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4(금)
소윤이는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수시로 할머니가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할머니를 향한 그리움은 문득문득 소윤이를 찾아오는 듯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엄마, 아빠를 대체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엄마, 아빠도 할머니, 할아버지를 대체하지 못한다. 그래도 할머니를 향한 소윤이의 그리움은 슬픔의 농도가 짙지는 않았다.
"엄마. 할머니가 갑자기 보고 싶어여"
정말 특별한 추억이었나 보다. 종종 주무시라고 해야 하나.
아내는 오늘도 금요철야예배에 가겠다고 했다. 아내의 결정에 따라 애들은 낮잠을 재우기로 했다. 아내와 눈짓으로 의사를 교환했다. 아내는 나에게 애들을 재우라고 했다.
"소윤아, 시윤아. 오늘 낮잠은 아빠랑 자자"
"왜여?"
"이따가 교회 갔다 오면 밤에는 엄마랑 잘 거니까"
"이잉. 자기 싫은데"
"그래도. 예배드리려면 자야지"
아내는 곧이어 같은 공간, 시야 안에 들어오는 나에게 카톡을 보냈다.
[애들 잘 때 잠깐 나갔다 올게용]
목적은 없었다. 잠시 집에서 벗어나고 싶은 듯했다. 어디를 가려고 그러냐는 나의 물음에 '그냥 카페나 뭐 어디'라고 대답한 걸 보면.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도 아예 인사를 했다.
"소윤아, 시윤아. 엄마는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여?"
"그냥. 잠깐 밖에"
"카페?"
"그럴지도 모르고. 아빠랑 잘 자"
"엄마. 잘 갔다 와여. 이따 만나자여"
오전 내내 어제 아내와 나눴던 대화를 생각하며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기 위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 더 너그럽게 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권력의 우위(부모와 자식 간에도 엄연히 권력이 존재한다)를 이용해 습관적으로 압박했던 부분은 아니었는지 자기 검열을 하며 여러 면에서 조금 더 수용하고 사랑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뭐 나를 크게 시험할만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고.
소윤이와 시윤이를 데리고 방에 들어갔다. 나도 평소보다 훨씬 더 졸려서 애들이랑 같이 한숨 잘까 싶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를 양옆에 눕히고 나도 같이 누웠다. 마치 밤에 누운 것처럼 순식간에 정신을 잃고 잠들었던 거 같다. 잠깐 졸았다고 생각하고 눈을 떴을 때는 소윤이도 눈을 뜨고 있었다.
"소윤아, 안 잤어?"
"네"
"왜 안 잤어"
"잠이 안 와서여"
그냥 10-20분 지났겠거니 생각하고 시계를 봤는데 한 시간도 넘게 지난 뒤였다. 황당했다. 내가 한 시간이나 잤다는 것도 그렇지만 소윤이가 그 시간 동안 자지 않았다는 게 더 당황스러웠다.
"소윤아. 이렇게 오래 안 잤다고?"
"네"
"하아"
사실 소윤이는 안 재우면 그만이다. 거의 낮잠을 자는 일도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났다. 자기로 '약속'을 하고 들어왔는데 애초에 그걸 지킬 의지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잠 자기 전까지 견고하던 수용과 이해의 댐이 무너졌다. 감정의 불순물이 섞여서 소윤이에게로 흘러갔다.
이때 시윤이도 깼다. 시윤이는 한 시간 정도 잔 거니까 깨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가 소윤이에게 "눈 감고 자"라고 말하는 걸 듣고는 시윤이도 곧바로 다시 눈을 꽉 감았다. 눈 감는 걸로도 치명상을 입히는 이 녀석의 매력이란.
소윤이에게 혼자 자라고 하고 방에서 나왔다. 시윤이도 따라 나왔다. 당연히 소윤이는 잠들지 못했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소윤이에게 가서 재워줄 테니 자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얘기했다. 그렇게 한참을 누워 있었지만 소윤이는 자지 않았다. (않은 건지 못한 건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포기했다. 자고 안 자고를 떠나서 고집스럽게 자기 뜻대로 하려는 소윤이에게 인간 대 인간으로 화가 나고 짜증이 났던 거 같다.
"소윤이는 이제 아빠한테 물어보지도 말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알았어? 자기 싫으면 자지 말고, 먹기 싫으면 먹지 말고 너 알아서 하라고"
썩 좋은, 아니 꽤 좋지 않은 대응이라는 걸 느끼면서도 그렇게 얘기했다. 여섯 살 소윤이에게 나의 감정을 티 내고 싶었다.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들고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지. 그러고 난 작은방에 들어와서 노트북을 켰다. 소윤이는 조금 흐느끼다가 조용한가 싶더니 금세 시윤이와 웃으며 놀기 시작했다.
'그냥 재우지 말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지만. 이제 소윤이의 일상에 낮잠을 아예 없애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소윤이는 중간중간 나에게 말을 걸었지만
"아빠한테 말 걸지 말라고 했잖아"
라고 대답했다. 그렇다고 소윤이가 풀이 죽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마치 모든 걸 헤아린다는 듯 의연한 표정으로 다시 자기가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꼭 나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게 증명되는 지점이다. 소윤이는 나를 신경 쓰면서도 자기 일상을 이어갔다. 성숙은 나이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증명됐다.
여전히 나의 내면에 꾹 눌린 짜증 같은 게 있었다. 어디 분출하지 못한 찜찜한 무언가가 있었다. 머리도 지끈거렸다. 교회에 가기 전까지 뭔가 퀴퀴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교회에 가기 전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여보. 대박. 나 오늘 커피 한 잔도 안 마셨네"
"진짜?"
"어. 이럴 수가"
매우 특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말고는 거의 없던 일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커피를 안 마셔서 더 예민했나'
나의 연습 시간(예배는 9시, 연습은 8시부터)에 맞춰 교회에 도착했고 아내는 나를 위해 [윌]에 가서 커피를 한 잔 사 오겠다고 했다. 연습 시간 동안 애들이랑 예배당에서 씨름하느니 차라리 카페라도 갔다 오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열심히 연습하고 있을 때 아내와 아이들이 들어왔다.
예배가 막 시작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아내와 시윤이가 사라졌다. 소윤이만 혼자 앉아 있었다.
'시윤이가 오줌이 마렵다고 했나'
이런 생각을 하며 드럼을 치는데 아내가 울면서 들어왔다. 소윤이는 우는 아내를 안아줬다. 아내의 배가 너무 불러서 마치 수십 년 된 고목을 안는 것처럼 양 손끝이 맞닿지도 못했지만 소윤이의 표정과 몸짓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시윤이는 멋쩍은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정황상 아내의 눈물은 예배를 통한 은혜의 눈물이 아니었다.
'시윤이가 뭔가 말을 안 들어서 나갔는데 거기서도 힘들게 했구나'
라고 생각했다.
소윤이는 이제 눈물의 종류 정도는 구분할 줄 안다. 엄마가 속상해서 우는지, 은혜받아서 우는지, 화가 나서 우는지는 어느 정도 안다. 기도하거나 찬양하다가 울 때는 소윤이가 아내를 위로하는 듯 안아주지 않는다. 시윤이도 마찬가지다. 엄마의 눈물이 자기의 말이나 행동에서 비롯됐다는 걸 알면 특유의 겸연쩍은 몸짓과 표정이 드러난다. 여러 정황상 범인은 시윤이었다.
드럼 연주를 마치고 자리에 가서 아내에게 물었다.
"여보. 아까 얘 때문에 울었어?"
"응"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뻔했다. 시윤이는 자기는 모른다는 듯 태연스럽고 천연덕스럽게 능청을 떨었다. 그 능청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은 키워 본 사람만 안다. 나는 물론이고 걔 때문에 감정의 파고를 겪은 아내마저도 그 녀석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이런 게 둘째의 매력이자 혜택이다.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끝날 때까지 잠들지는 않았다. 소윤이는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아빠. 아까 제가 안방에 이불 정리한 거 봤어여?"
"아니. 못 봤는데"
"엄마. 그거 제가 왜 정리했는지 알아여?"
"왜?"
"아까 아빠가 저한테 아빠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을 때 속상해서 제가 안방에 들어가서 그거 정리한 거에여"
"진짜? 소윤아, 너 엄마 닮았나 봐"
나중에 가서 봤지만 소윤이는 이불과 베개를 여느 군부대의 내무반 못지않게 칼각을 잡아놨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여섯 살의 작품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듯했다. 아내도 종종 나랑 다투면 미친 듯이(진짜 악에 받쳐서) 집안일을 해치울 때가 있다. 소윤이가 딱 그런 거다. 그렇게 하고 났더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더라는 것도 똑같았다. 아, 여러모로 여섯 살 소윤이가 나보다 건강하고 현명하다. 난 감정이 소용돌이치면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인데 소윤이는 조용히 방에 들어가서 이불과 베개의 각을 잡으며 마음을 다스린 거다. (아까 위에도 썼듯, 소윤이는 그러고 나와서 아무렇지 않게 시윤이와 웃고 떠들었다.) 소윤이는 자기가 기분이 안 좋을 때 또 뭘 하는지도 얘기해줬다.
"저는 기분이 안 좋으면 책도 좀 읽다가 방에 들어가서 정리도 하다가 그래여. 그러면 좀 괜찮아져여"
소윤아, 오늘도 한 수 잘 배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