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야간 근무

18.10.25(목)

by 어깨아빠

도저히 다리가 쑤셔서 자전거를 타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차는 아내가 반드시 써야 하는 날이니 가지고 갈 수 없고.


"오늘은 버스 타고 가야겠다"


아내는 새벽같이 일어나 거실에 나왔고 역시 나의 예상대로 깊은 허망함 속에 볶아진 야채를 발견하고 큰 힘을 얻었다고 했다. 차갑게 식은 바닐라라떼도 홀짝홀짝 마셨고. 오전부터 시안이네 가서 예배드리고 난 뒤 아이러브맘 카페 (지자체 별로 운영하는 도서관, 장난감 도서관 등이 포함된 시설)에 간다고 했다. 장난감 도서관은 장난감을 대여할 수도 있고 사전에 예약하면 무료로 놀 수도 있다. 대화동에 살 때는 자주 갔었다. 아내 말로는 일반 키즈카페보다 훨씬 깨끗하고 구비된 장난감이나 교구들도 더 질이 좋다고 했다.


소윤이랑 시안이는 점점 친구로서의 연대가 끈끈해지고 있고 시윤이랑 다율이는 아직은 남남 같은 사이다. 다만 소윤이가 시안이한테도 엄청 가르치려고 드나 보다.


"시안아. 그건 이렇게 하는 거야"

"시안아. 이렇게 해야지"


아내랑 내가 잔소리를 너무 많이 하나.


오후 2-3시쯤 헤어진 아내는 장모님을 만나러 파주에 간다고 했다. 대화동에 있는 [맑음케이크]라는 곳인데 아내와 내가 잔뜩 빠져 있는 곳이다. (여기 마카롱 진짜 맛있다.) 장모님 만나고 나서 사무실로 데리러 오라고 했다. 시윤이는 파주로 가는 동안 잠들었고 강철체력 소윤이는 역시 버텼다. 아내와 아이들은 퇴근 시간에 맞춰 사무실로 왔다.


"여보. 소윤이 깨울래? 운전할래?"

"응. 운전"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아내는 수다도 떨고 노래도 부르면서 소윤이가 잠들지 않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무사히 집에 도착해서 저녁도 먹이고 씻겨서 재우러 들어갔다. 소윤이는 금방 잠들었는데 시윤이가 심상치 않았다. 재우러 들어가기 전에 아내에게 말했다.


"오늘은 여보 먼저 운동 갔다 와"


난 당연히 금방 재우고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일단 내가 먼저 거실에 나왔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내는 나오지 않았고 카톡이 하나 왔다.


[여보 그냥 운동 가. 안 잠]


그러고 나서 또 1시간 뒤


[여보?]

[안 잠]

[헐랭. 운동하고 와 나랑 교대하자]

[참아야 하느니라]

[그냥 데리고 나와. 그리고 여보는 운동 가]


그간의 경험상 엄마가 나가는 걸 보면 좀 울더라도 금방 포기하고 나한테 와서 안겼으니 오늘도 비슷할 것 같았다. 잠시 후 아내와 시윤이가 함께 등장했다. 상반된 표정으로. 시윤이는 뭐가 좋다고 빙구같이 헤벌쭉 헤벌쭉 웃으면서. 아내는 혼과 영, 육이 모두 이탈한 듯한 표정으로.


"여보. 얼른 가"


아내가 옷을 갈아입자 시윤이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자꾸 엄마 옆에 알짱거렸다. 아내나 나나 '많이 울까?' 를 걱정하고 있었다. 아내가 현관에서 신발을 신자 시윤이가 다급하게 뛰어가서는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음마. 읏냥"


아내도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이게 강시윤의 매력이지. 아내는 집 탈출. 시윤이는 방 탈출. (나의) 동생이 급히 부탁한 일이 있어서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하는데 시윤이는 울거나 보채지도 않고 옆에서 혼자 잘 놀았다.


"시윤아 미안. 아빠 일이 좀 있어서 잠깐만 기다려줘"

"으"


혼자 인형과 자동차를 가지고 놀면서 깔깔거렸다. 눈웃음도 살살 치고. 혼자 두는 게 미안해서 (생각해보면 미안할 일이 아닌데 말이다. 지가 우리한테 미안해야지) 한 번씩 안아준다고 하면 또 쭐래쭐래 와서 안기고. 차라리 진작에 이렇게 놀 걸 그랬나 보다. 하긴 아주 늦은 오후에 낮잠을 잔 걸 잊고 있었다. 괜히 아내의 소중한 1시간 30분만 날아가고. 일을 다 끝내고 시윤이를 불렀다.


"시윤아. 아빠 다 끝났어. 이제 자러 들어가자"

"으"


그러던니 나한테 와서 안겼다. 방에 들어가서 눕혔더니 바로, 진짜 말 그대로 바로. 눕히고 1분도 되지 않아서 잠들었다. 뭐지 너란 녀석. 열심히 운동도 하고 잠깐이나마 코에 바람도 넣었으니 시윤이에게 시달린 아내의 기분도 좀 나아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커다란 봉투에 잔뜩 장을 봐왔다. 그리고 또 한 손에는 떡볶이와 튀김이 들려 있었고.


"여보. 다이어트에 방해될까 봐 고민하다 그냥 사 왔어"


아. 진짜. 막 치킨 한 마리씩 먹으면 살이 쪽쪽 빠지고 떡볶이 국물까지 싹싹 핥으면 체지방 분해되고 바삭바삭한 튀김옷 먹을 때마다 근육 생기고.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날 낳아주신 엄마에게 모든 걸 감사하지만 딱 한 가지, 입 짧은 아이로 낳아주지 않은 건 원망스럽다. 입이 길기가 만리장성이 따로 없네.


그래도 야식과 함께하는 아내와의 수다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 내 몸은 지방을 포기할 수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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