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ve & Take

18.10.24(수)

by 어깨아빠

"여보, 어제 집도 치우고 설거지도 했어?"

"응"

"고마워 여보"


아직 잠이 깨지 않아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나에게 아내는 격렬하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우쭐했지만 아무것도 아닌 양 무심하게 반응했다. 잠시나마 점유했던 우쭐거리는 마음은 금세 사라졌다. 아내가 보낸 '잔짜 깨끗해진 집' 사진과 덧붙인 아내의 말 덕분에.


"여보. 내가 화장실 청소도 했다?"


대충 쑤셔 박고 깨끗해진 척하는 나와 다르게 아내는 구석구석, 진짜 깨끗한 집을 위한 청소를 시작했고 결과는 놀라웠다. 게다가 아내가 나를 최대한 배려하며 조심스레, 지속적으로 요구한 화장실 청소까지도 결국 아내가 직접 했다고 하니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아내는 청소, 정리 쪽에 남다른 은사와 재능이 있다. (라고 말하면 수많은 여성들이 그 딴 dog소리가 어딨냐, 청소에 재능이 어딨냐며 항의할지 모르지만. 우리 아내처럼 진짜 약간 청소하며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긴 있다.) 평소에는 한없이 늘어지는 것 같은데 딱 마음먹으면 거의 청소업체 수준이다. 뒤돌아서면 어지르고 있는 딸,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고 내팽개치는 아들, 도무지 정리라는 걸 배우지 못했는가 싶은 34짤 아들 같은 남편이 사는 집을 이토록 깔끔하게 유지할 수 있는 건 전적으로 아내의 역량이요 공로다. 짝짝짝. 여보 고마워. 고작 설거지 조금 하고 눈에 보이는 장난감 좀 치웠다고 껄떡거리다가는 본전도 못 찾는다는 걸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본다.


퇴근하고 직접 보니 더더욱 놀라웠다. 귓가에서는 따라라라라 따라라라 따라 신동엽의 러브하우스 BGM이 들리고 눈길이 닿는 곳마다 번쩍번쩍 광택이 나는 듯했다. 재차 아내에게 감탄을 내뱉었다. 진심과 의무감이 섞인 감탄이다. 진짜 감탄하기도 했지만 아무런 표현이 없으면 서운해할 아내를 위해 입 밖으로 꺼내 표현했다.


"여보. 진짜 대박이다"


수요일. 야간 축구가 있는 날이다. 아내는 애들 저녁 먹일 때부터 자꾸 날더러 시간 맞춰 가라고 독촉했다.


"여보. 애들 밥만 먹이고 가"

"아니야. 애들 재우고 가도 돼"

"괜찮아. 기왕 가는 거 시간 맞춰서 가"


어? 잠깐. 날개를 못 찾겠는데? 우리 아내는 천사인 게 분명한데 등에 날개가 없는데?


하하하하하하하하

(민망하니 웃음으로)


결국 아내의 뜻(?)에 따라 아내가 애들을 데리고 방에 들어가고 난 축구장으로 출발했다.


"소윤아. 엄마 말 잘 듣고 장난치지 말고 바로 자"

"아빠 내일 만나여"


"시윤이도 빠이빠이"

"압빠아아 읏냥(손 흔들흔들)"


경험해 본 사람은 안다. 내 자식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그 감격을.


3시간 동안 열심히 공을 차고 났더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어. 딱히 없어"

"커피 사다줄까?"

"아니. 괜찮아"

"왜. 사줄게"

"지금 문 연곳이 있나"

"투썸? 이디야?"


아내는 이디야의 바닐라 라떼(사이즈업)를 요청했다. 이디야에 들러 바닐라 라떼를 샀다. 집에 들어갔더니 아내는 주방에서 뭔가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정확히 뭘 하는지 몰랐다. 아내랑 얘기하다 보니 내일 시안이네(홈스쿨링 동지) 가야 하고 애들 점심으로 주먹밥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외의 여러 가지 주제로 수다를 떨고 있는데(시간이 많이 흐르지는 않았다) 방 안에서 아내를 호출하는 괴성이 들렸다. 아내가 급히 들어갔고 잠시 후 소윤이랑 함께 나왔다.


"소윤아. 엄마 주먹밥 만들어야 되는데"

"아 싫어. 나랑 자"


아내는 소윤이 설득에 실패했고 소윤이와 함께 다시 방에 들어갔다.


"다시 나올 거야"


두세 모금 마시고 남은 커피는 다시 주인을 만나지 못한 채 밤새 차갑게 식어갔다. 싱크대 위의 채 썰리다가 만 호박은 날 부르고 있었다.


[어서 와서 날 마저 썰어줘]


그 옆의 당근도, 양파도. 많이 귀찮기도 하고 축구를 열심히 한 탓에 온몸이 뻐근하기도 했지만 해 놓지 않으면 내일 아침에 아내가 너무 정신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 밤에 그걸 다 해놓으려고 했을 거고. 썰다 만 호박부터 시작해서 당근, 양파까지 차례대로 잘게 채 썰었다. 한편에 물에 담겨 있는 버섯도 보였다. 확신은 없었지만 왠지 버섯도 재료일 것 같았다. 버섯도 썰었다. 다 썬 뒤에는 팬에 기름을 두르고 볶았다. 당근 숨 죽이느라 꽤 한참을 볶았는데도 아직 당근이 좀 딱딱한 감이 있었다.


'이 정도면 됐다. 남은 건 아내의 몫이야'


힘들긴 했어도 해놓고 나니 뿌듯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한껏 허망함을 느끼다가 불현듯 어제 썰다만 야채들이 떠올라 부리나케 거실로 나왔는데 볶아진 야채를 보면. 좋아하겠지?


역시 부부의 육아는 끊임없는 상쇄의 연속이다. 하나 줬다고 뻐길 일이 아니다. 받았으면 주게 되고 줬으면 받게 되고. 죽을 때까지.


그나저나 식탁 위를 홀연히 지키는 바닐라 라떼가 참으로 처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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