 괜찮다. 소윤이의 역할이 날로,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아이들이 목욕하는 동안 난 저녁을 준비했다. 지난번에 얼려둔 돼지고기를 녹여서 굽기로 했다. 수육용으로 산 거라 크고 두꺼운 덩이였다. 유튜브에서 본 걸 참고해서 기름을 두르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미세 기름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고기가 구워지는 모습은 유튜브에서 본 것과 거의 비슷해서 만족스러웠지만 뒤처리가 문제였다. 아내가 주방 일대를 싸그리 청소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에 좀 미안했다. 과장이 아니고 주방 일대는 물론이고 바닥과 매트 일부까지 미끈거렸다.
"여보. 이쪽으로는 오지 마"
"왜?"
"괜히 보면 심란해져"
"왜? 너무 심각해?"
"응. 어차피 안 봐도 크게 상관없으니까 오지 마"
"알았어"
모든 저녁 준비를 마쳤을 때는 나도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하아. 이게 웬 사서 고생이야'
그래도 고생한 만큼 고기는 아주 맛있게 구워졌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엄청 맛있게 먹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아내가 애들과 함께 들어갔다. 그 사이 난 설거지를 했다. 양이 많지는 않았는데 기름 묻은 게 많아서 애를 먹었다. 양을 보고 방심했다가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힘들었다. 그래도 이제 '다 이루었다'라고 생각하고 화장실에 갔는데 숨이 턱 막혔다. 한쪽 공간을 꽉 채우고 있는 욕조가 눈에 들어왔다. 맥이 쑤욱 풀렸다. 다 마쳤다고, 이제 더 이상 할 일은 없고 그냥 쉬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화장실에 욕조라니, 욕조라니이이이잇.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 조용히, 묵묵하게 장난감을 치우고 욕조를 정리하는 것 말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