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1(수)
방에서 나오는 시윤이의 표정에 꽤 짙은 웃음이 묻어 있었다. 일어나서 바로 일어난 게 아니라는 얘기다. 강아지 인형을 안고 웃고 있는 시윤이를 향해 팔을 벌리며 얘기했다.
"시윤아. 이리 와"
"시더여엉"
장난스럽게 도망갈 정도로 정신을 차린 뒤였다. 시윤이가 바로 나오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다. 시윤이의 엄지손가락이 축축했다.
"시윤아. 왜 바로 안 나왔어?"
"그양여엉"
"손가락 빨았지"
"네에"
아침(고구마, 달걀 등) 먹을 때도 옆에 와서 알짱거렸다. 강아지처럼. 고구마와 달걀을 조금씩 떼어서 주니까 헤벌쭉하면서 받아먹었고. 소윤이는 나가기 직전에 깨워서 그야말로 인사만 나누고 바로 헤어졌다.
아내와 아이들은 안타깝게도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오후에는 식탁에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는 애들 사진이 도착했다.
[오늘은 안 나가겠다고 했더니 불만 가득. 엄마만 편하면 그게 다냐며]
요즘 시윤이가 자주 하는 말이다. 아내의 카톡을 읽는데 시윤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엄마만 편하믄 그게 다에여엉'
하루 종일 소윤이와 시윤이를 돌보는 것도 바쁜데 거기에 집안일은 물론이고 요즘은 틈틈이 롬이 맞을 준비까지 하고 있어서 바쁠 거다. 오늘 나가지 못한 이유도 아마 무언가 바쁘게 할 일이 있어서 그랬을 거다. (나중에 집에 가서 들어 보니 롬이 옷을 빨았다고 했다)
퇴근하고 나서는 롬이 침대를 조립해야 했다. 소윤이는 롬이 침대 조립하는 걸 꼭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 모든 애들이 다 그런가. 소윤이는 이런 거 구경하고 간섭하고 그러는 걸 참 좋아한다. 아내는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미리 말해놨다. 침대 조립하는 걸 구경하는 대신 아빠랑 놀지는 못한다고.
막 회사에서 나왔을 때 시윤이가 소파에 앉아 졸고 있는데 어떻게 하냐며 아내한테 전화가 왔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정신을 좀 차렸는지 말똥말똥했다. 물론 저녁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아서 보니 눈에는 졸음이 그득했다. 시윤이는 물론이고 소윤이도 많이 피곤했는지 둘 다 밥 먹는데 속도를 붙이지 못했다.
애들이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때쯤 분해되어 있는 롬이 침대를 거실에 가지고 나왔다. 역시 이런 류의 작업을 할 때마다 느끼지만 내가 생각한 대로 진행되는 게 없다. 또 하나 늘 느끼는 건 난 정말 이런 일에 소질도 흥미도 없고. 아내가 배만 안 불렀으면 아내가 더 즐겁게, 잘, 척척했을 거다. 못 하는 일을 붙잡고 있다 보니 롬이고 뭐고 약간 신경이 곤두섰는데 나도 모르게 소윤이한테 아주 살짝 차갑게 (혹은 소윤이가 느끼기에는 무섭게, 섭섭하게) 얘기를 했나 보다. 소윤이의 얼굴에 굴곡이 사라지고 탱탱하게 펴지는 듯한, 특유의 표정이 보였다. 순간 아차 싶었다.
"소윤아. 이리 와봐"
소윤이는 나에게 몇 걸음을 오는 동안 이미 눈물을 흘렸다. 너무 미안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왔다지만 어쨌든 하루 종일 못 보다가 겨우 한두 시간 같이 있는 건데 그 시간마저 눈물을 흘리게 하다니.
"소윤아. 미안. 미안. 아빠가 그렇게 말해서 속상했어?"
"(끄덕끄덕)"
"미안해. 진짜 미안해. 울지마. 그럼 아빠 속상해.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끄덕끄덕)"
시윤이는 옆에서
"아빠아. 우디가 할 꺼도 남겨둘거져엉?"
이 얘기를 계속했다. 아내가 시윤이를 씻기러 간 사이에 소윤이가 나를 도와서 뭔가를 들고 있었다. 소윤이는 아빠의 과업에 일조했다는 자부심에 아내와 시윤이에게 자랑했고 시윤이는 자기도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며 일을 달라고 했다.
"그래. 이따가 시윤이도 아빠 도와줘. 알았지?"
그 얘기를 들은 다음부터, 꺼진 줄 알았는데 잊힐만하면 혼자 소리를 내는 뽀로로 팬처럼 저 얘기를 반복했다.
"그래. 알았으니까 그만 좀 얘기해"
라고 하마터면 말할뻔했다. 소윤이한테 기껏 그렇게 미안하다고 해놓고 아들한테도 똑같은 과오를 범하면 안 되니까 꾸욱 참았다. 읍.
롬이의 침대는 완성됐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뭘 아는지 모르는지 집에 뭔가 새로운 게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이 났다.
롬이 침대를 보니까 벌써부터 울음소리가 들리는 거 같고, 이미 피곤한 거 같다. 롬이야. 기대는 기대고, 현실은 현실이고, 걱정은 걱정이고, 사랑은 사랑이고. 다 니가 끌고 오는 새로운 일상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