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3(목)
서윤이는 오늘 BCG 주사를 맞으러 가야 했다. 아내가 이모님과 함께 서윤이랑 다녀오기로 했고 형님(아내 오빠)이 소윤이와 시윤이를 봐주기로 했다. 형님은 점심시간쯤 와서 거의 다섯 시가 다 될 때까지 있다가 갔다고 했다. 덕분에 아내와 서윤이도 병원에 잘 다녀왔고 소윤이와 시윤이도 오랜만에 밝은 낮에 나가서 놀다 왔다.
아내는 간만에 운전도 하고 바깥공기도 쐬었다. 갓난쟁이 주사 맞으러 가는 길이라 얼마나 외출의 기쁨을 누렸는지는 모르겠다. 병원에서 돌아오다가 도우미 이모님 커피를 사러 잠시 카페에 들렀을 때 아내는 나에게 카톡을 했다.
[커피향 맡는 것도 좋다]
하필 로스팅 제대로 하는 커피향 물씬 풍기는 카페. 죽었다 깨어나도 그럴 일은 없지만 만약 내가 임신을 해야 했으면 커피 참는 게 제일 괴로웠을 거다. 임신과 출산에 수반되는 여러 고난(?)이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는 게 어렵지만 커피를 참아야 하는 심정만큼은 십분 이해가 됐다.
아내는 오늘도 내가 퇴근하기 전에 애들 저녁을 다 먹였다. 심지어 오늘은 어제보다 더 빨랐다.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낮잠을 안 자서 이른 취침이 가능하니 아예 빨리 끝내고 퇴근하라는 속 깊은 배려였다.
배려가 너무 깊어서 그런가 아내의 얼굴이 유난히 피곤해 보였다. (다른 날도 피곤해 보이지만 오늘은 그중 더했다. 다른 날이 그냥 커피라면 오늘은 티옾...)
"여보. 엄청 피곤해 보이네"
"오늘 낮잠을 못 자서 그런가 봐"
"아, 그렇구나"
다른 날은 온전하게 보장받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잠깐씩이나마 누워서 눈도 붙이고 그랬는데 오늘은 병원도 다녀오고 미리 저녁도 먹이느라 그럴 틈이 없었던 거다.
"여보. 그럼 오늘 일찍 잘래?"
"어떻게 일찍 자"
"애들 재울 때 아예 여보가 들어가서 재우면서 자면 되잖아"
"서윤이가 언제 깰지 모르잖아"
"아, 맞다. 서윤이"
서윤이는 방에서 자고 있었다. 존재를 잊었다. 퇴근했을 때 방에서 자고 있으면 가끔 까먹는다. 나에게 막내딸이 있다는걸. 서윤이가 언제 깨서 배고프다고 울지 모르니 눕지 못한다고 얘기하는 아내의 얼굴이 그새 더 졸려졌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낮에 삼촌이랑 실컷 논 것과는 별개로 아빠하고도 놀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시윤이가. 씻고 책 읽고 자야 한다고 했더니 울먹거리면서
"안 대져엉. 그애도 또금은 노다야져엉"
떼쓰는 게 아니고 오히려 울음을 삼키면서 말했다. 하긴 삼촌은 삼촌이고 아빠는 아빠니까. 아내의 노력(조기 종료)을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수도 없고 낮잠 안 잔 애들의 수면 시간도 확보해야 하니 시윤이의 요구를 수용하기는 어려웠다. 대신 5분만 놀기로 했다.
"소윤아. 5분 동안 뭐 하고 놀까?"
"아빠. 뭐 할까여"
물어보면서도 참 고르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형식의 시간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뇌 속에 '아주 잠깐이지만 놀긴 놀았다'라는 흔적을 남기기 위한.
"아빠아. 우디 우디 둠바꼭딜 하까여엉"
시윤이의 제안으로 숨바꼭질 세 판을 하고 책을 읽기로 했다. 숨바꼭질 세 판은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너무 금방이었다. 미안하리만치.
아내는 애들 얼른 재우고 나와서 나갔다 오라고 했다. 그냥 갑자기. 아마 아내는 진작에 그걸 생각하고 그렇게 서둘렀을 거다. 아내가 그리도 부지런을 떨었지만 모든 걸 끝낸(서윤이는 끝나는 게 없으니까 논외로 하고) 시간이 그렇게 빠르지는 않았다. 소윤이는 낮잠을 안 잤지만 금방 잠들지 않았다. 결국 내가 먼저 나왔는데 소윤이는 또 눈물을 흘렸다.
아내는 계속 나갔다 오라고 나를 채근했다. 서윤이는 그때까지 자고 있었다(퇴근해서 서윤이 얼굴을 못 봤다). 아내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뜬 게 아니었다. 서윤이를 재울 때 자주 활용하는 기술인 '미간 쓸어내리기'를 하면 아내는 바로 잠들 거 같았다. 내가 나가면 서윤이가 곧 깰 테고 그럼 아내는 수유를 할 거고 서윤이가 바로 다시 잠들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으면 아내는 너무 괴로울 거다. 바깥이 엄청 고픈 것도 아니라 그냥 집에 있으려고 했는데 아내는 계속 나가라며 떠밀었다. 무슨 마음인지는 안다. 반대로 나도 아내를 보며 그런 마음일 때가 있으니까. 아내를 위한 일은 아니지만 아내의 마음을 위해 집에서 나왔다. 그렇다고 싫은데 억지로 나온 건 아니고. 겪어본 사람은 안다. 이게 무슨 마음인지
(다른 날도 항상 그랬지만) 오늘은 유독 얼굴도 못 본 서윤이보다 세상의 모든 피곤을 짊어진 듯했던 아내가 더 보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