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3(금)
아내는 얼마 전부터 이런 얘기를 했다.
"아, 여보 출근하기 전에 낮에 혼자 좀 나갔다 와야 되는데"
어제는 이렇게 얘기했다.
"여보. 나 내일 혼자 좀 나갔다 올게"
당연히 특별한 계획이나 약속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기간 만료가 임박한 무료 커피 쿠폰을 쓰기 위해 카페를 가는 심정이었겠지. 아내는 점심시간쯤 나갔다. 코로나 사태만 아니었어도 아내 혼자 외출하는 날이 더 많았을 거다.
소윤이는 점심을 먹자마자, 아니 그전부터였던 거 같다. 메모리 게임을 하자고 했다. 오늘이 마지막 자유로운 평일이라는 걸 생각하면 기꺼이 자리를 깔고 앉아야 했지만 도저히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소윤아. 지금은 아빠가 메모리 게임을 못하겠는데"
"왜여?"
"그냥 너무 맨날 하니까 좀 지겨워서"
"흐음. 그래여? 알았어여"
대신 오후에 동네 산책할 것을 약속했다.
메모리 게임이 싫은 것도 있었지만 읽던 책이 거의 끝자락이라 그걸 마저 읽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난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둘이 놀았다. 병원놀이를 한다고 하면서 인형을 가지고 안방과 거실을 바쁘게 오갔다.
"소윤아, 시윤아. 이제 우리 밖에 나갈까?"
"어. 우리 병원놀이하고 있었어여"
"그래? 더 할 거야?"
"아빠. 그럼 10분만 더 할게여"
"그래, 알았어"
외출도 미룰 정도로 재밌었나 보다. 요즘은 그 어떤 활동(?)보다 외출의 욕구가 강한 때라 뭘 하고 있든 나가자고 하면 바로 상황이 끝나는데,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소파에 앉아서 두 녀석의 병원놀이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잉여롭게 시간을 보냈다.
"아빠. 10분 됐어여?"
"그럼. 훨씬 지났지"
"그래여? 아빠, 그럼 딱 5분만 더 할게여"
"그래, 알았어"
5분은 물론이고 10분, 15분도 지났지만 병원놀이의 흥은 가라앉지 않았다.
"아빠. 5분 됐어여?"
"응. 됐는데. 소윤아. 나가고 싶지 않으면 안 나가도 돼"
"아니에여. 이제 나갈게여"
내복을 입고 있던 소윤이와 시윤이의 옷을 갈아입혔다. 그야말로 동네나 한 바퀴 돌고 오는 짧은 산책이라 대충 입혔다. 소윤이는 무릎에 구멍이 제법 크게 난 '츄리닝'과 경량 패딩, 시윤이는 서로 짝이 없는, 다른 색의 츄리닝 상, 하의와 손에 잡힌 점퍼. 가관이었지만 원래 집 앞 외출은 그렇게 하는 거니까. 양심상 소윤이 머리는 단출하게나마 묶어줬다. 그마저도 안 했으면 조선시대 망나ㄴ...
(나 말고 애들한테 더욱) 아쉽게도 킥보드는 아내가 타고 나간 차 트렁크에 있었다. 도보 산책이었지만 소윤이와 시윤이는 기뻐했다. 강아지를 키워보지 않았지만 강아지 같았다. 오랫동안 산책 못하다가 시켜주면 딱 그런 모습일 듯했다. 차가 다니는 길이 있어서 멈출 때 말고는 계속 뛰어다녔다. 그냥 뛰었다. 그렇게라도 에너지를 소모해야 사는 것처럼 계속 뛰었다. 나가서 돌아올 때까지.
아주 짧은 외출이었다. 그야말로 최소한의 욕구 해소를 위한 수준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한살림에서 산 쭈쭈바를 먹었다. 소윤이는 오미자, 시윤이는 딸기를 골랐다. 한살림에서 고를 때 시윤이도 누나를 따라 오미자를 고르겠다고 했는데 왠지 시윤이가 싫어하는 맛일 거 같아서 만류했다. 누나의 쭈쭈바를 한 입 먹어본 시윤이가 얘기했다.
"아빠아. 나 이거 백개 천개 맛이가 있는데여엉?"
"그래? 오미자도 맛있어?"
"네에. 다음에늠 이거 다두데여엉"
"알았어. 아빠는 시윤이가 그거 싫어할 줄 알았지"
쭈쭈바를 다 먹은 소윤이는 내게 말했다.
"아빠. 아직도 메모리 게임하기 싫어여?"
"어, 소윤아. 아빠가 오늘은 좀 그렇네. 시윤이랑 둘이 하면 안 돼?"
"알았어여"
소윤이의 표정과 말투에서 서운함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는 졸리기까지 했다.
"시윤아. 누나랑 메모리 게임할래?"
"응"
둘이 잘 했는지 어쨌는지는 보지 못했다. 소파에 앉아서 졸았으니까. 곧 돌아온다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집에 돌아온 아내는 너무 할 게 없어서 심심했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그냥 일찍 돌아갈까도 생각했다고 했다.
"여보. 나 4인 가족에 중독됐나?"
다음 달 이맘때쯤이면 그런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만.
저녁은 김밥이었다. 집에서 직접 싸먹었다. 이것 또한 나의 출근 전 뭐라도 하겠다는 아내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냥 먹기만 하는 거면 몰라도 소윤이와 시윤이한테도 김밥 싸는 체험(?)을 시켜주려면 노동 강도가 적잖이 상승한다. 아내 혼자 있을 때는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이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나름 열심히 김밥을 말았지만 닫히지 않는 김밥이었다. 손에서 놓는 순간 자동으로 개방되는 탓에 김밥을 말자마자 한 손에 쥐고 우걱우걱 뜯어 먹었다. 그래도 엄청 잘 먹었다.
소윤이는 김밥을 먹으면서도 물어봤다.
"아빠. 이제 먹고 자여?"
"그래야지"
"지금 몇 시에여?"
"메모리 게임 물어보려고 그랬지?"
"어떻게 알았어여?"
"자, 그럼 이렇게 해. 김밥 먹고 일단 씻자. 그런 다음에 아빠가 너네한테 크레딧 제도를 적용할게. 소윤아, 잘 들어 봐. 너네한테 다섯 번의 기회가 있어. 메모리 게임을 다섯 판을 해도 되고 숨바꼭질을 다섯 판을 해도 되고. 아니면 메모리 게임 두 판, 숨바꼭질 세 판 이렇게 해도 되고. 아니면 메모리 게임 두 판, 숨바꼭질 두 판, 책 한 권씩 이렇게 해도 되고. 책은 각자 한 권씩 고를 수 있게 해 줄게. 대신 책은 한 번 이상은 못써. 아예 안 읽거나 한 번의 기회만 쓰거나. 이해돼?"
소윤이는 찰떡같이 알아먹었다. 선택도 내 예상대로였다.
"아빠. 그럼 저는 메모리 게임 두 판, 숨바꼭질 두 판, 책 한 권씩 이렇게 할래여"
"그래 좋아"
너무 졸렸다. 시윤이가 메모리 게임의 첫판을 까는 동안 누워서 기다리다 잠들었다. 게임을 하는 도중에도 계속 졸았다. 메모리 게임 두 판이 바둑 한 판만큼 길게 느껴졌다. 숨바꼭질은 뭐 순식간에 끝나니까 괜찮았고. 책은 양해를 구했다.
"소윤아. 너무 길지 않은 걸로 골라줘"
아내의 말마따나 어디 해외로 출장 가는 것도 아니고 고작 출근이지만 어쨌든 드디어(?) 입버릇처럼 얘기하던 진짜 마지막 '평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