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마음 먹기에 달렸다

20.02.15(토)

by 어깨아빠

아내는 오늘은 어디라도 나갔다 오자고 했다. 그리 추운 겨울이 아니었음에도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내내 집에만 머문 게 억울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그랬다. 그래도 아직 밀폐된 실내는 좀 그렇고 야외의 어딘가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서 소윤이와 시윤이를 좀 마음껏 뛰놀게 하고, 자전거랑 킥보드도 타게 하고 그러고 싶었다. 마땅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행주산성 공원, 호수 공원, 운전 건강 공원, 동네 자그마한 공원 등을 생각했지만 딱 여기다 싶은 곳은 없었다.


"아빠. 저번에 갔던 노래하는 분수대 있는 거기 가자여"


호수 공원이었다. 소윤이의 뜻대로 결정했다. 아내는 이런저런 간식거리를 챙기며 외출을 준비했다. 애들 옷은 미리 입혀 놨고 아내가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린다고 해서 잠시 차에 가서 내부 청소를 했다. 이렇게 짬짬이 청소를 하는 것처럼 적어 놓으면 매우 부지런하고 청소에 열심인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미루고 미루고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 하는 거였다. 차에 큰 상처가 난 뒤로는 애정을 많이 잃었다. (물론 그전에도 홀대하긴 했지만.)


오랜만에 자전거도 실었다. 준중형 차의 트렁크에 16인치 자전거를 넣는 건 성품에 따라 엄청난 분노 유발 행위가 되기도 하지만 어제 딸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참아냈다.


역시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는 걸 보면 우리처럼 참다 참다 나온 사람도 많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도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마스크를 씌웠다. 다행히도 둘 다 마스크는 잘 쓴다. 물론 싫어하지만 참는 거다.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부터 들렀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아내가 애들 옷을 고르면서 나에게 물어봤다.


"여보. 시윤이 이거 괜찮겠어? 멜빵이라 화장실 가면 불편할 텐데"

"어, 괜찮아. 아무거나 입혀"


불편해 봐야 얼마나 불편하겠냐는 마음으로 그렇게 대답했는데, 후회했다. 바지, 내복, 팬티를 한 번에 잡고 쑥 내려서 순식간에 발사 자세를 완성하는 다른 옷과는 달랐다. 양쪽 어깨 끈의 단추를 풀고 치렁치렁한 어깨 끈이 더러운 화장실 바닥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바지를 내리고, 내복과 팬티도 내리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렇게 고생을 한 게 무색하게 처음에는 영점 조준을 잘못해서 내복이 조금 젖었다. (아들 키워 본 사람은 알 텐데 오랫동안 바지와 내복, 팬티에 압박당한 아들의 소중이는 인근의 피부와 찰싹 달라붙어 있기도 한다. 그걸 좀 떼어 줘서(?) 정면을 향하도록 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고 바로 쏴 버리면 엄한 방향으로 발사된다.


"으으으으으으. 시윤아. 잠깐만"


지나가는 세월은 잡을 수 없는 것만큼이나 발사되고 있는 오줌을 멈추는 것도 어렵다. 나의 신속한 대처로 큰 화는 면했다. 무사히 소변을 보고 다시 옷을 입힐 때 더욱 후회했다. 멜빵바지를 안 입힐 수도 없고.


소윤이와 시윤이를 데리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 아내는 먼저 가서 자리를 잡았다. 아내는 먼저 옥수수를 꺼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옥수수를 엄청 잘 먹는다.) 세 개를 싸 갔는데 아내와 나는 반 개씩 먹고 소윤이와 시윤이가 한 개씩 먹었다. 이런 거 먹을 때는 시윤이가 먹는 걸 보는 게 더 재밌다. 소윤이는 한 알 한 알 깨작깨작 먹지만 시윤이는 그런 거 없다. 일단 입에 넣고 윗니와 아랫니로 앙 깨물어서 수십 알을 털어낸다. 그러고는 그 작은 입으로 부지런히 오물거리고.


옥수수를 다 먹고 나니 딸기와 감이 등장했다. 딸기와 감을 먹고 나니 과자도 등장했다. 자전거 한 대, 킥보드 두 대를 가지고 간 게 무안하도록 일단 먹기만 했다. 상관없었다. 바깥공기를 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먹든 놀든 그건 애들 마음이고.


소윤이는 자전거와 킥보드를 번갈아 가며 탔고 시윤이는 킥보드만 열심히 탔다. (아직 페달에 발이 닿지 않아서 잡아주지 않으면 타지 못한다.) 그간의 답답함을 다 쏟아내려는 듯 둘 다 열심히 발을 굴렀다. 찍찍이 캐치볼도 했는데 소윤이의 성장이 느껴졌다. 시윤이는 아직 던지는 것도 받는 것도 내가 의도적으로 성공을 연출해야 가능했는데 소윤이는 달랐다. 던질 때는 힘도 세고 정확하기도 했다. 받는 것도 제법이었다. 시윤이랑은 온전한 캐치볼이 아예 불가능했지만 소윤이하고는 어느 정도 주고받는 재미가 있었다. 시윤이 스스로도 재미가 없었는지 킥보드를 타겠다며 먼저 이탈했다.


그러다 또 킥보드 타고 자전거 타고. 격렬하게 뛰지 못하니 의자에 앉아 있어야만 하는 아내가 제일 심심했다. 그래도 나중에는 아내도 일어나서 나랑 캐치볼을 했다. 아내는 받는 것도 던지는 것도 매우 우수했다. 체력이 너무 없어서 그렇지 아내랑 뭐든 운동을 같이 했으면 재밌었을 거라는 허망한 생각을 했다. (결혼한 해에 임신 한 번 했었고, 그다음 해에 소윤이를 가졌고, 그 뒤로는 쭉 임신과 육아의 향연이었으니 허망하다는 거다.) 여보, 우리 황혼에 봅세. 게이트 볼이나 치자고.


우리가 자리 잡은 곳에 땅따먹기(정확한 명칭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그렇게 불렀다. 모래에서 돌 튕겨 가지고 자기 땅 많이 확보하는 그 땅따먹기 말고, 커다란 직사각형을 이리저리 분할해서 여러 칸을 만든 뒤 각각의 칸에 1부터 9까지 하나씩 써넣은 다음, 돌멩이 하나를 쥐고 1에 던져서 들어가면 1이 쓰인 칸은 밟지 않고 깽깽이와 점프를 이용해 나머지 2-9가 쓰인 칸을 왕복으로 밟고 돌아온 뒤 1에 놓인 돌멩이를 주우면 1단계를 클리어하는 그런 게임.) 판이 그려져 있었다. 소윤이랑 그걸 하기 시작했다. 시윤이도 하겠다고 껄떡거렸지만 금세 흥미를 잃고 다시 킥보드로 갔다. 내가 좀 더 허위, 과장 반응을 했으면 머물렀을지도 모르지만 소윤이하고 제대로 하고 싶었다. 다시 말하자면, 소윤이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소윤이는 규칙을 알려주니 금방 이해했다. 운동 능력이 부족해서 자꾸 선을 밟고 깽깽이(외발뛰기의 전통 표현)를 실패했지만 게임을 진행하는데 전혀 무리가 되지는 않았다. 마침 아내와 시윤이는 화장실에 가서 소윤이랑 둘이 정말 재밌게 했다. 아빠의 실패를 보고 고개까지 젖혀가며 웃어대는 소윤이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눈치 빠른 소윤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의도된 실패를 이어갔다.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경쟁과 비교의 습관에 물들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이때만큼은 추격자를 자처했다.


"아, 소윤이가 너무 잘해서 벌써 7단계인데 아빠는 아직도 2단계네"


긴박한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순식간에 7단계까지 도달했다. 누가 먼저 8단계에 가는지 겨루고 있는 와중에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떨어졌다.


"어? 소윤아. 비 온다"

"아빠. 저도 맞았어여"

"우리 이제 정리하고 가야겠다. 소윤이도 얼른 와서 도와줘"


반가운 비였다. 아내와 언제쯤 집에 갈지 고민하던 차에 소윤이와 시윤이도 어쩌지 못하는 천재지변이라니. 소윤이와 시윤이는 가기 싫다는 얘기를 할 겨를도 없어 분주했다. 실속 없는 분주함이라 실제로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귀가를 위한 설득과 사전 작업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서둘러서 차에 탔다. 자전거, 킥보드, 돗자리 등을 작은 트렁크에 다시 싣는 건 꺼내는 것보다 더 번잡스러웠다.


아내는 애들 목욕을 시키자고 했다. 저녁도 밖에서 먹을까 잠깐 고민했지만 시윤이가 너무 졸려 보였기 때문에 일단 집에 가기로 했다. 혹시라도 졸리다고 짜증만 낼지도 모르니까. 시윤이는 집에 가는 길에도 자고 싶어 했지만 아내가 필사적으로 깨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소윤이와 시윤이의 머리를 감기려고 했는데 아내가 자기가 하겠다며 나섰다. 아내는 이제 바닥에 떨어진 종이 쪼가리 하나 줍는 것도 힘들어졌다. 아이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으면 꽤 어려운 일이 되는 머리 감기기를 맡기기가 꺼려졌지만 아내는 할만하다고 했다.


애들을 아내에게 넘기고 난 저녁을 차렸다 집에 있는 재료를 이용해서 간단하게 볶음밥을 만들고, 아내와 내가 먹을 비빔국수를 준비했다. 부지런히 준비하고 있는데 화장실 안에서 자꾸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주로 들리는 건 신경질이 가득 담긴 시윤이의 고성이었다. 욕조에서 서로 발을 펴다가 닿는 게 싫었나 보다. 시윤이에게 조금 더 강력하게 주의를 줬다. 소윤이에게도 웬만하면 그러지 말라고 했고. 비슷한 상황이 몇 번 더 이어졌고 자꾸 다투면 더 이상 목욕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사실 좀 짜증도 났다. 아니 그렇게 큰 욕조를 사 줬으면 감사하고 즐겁게 목욕을 할 것이지 도대체 왜들 싸우고 난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즐거운 저녁 식사를 위해 여러 번 자비를 베풀었다. 다만 끝까지는 아니었다. 다시 한번 시윤이의 짜증 섞인 울음소리가 들렸고 곧바로 목욕은 종료됐다. 물론 그리 아름다운 마무리는 아니었다.


마침 저녁 준비도 다 끝나서 바로 식탁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소윤이와 시윤이(특히 소윤이)는 처음에는 조금 울적한 기분으로 시작했지만 이내 웃음을 찾았다. 오늘은 애들을 내가 재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윤이야 들어가자마자 잘 테니 상관없었지만 소윤이와 교감이 좀 필요했다. 아내에게도 좀 자유를 주고, 사랑의 불시착 볼 시간도 주고.


"소윤아, 시윤아. 오늘은 아빠랑 자자?"

"네"


소윤이는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노력하는 게 보였다. 아빠랑 자는 거보다는 엄마랑 자는 게 더 좋아서 어쩔 수 없이 슬퍼지는 감정을 꾹 참고 아빠의 말에 따르기 위한 노력. 나도 다시 한번 다짐했다.


'오늘 밤에는 소윤이가 아무리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산만하게 굴어도 다 받아주겠다'


예상대로 시윤이는 따로 고려할 필요도 없이 바로 잠들었다. 소윤이는 이것저것 자신만의 수면 의식은 물론이고 여러 말과 행동을 보탰지만 다 기쁘게 반응해줬다.


"소윤아. 소윤이는 엄마, 아빠가 소윤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네"

"언제?"

"어제 낮잠 잘 때 아빠가 저한테 그렇게 얘기할 때 쪼금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는데 지금은 아니에여"

"그랬구나. 미안해. 그래도 알지? 엄마, 아빠는 소윤이 사랑하지 않는 순간이 없다는 거?"

"알아여. 저도 그래여"


부디 마음이 전해지길 바라며 소윤이의 말을 경청했다. (소윤이는 꽤 오랫동안 수다스럽게 떠들었다.)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고 둔 결과, 내가 먼저 잠들었다. 또렷하지 않은 상태에서 소윤이의 목소리가 들리곤 했다.


"아빠. 벌써 잠들었어여?"

"아빠. 지금 코골았다여"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소윤이도 잠든 뒤였다. 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윤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목이 마르고 오줌이 마려워서 나왔다고 했다. 소윤이는 화장실에 갔다가 물을 마시고 다시 방에 들어갔다.


"여보. 소윤이 안 잔 거 같아?"

"진짜? 왜?"

"오줌이 마렵다고 했는데 오줌을 거의 안 쌌어. 그리고 표정이 잠든 표정이 아니야"

"그래?"


그래, 역시 문제는 아빠였나 보다. 똑같은 상황인데 어제는 틀리고 오늘은 맞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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