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1(수)
아이들은 진작에 떠나고 없는 방에 남아 비슷하게 눈을 뜬 아내와 이야기라도 나누면 거실에서 듣고 득달같이 달려온다.
"시윤아. 엄마, 아빠 일어나셨나 봐"
"딘따아?"
너희보다 늦게 일어나는 것도 이번 주가 끝이다. 흐윽.
오늘도 소윤이는 자기 할 일을 다 마치자마자 메모리 게임을 요청했고 기꺼이 받아줬다. 매일 단련한 덕분인지 이제 소윤이랑 둘이 앉아서 하면 한 판을 끝내는데 몇 분 안 걸린다. 전력을 다 쏟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봐주지는 않는데, 맞추는 개수도 나랑 얼추 비슷하다. (그렇다고 박진감이 느껴지거나 없던 재미가 샘솟는다는 건 아니다. 다만 연기할 뿐이고, 소윤이는 만족한다.)
저녁에 파주 쪽에서 약속이 있었다. 아내는 함께 파주로 가서 처갓집에 갈까 고민하는 듯하더니 안 가기로 했는지 별말이 없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 하늘도 파랗고 공기도 깨끗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우리 집의 유행어가 생겼다. [어디라도].
"엄마. 우리 오늘 어디라도 갈까여?"
"아빠. 오늘 어디라도 갈 거에여?"
아내는 대답했다.
"그래. 어디라도 가자"
본의 아니게 카페 탐방을 하고 있다. 집 가까이에 공원이 있는 곳이 왜 비싼 건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평소에는 소리가 너무 울려서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잘 안 가지만 조그맣게 야외 공간이 있는 집 근처 카페를 오늘의 목적지로 정했다.
차 타면 5분 거리인 아주 가까운 곳이지만 준비는 동네 마실 복장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럴싸하게 빼어 입었다는 건 아니고 그저 [츄리닝 바람]은 아니라는 거다. 아무리 짧은 외출이라도 소중한 시기를 보내는 만큼 한 번 나갈 때 기분을 잔뜩 내고 있다.
카페 입구에 도착했는데 주차장에 차가 많았다.
"사람 많은가?"
"그러게. 차가 많네"
"지나가면서 슬쩍 봐봐"
손님이 많았다. 가득 찼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어우. 너무 많다. 안 되겠다"
"그러게. 다른 데로 가야겠다"
일단 지나치긴 했는데 마땅한 목적지가 없었다.
"여보. 그냥 파주나 갈까?"
"그럴래? 그래 그럼"
5분 거리의 외출이 30분 거리로 바뀌었다. 집에서 나오면서 나한테 꾸중을 들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던 소윤이는 파주 할머니 집에 간다는 소식에 곧바로 웃음을 되찾았다. 시윤이도
"너무 진난다아앙"
을 외쳤지만 이내 잠과의 사투에 빠졌다. 정확히 말하면 시윤이의 잠과 아내의 사투였다. 이제 우리는 되돌리기 어려울 거 같다. 낮잠을 포기하고 이른 밤잠을 취하는 삶에 매료됐다. 다행히 오늘은 시윤이의 잠이 금방 달아났다.
장모님은 어디 나가셨다가 돌아오는 길이라고 하셨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대체 할머니는 언제 오시는 거냐고 계속 질문했다. 정말 몰라서 "모른다"고 얘기하는 아내의 답은 땅에 떨어졌다. 계속 질문하고, 계속 대답하고. 아내는 방으로 피신했다.
나도 잠깐 아내 옆에 누웠는데 금방 눈이 감겼다. 잠이 들면서도 달콤한 게 느껴졌다. 곧 약속 시간이었지만 약속이고 뭐고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달달했다.
"아빠. 똥 마려워여"
똥이 꿈을 깼다. 괜히 소윤이한테 푸념을 했다.
"하아. 엄마, 아빠가 쉬지를 못하게 하는구나"
"아빠. 저는 그냥 똥이 마려워서 마렵다고 한 건데여"
"그래"
똥이 마려워서 마렵다고 한 건데 왜 똥이 마렵냐고 묻는 것과 똑같았다.
장모님은 아내와 아이들이 먹을 저녁을 사서 들어오셨다. 난 약속 시간에 맞춰서 나갔다가 두어 시간 정도를 보내고 돌아왔다. 문을 열자 장인어른이 시윤이 머리를 말려주고 계신 모습이 들어왔다. 두 눈에 졸음이 차다 못해 넘치기 직전인 시윤이의 얼굴도.
"시윤아. 졸려?"
"아니여엉. 안 돌린데여엉"
소윤이는 아직 화장실에서 장모님과 씻는 중이었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온 소윤이 얼굴에도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여보. 괜찮았어? 안 힘들었어?"
"어, 괜찮았어"
아내는 식당에서 밥 먹다가 머리카락이 나왔지만 이 정도는 그냥 넘어가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머리 말리고, 옷 갈아입고, 장인어른과 숨바꼭질 몇 판 하고 갈 채비를 했다. 그 졸린 와중에도 숨바꼭질을 할 때는 기운이 넘쳤다. 우리 집보다 몇 평이라도 넓으니까 숨을 데도 많고.
예상대로 시윤이는 카시트에 앉자마자 고개를 떨궜다. 소윤이는 이제 그런 일이 없다. 진짜 막 피곤에 절어서 버티지 못할 정도로 고된 하루를 보냈거나 밤 10시, 11시 정도로 깊은 밤이 아닌 이상, 이제 차 타고 오면서 자는 건 거의 없는 일이다. 나랑 수준 높은 끝말잇기를 할 정도로 정신도 멀쩡했다.
시윤이는 그대로 눕히고 소윤이에게 얘기했다.
"소윤아 책 한 권 골라. 읽어 줄게"
"진짜여? 왜여?"
"그냥. 소윤이 행복하라고"
소윤이도 알고 있다. 이런 상황(밤이 깊고, 시윤이가 잠든)에는 집에 도착하면 곧바로 자는 게 무언의 규칙이라는걸. 차 안에서 물어보기도 했다.
"아빠. 저 잠 안 들어도 책은 못 읽져?"
"오늘은 너무 늦었어"
"알아여. 그냥 한번 물어본 거에여"
그렇게 나오니까 또 괜히 마음도 약해지고, 별 거 아니어도 시윤이 없을 때 '사랑의 집중'을 하기에도 좋고. 사랑에는 훅(hook)과 잽(jab)이 모두 필요하다는 게 나의 개똥 지론이다. 이런 경우가 잽, 디테일을 실천할 기회다. 아내는 로션으로 사랑의 잽을 날렸다. 손이 터서 로션을 발라주려는데 직접 바르고 싶다는 소윤이에게 웬일로 로션을 후하게 짜줬다. (그게 무슨 큰일인가 싶지만 '적당히'를 상실할 때가 많은 소윤이에게, 그것도 그 시간에 그런 자율을 허락하는 건 꽤 큰 결심이고 일반적인 일도 아니다.) 소윤이는 한 손에 잔뜩 쌓인 로션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여보. 쟤 좀 봐"
"소윤아. 그렇게 좋아?"
"크하하하하하하"
거울 앞에 가서 로션을 바르고 나타난 소윤이 얼굴에는 피부에 침투하지 못하고 허옇게 뜬 로션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소윤이의 손이 튼 거지 얼굴이 튼 건 아니었다.
"소윤아. 그걸 얼굴에다 그렇게 바르면 어떻게 해"
"아니, 엄마. 내가 왜 그랬냐면여 이걸 한 손에 옮기고 바르려고 했는데 이 손에 있는 걸 까먹고 얼굴에 문지른 거에여. 크하하하하하하하하"
아내는 이미 오늘의 체력을 다 쓰고 난 뒤라 인자와 자비를 베풀 여력이 없어 보였지만 소윤이를 기다려줬다. 아내의 의지에 마음의 박수를 보냈다. 생각해 보면 소윤이는 '굳이' 해달라는 게 많다. 옷도 혼자서 갈아입을 수 있는데 꼭 갈아입혀 달라고 하고, 이불도 자기가 덮고 자면 되는데 꼭 덮어 달라고 하고. 피곤하고 귀찮을 때는 다정함이라고는 흔적도 없는 투로 마지못해 해주지만 소윤이도 본능으로 아는 거다. 그렇게 아기짓 할 날이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걸. 롬이가 태어나면, 내가 없는 시간에 가장 도움이 많이 돼야 하는 사람은 자기라는걸. 나보다 많이 어리다 뿐이지 늙고 있는 건 나나 우리 딸이나 똑같다.
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