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7(목)
머리(카락)를 잘라야 했다. 다니는 미용실이 파주에 있어서 가려면 꽤 큰마음을 먹어야 했는데 가기로 했다. 아침에 전화를 했는데 예약은 이미 다 찼고 그냥 가도 되긴 하는데 많이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답을 받았다. 시윤이도 데리고 가기로 했다. 더벅더벅한 시윤이 머리도 자르고 데이트도 하고. 그 덕에 아내와 소윤이도 따로 데이트하고. 다행히 둘 다 좋아했다. 만약에 이럴 때 시윤이가 자기도 엄마랑 있겠다며 울고 난리 쳤으면 정말 서운했을 거다.
"시윤아. 아빠랑 데이트하니까 좋지?"
"네, 도아여엉"
시윤이는 미용실에 가는 내내 입을 쉬지 않았다.
"아빠아. 구듬이 계단 가타여엉"
"아빠아. 저기 땀대(참새)가 이떠떠여엉"
"아빠아. 삐뽀차다"
창밖에 보이는 모든 풍경을 언급하려는 듯 부지런히 말을 했다. 낡은 차의 풍절음 덕분에 시윤이의 목소리를 듣는 게 쉽지 않았지만 모든 말에 성의를 담기 위해 노력했다. 좋은 곳, 재밌는 곳에 데리고 가는 것도 물론 좋지만 의외로 이런 시간에 관계가 단단해진다고 믿고 있다.
미용실에는 정말 사람이 많았다. 게다가 대부분 파마나 염색을 하는 손님이라 시간도 오래 걸릴 거 같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기다리기로 했다. 시윤이는 얌전히 잘 있었다. 때가 때인지라 미용실 안의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나와 시윤이도 마찬가지고. 답답하기도 했을 텐데 짜증도 한 번 안 내고 아주 차분하게 있었다. 다만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졌다.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렸다. 시윤이도 한계가 왔는지 너무 힘들다면서 조금씩 칭얼대기 시작했다. 이건 충분히 명분이 있는 칭얼거림이었기 때문에 잘 달래줬다. 육아인의 3대 거짓말 중에 하나인
"어. 조금만 기다려"
를 무수히 내뱉었다. 나중에 보니 시윤이와 내가 마지막이었다. 시윤이부터 의자에 앉았다.
"어떻게 자를까요?"
"음, 일단 투블럭으로 할 건데 여기 옆쪽을 아예 바짝 치는 것도 괜찮을까요?"
"어우 너무 예쁘죠"
"그럼 이쪽 옆을 싹 밀어주세요"
시윤이의 왼쪽 옆머리는 싹 날아갔다. 앞머리도 층을 냈고. 허연 속살이 비치는 옆머리에는 스크래치도 넣었다. 누가 봐도 미용실에 가서 자른 머리였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똑같은 모양으로 하고 싶었지만 내 나이가 어느새 36살이라는 것과 36살인 건 둘째치더라도 언젠가 비슷한 머리를 했을 때 여론이 좋지 않았다는 걸 떠올리며 자중했다.
"저는 그냥 깔끔하게 잘라주세요"
자르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길어서 힘들었던 미용실 데이트를 무사히 마쳤다. 시윤이가 기다림에 지쳐갈 때 머리 다 자르고 나면 과자를 사러 가자고 했었다. 달래려고 그런 것도 있고 기특해서 뭐라도 사주고 싶기도 했고, 명색이 데이트니 아빠의 작은 선물이기도 했고. 편의점에 들러서 빼빼로를 두 개 샀다. 시윤이는 미용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소윤이 얘기를 많이 했다.
"누나늠 머하고 이뜰까아"
"아빠아. 누나늠 엄마양 까뻬 가떠여엉?"
빼빼로도 두 개를 골랐다.
아내와 소윤이는 스타벅스에 갔다고 했다. 소윤이는 처음에 카페는 지겨워서 싫고 다른 데를 가자고 했지만 만만한 곳이 카페였다. 카페가 싫으면 집에 있어야 한다는 말에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내와 소윤이 쪽도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점심까지 따로 먹을까 하다가 시윤이랑 먹을만한 게 마땅치도 않고 괜히 조심스러워서 집에 가서 함께 먹기로 했다. 아내와 소윤이가 있는 스타벅스로 갔다. 시윤이는 헤롱댔다. 요즘은 거의 낮잠을 재우지 않지만 원래대로라면 딱 낮잠 잘 시간이었다. 거기에 30분 가까이 차를 타고 가야 하니 졸리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운전하랴 잠들려고 하는 시윤이 깨우랴 정신이 없었다. 사실 재워도 상관없기는 한데 요 며칠 낮잠을 안 재우고 빠른 육아 퇴근을 경험했더니 또 거기에 맛이 들렸다. 잠깐의 고비만 넘기면 몇 시간 빠른 퇴근이 찾아온다고 생각하니 자도록 내버려 두기가 아까웠다. 거의 9부 능선을 넘어갔을 때쯤 카페에 도착했다. 도착해서도 아내에게 안겨서 졸리다며 투정을 부렸지만 점점 기운을 차렸다.
아내는 시윤이의 머리를 보고 조금 놀라긴 했지만 크게 거부감은 없어 보였다. 아내는 나에 비하면, 특히 머리와 관련해서는 파격적인 시도를 잘 하지 않는 편이다. 자기 머리에도 그렇고 자식들 머리에도 그렇고. 나름 파격이라면 파격인 시윤이 머리도 내가 혼자 데리고 갔으니까 가능했을 거다. 뭐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쩌겠나. 이미 잘려 나간 머리카락인데.
시윤이와 내가 가고 나서 거의 바로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순서상으로는 점심이었지만 시간상으로는 오히려 저녁에 가까운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아내와 나는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소고기 뚝배기를 하나 사서 갔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장모님이 싸 주신 반찬으로 먹였다.
소윤이는 오늘도 메모리 게임은 할 거냐고 노래를 불렀다. 밥 먹고 나서 메모리 게임을 시작했다. 오늘은 애초에 마음을 먹었다.
'너네 하고 싶을 때까지 해라'
메모리 게임, 보물 찾기로만 한 시간을 넘게 했다. 아이랑 놀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같은 놀이를 여러 번 반복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처음과 같은 흥을 유지하며 동일한 재미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아빠의 흥이 떨어진 걸 소윤이와 시윤이가 알아차리면 얼마나 씁쓸하고 착잡하겠나. 차라리 안 하면 안 했지 기왕 시작했으면 최선을 다하는 게 놀이의 도리다. 다행히 오늘은 도리를 다 했다.
아내는 잠시 방에 들어가서 잤다. 우리의 놀이가 끝나고 잠시 쉴 때 아내가 깨서 나왔다.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몸살 기운이 있거나 열이 나는 건 아니지?"
"어.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전형적으로 낮잠 자고 나서 머리 띵한 그런 느낌이야"
점심을 워낙 늦게 먹어서 저녁은 따로 먹지 않기로 했다. 대신 요거트와 과일, 고구마, 감자를 줬다. 밥을 줬어도 됐겠다 싶을 정도로 잘 먹었다. 밥 먹고 나서는 자기들끼리 메모리 게임을 한다면서 카드를 늘어놨다. 잘 하는가 싶더니 서로 뭔가 의견이 안 맞았는지 투닥거렸다. 소윤이가 삐져서
"알았어. 그럼 누나는 안 해. 혼자 해"
라며 자리를 이탈했다. 그랬더니 시윤이가 소윤이에게
"아니, 그게 아니라아. 나늠 내가 서끄고 디퍼서 그던 거야앙"
이라고 얘기하며 울먹거렸다. 그랬더니 소윤이는 또 못 이기는 척 다시 자리에 앉고. 요즘은 이 두 녀석의 밀고 당기기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우리 집의 규칙(예를 들면 누나에게 '야'라고 부른다거나, 동생을 조롱한다거나, 일방적으로 강요한다거나 등등)을 어기는 경우만 아니면 적당히 두고 본다. 자기들끼리 삐졌다가 화해했다가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됐다가 그러는 게 참 볼만하다.
하루 종일 커피를 적잖이 마셨는데도 커피가 당겼다. 캡슐 커피 말고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린 씁쓸한 맛이 물씬 풍기는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고민하다가 아내와 애들이 자러 들어간 뒤 집 근처 카페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사 왔다. 아내 것도 사다 놓을까 하다가 오늘은 다시 일어나기 힘들어 보이기도 했고, 일어나더라도 이미 커피를 한 잔 마셨기 때문에 내 것만 샀다. 오징어집과 콘칩도 샀다.
아내에게 (물론 나에게도 마찬가지지만 특별히 아내에게) 희소식이 있었다. 저녁에 새로 일하게 된 회사의 대표님에게 전화가 왔다. 내용은 이랬다. 나와 함께 일하고 가르쳐 줄 과장님이 아이 둘의 엄마인데 코로나 때문에 둘 다 (어린이집인지 학교인지는 모르겠지만) 집에 있어야 해서 출근을 못하신다는 거다. 고로 다음 주였던 나의 출근도 대략 2주 뒤쯤으로 잠정 연기됐다.
통화를 끝내고 아내에게 내용을 전하니 아내는 두 팔을 들어 올리며 환호를 했다.
"여보오오오. 너무 좋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