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23(화)
알람을 7시에 맞췄다. 오전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자전거는 타고 갈 수가 없었고 시안이네(홈스쿨링 동지) 가야 하는 아내에게 차를 넘겨줘야 했다. 난? 버스와 지하철로. 차로 가면 30분 자전거로 가도 1시간 10분 인데 대중교통은 최소 1시간 30분 이상이 예상됐다. 너무나도 비효율적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또 한겨울에는 아무래도 자전거 출퇴근이 무리일 것 같고 어차피 대중교통을 타야 했다. 일단 해보기로 했다. 할 짓인지 못할 짓인지.
'그래. 내가 언제부터 차 타고 다녔다고'
대학교도 1시간 30분씩 걸리고 회사 다닐 때도 출근길 그 지옥과도 같은 버스와 지하철을 1시간 30분 넘게 탔는데 이거라고 못할 게 어딨나.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삼송역까지 가서 거기서 대화역까지 지하철로. 좋았다. 사람 구경도 하고 지하철에서는 짧게나마 책도 읽고. 대화역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사무실까지 가는 건데. 우왁. 이게 제일 고역이었다. 버스를 한 40분 타는 건데 광역버스라 창문도 작아서 바깥 구경도 못하고 공기는 탁하고 덥고 멀미 때문에 책도 못 읽고. 다음에 또 이용할 때는 뭔가 방편이 필요할 것 같다. 40분의 시간을 채워줄 뭔가가 필요하다.
약 1시간 40분쯤 걸렸다. 힘들긴 했지만 할만했다. 다만 억울한 게 있었다면 정작 출퇴근 시간에는 비가 거의 안 왔고 낮에도 아주 잠깐 쏟아지고 말았다는 거다. 그냥 자전거 타고 왔어도 될 뻔했다. 자전거랑 비교해서 시간이 덜 걸리는 것도 아니고 딱히 덜 힘든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버스 타는 게 더 진을 빼놓았다. 그래도 나의 희생 (이 정도면 희생이라고 해도 되지 않나?) 덕분에 아내는 조금이나마 편하게 시안이네 집을 다녀올 수 있었다. 더군다나 딱 아내가 집에서 나갈 때 비가 막 쏟아졌다는 소리를 들으니 그나마 보람이 느껴졌다.
아내는 10시 30분쯤 가서 2시 30분쯤 돌아왔다. 홈스쿨링 예비모임이라고 해야 하나. 같이 기도도 하고 얘기도 나누고 애들은 놀고. 적응기간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시윤이는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내를 찾지도 않고 혼자 잘 놀았고 소윤이도 시안이랑 조금씩 적응해가며 잘 놀았다고 했다.
퇴근할 때는 일부러 맨 앞자리에 앉았다. 앞 유리창으로 바깥이라도 보면서 가면 조금 덜 심심하지 않을까 싶어서. 부질없는 짓이었다. 대화역에 도착할 때까지 조느라 정신이 없었다. 퇴근도 약 1시간 40분. 집에 딱 들어서니 피로감이 몰려왔다. 어째 일보다 출퇴근이 더 고된 느낌이랄까. 소윤이는 하람이네서 TV 본다고 505호에 가서 없었고 아내랑 시윤이만 있었다. 아내랑 통화할 때마다 용케 나인 걸 알고 옆에서
"압빠, 압빠아아아"
하며 나를 불러대는 목소리를 들으니 유난히 보고 싶었는데 마침 소윤이도 없다니. 짧은 시간이었지만 소윤이 눈치 안 보고 시윤이랑 놀았다. 아내가 소윤이를 데리러 나가자 시윤이는 또 대성통곡을 했다. 시윤이의 특이점이자 장점 중 하나는 그렇게 울다가도 금방 현실에 순응하고 또 다른 제1양육자에게 간다는 거다.
"시윤아. 노래 불러줄까?"
"으"
"곰 세 마리 불러줄까?"
"으"
가슴팍에 안겨 있는 시윤이의 등을 두드리며 곰 세 마리, 올챙이송, 찬양을 불러줬다. 한 서너 곡 불러줬을 때 시윤이를 보니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막 잠들려고 하고 있었다.
"시윤아. 일어나. 엄마랑 누나 금방 온대"
"읏나, 음마"
"응. 금방 온대"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앙"
졸린데 못 자게 하니까 짜증도 나고 엄마랑 누나가 온다면서 당장 오지 않으니 그것도 짜증 나고. 계속 자려고 하는 걸 온갖 호들갑을 떨며 겨우 깨웠다. 금방 아내랑 소윤이가 돌아왔다.
'시윤아 잘 가. 이제 아빠는 너네 누나한테 가야 해'
그걸 아는지 시윤이는 또 끈적끈적한 엄마 껌딱지가 되었다. 아내가 애들 밥을 먹이면서 나에게 얘기했다.
"여보는 얼른 운동 갔다 와"
"지금? 애들 재우고 가도 돼"
문득 아내도 헬스장에 다니는 헬스인이라는 사실이 떠올라서 다시 물었다.
"여보도 헬스장 가려면 내가 빨리 갔다 오는 게 낫나?"
"난 오늘은 안 가려고"
"왜?"
"내일 목장 모임 있어서. 집도 치워야 돼"
"뭐 그래 봐야 1시간인데. 갔다 와"
"그럴까"
잘 준비를 모두 끝내고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내가 소윤이에게 말했다.
"아빠는 이제 운동 가시라고 하자?"
"엄마. 오늘 주일이야?"
"아니 오늘 화요일이지"
"근데 아빠 왜 운동 가?"
"원래 헬스는 매일 가시잖아"
"아빠랑 자고 싶은데"
"어제 아빠랑 잤잖아. 오늘은 운동 가시라고 하자"
"아빠랑 자고 싶은데"
결국 딸의 애교를 이기지 못하고 나도 함께 방에 들어갔다. 막상 방에 들어가서 책 읽어주고 났더니
"아빠. 엄마가 내 옆에 누웠으면 좋겠어"
"뭐야. 언제는 아빠랑 잔다며"
"아빠는 침대에 누우면 되잖아요"
"오늘은 일단 누웠으니까 그냥 자자"
"그래도 엄마가 내 옆에 눕는 게 좋은데"
투정을 부리긴 했지만 너무 졸린 상태라 오래 끌지는 못하고 금방 잠들었다. 둘을 재우고 아내와 함께 거실로 나왔다
"여보. 난 오늘 그냥 헬스장 안 갈래"
"그럴래? 알았어. 나 갔다 올게"
하긴 집이 꽤 어질러져 있고 설거지도 잔뜩 쌓여 있기는 했다. 운동 끝나고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올 때 밤식빵 하나 사 와. 내일 목장 모임 할 때 먹게"
"알았어. 여보는 뭐했어?"
"난 라면 끓여 먹었어"
주일에 내가 끓여줬던 [남이 끓여주고, 야채 잔뜩 넣은, 우아하게 먹을 수 있는] 라면이 또 생각난다고 운동가기 전에 말했었다. 남이 끓여 주는 걸 포기하더라도 홀로 고요하게 먹는 라면도 언제나 맛있다.
집에 돌아갔는데 집은 그대로였다. 아내는 [뷰티 인사이드](저번에 뷰티풀 인사이드라고 썼다고 아내가 엄청 비웃었다) 할 시간이라면서 아이패드로 보다가 자꾸 끊기니까 방에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방에서는 아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뷰티 인사이드가 코믹한 부분이 꽤 많은가 보다.
집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4년 차 육아인이고 꽤 많은 경험과 사례가 축적되어 있다. 아니나 다를까 드라마 시청 후 1시간쯤 지났을 때 방에서 시윤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호들갑을 떨며 들어갔지만 난 태연했다. 내가 그린 그림하고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십여분이 지나고 아내가 나왔다.
"하아. 소윤이 쉬 했네"
"그래?"
"아까 똥 쌀 때 쉬 안 했나"
"그러게"
아내는 새로 깔아줄 이불과 갈아 입혀줄 옷을 가지고 방에 들어갔다. 젖은 이불과 갈아 입힌 옷을 들고 나오면서 말했다.
"시윤이 다시 깼네"
난 이때 직감했다.
'아. 끝났구나'
다시 시윤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간 아내는 내 예상대로 침대 위에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최악의 상태는 아니지만 보고 있으면 심란해질 정도의 어지러운 거실과 설거지가 고이 쌓인 싱크대를 보니 부아가 치밀었다. 서현진도 이민기도 꼴 보기 싫었다. 뷰티 인사이드고 나발이고 우리 집 인사이드나 좀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내가 아무리 입으로 머리로 집안일은 공동의 것이라고 떠들어대도 현실에서는 거의 아내의 일처럼 되어있고 실제로 95%, 아니 거의 100%에 가깝게 아내가 한다. 희생과 헌신이 일상인 아내를 두고 고작 이런 일로 열 내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아내가 하겠다고 암묵적인 계약이 성립된 상태에서 나는 그 일에 대한 마음의 준비나 대책을 전혀 세우지 않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홀연히 방으로 사라진 아내와 그 유산으로 남은 설거지와 우리 집 인사이드는 엄청난 불쾌감을 유발한다. 평소에는 그냥 두고 자는 날도 많지만 하필 내일 아침 일찍부터 우리 집에서 목장 모임이 있다고 하니 그럴 수도 없고.
남녀평등
여성인권
남성우월주의
같은 단어를 계속 되뇌며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원래 나의 일이기도 하다며 자기 세뇌 및 계몽을 했다. 작은방에 갔더니 컴퓨터 앞에 아내가 먹다 남은 커피와 빵, 그리고 스콘이 있었다. 뷰티 인사이드 보다 말고 거실로 뛰쳐나와서
"여보. 헐 대박. 아까 낮에 사놓은 스콘이 가방에 있다는 게 생각났어"
라며 스콘을 챙겨 신나가지고 컴퓨터 앞에 앉은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스콘 말고 빵도 있었는지 먹다 남은 빵이 조금 있었고 스콘은 그대로였다. 아내에게 복수하는 마음으로 스콘을 3분의 2쯤 먹어버렸다. 거실에 널브러진 잡동사니들을 보통 뽀로로 카트에 쑤셔 박곤 하는데 카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 데나 막 쑤셔 박았다. 설거지도 하고 밥솥에 쌀도 씻어 놨다.
아. 빨리 여행 가고 싶다. 아내가 11월에 보내준다고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