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게 없는 거 같아도

20.04.25(토)

by 어깨아빠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침부터 오늘 언제 나갈 건지를 물어봤다. 소윤이가 요새 종이접기에 흥미를 붙이길래 종이접기 책을 사주겠다고 했고 그게 오늘이 된 거다. 그게 아니었더라도 아내를 위해 애들을 데리고 나가긴 했겠지만.


잠깐 나갔다 오면 안 되고 길게, 오후를 다 쓰고 와야 했는데(아내를 위해) 소윤이의 종이접기 책을 사고 나면 할 게 없었다. 뭐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건 없었다. 일단 나가기로 했다. 뭐라도 하면 되겠지라는 심정으로. 혹시 모르니 킥보드도 챙겼다.


아파트 지상 주차장에서 하람이(505호 사모님 딸)네를 만났다. 소윤이와 하람이는 서로를 무척 반가워했다. 소윤이는 나에게 하람이는 본인의 엄마, 아빠에게 조금만 같이 놀아도 되냐고 물었다. 주차장에서 10여 분 정도 놀았다. 넓지도 않은 곳에서 뛰어다니며 잘 놀았다. 헤어지고 각자의 길을 가려고 하는데 소윤이가 말했다.


"아빠. 쉬 마려워여"

"진짜? 그럼 집에 다시 들어갔다 와야겠다"


소윤이와 시윤이를 데리고 다시 집에 가서 화장실만 들렀다가 바로 나왔다. 딱 시윤이 낮잠 시간이라 가는 동안 차에서 자라고 얘기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아빠아. 어짜삐 저 돌려여엉"


대답은 그렇게 해놓고 막상 차에 타니 안 자겠다고 했다. 재워야 했다. 소윤이의 종이접기 책을 사는 것 말고 오늘 정해진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저녁에 치킨을 먹어야 했다. 월요일이 시윤이 생일이고 하루 전인 내일 양쪽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아내가 시윤이한테 뭐가 먹고 싶냐고 했더니 처음에 치킨을 얘기했다고 했다. 생일 기념 공식 식사에 치킨은 좀 그러니까 그날은 다른 거 먹고 대신 오늘 치킨을 먹기로 했던 거다. 치킨을 즐겁게 먹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워야 했다. 자꾸 안 잔다고 하길래 그럼 집으로 돌아가서 재울 거라고 했더니 그제야 눈을 감았다.


서점은 집 근처 쇼핑몰에 있었다. 너무 가까웠다. 시윤이가 충분히 자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시윤이를 좀 더 재우기로 했다. 심심할 소윤이를 옆자리로 불렀다. 소윤이에게 의자가 뒤로 엄청 많이 젖혀진다는 걸 알려주면서 내 의자도 뒤로 젖혔다. 잠깐 시늉만 하려고 누웠는데 잠이 쏟아졌다. 소윤이를 조수석에 앉혀 놓고 꾸벅꾸벅 아니 누워서 졸았다. 잠결에 옆에서 소윤이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몸을 꼬는 소리가 들렸다.


한 30분 지나고 나서 시윤이를 깨웠다. 잠깐이었지만 달콤하게 잤는지 시윤이는 제법 상쾌해 보였다. 서점에 막 들어갔는데 시윤이가 물었다.


"아빠아. 나도 머하나 골라도 대여엉?"


살짝 놀랐다. 안 그래도 소윤이를 위한 책만 사면 시윤이가 좀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다. 시윤이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고 복잡한 사유가 가능해졌다. '모르겠지'하고 넘어가면 안 된다는 걸 새삼 느꼈다. 시윤이에게도 스티커를 하나 고르라고 했다. 시윤이는 기차가 잔뜩 그려진 걸 하나 골랐다. 그래도 아직 그 정도에 충분히 만족하는 걸 보면 아직 한참 어리고.


먹을 시간과 장소가 애매해서 점심을 건너 뛰었다. 밥은 아니더라도 간단히 허기를 채울만한 걸 먹기는 해야 했다. 앤티앤스 프레즐을 사서 나눠 먹였다. 나도 조금 먹고.


"아빠. 벌써 다 먹었다구여? 아직 배고픈데"

"아빠앙. 또 두데여엉"


아무리 허기를 달래는 목적이라지만 그러기에도 너무 적었나 보다. 옆에 있는 분식 가게에서 꼬마김밥 6개를 샀다. 그걸 먹였더니 그나마 배고픔이 사라진 듯했다. 다른 층에 있는 마트에도 잠시 들렀다. 꼭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정말 책만 사고 나가면 너무 아쉬우니까. 거기서는 내 세차 타월과 애들 색종이를 샀다.


그게 끝이었다. 뭐 한 것도 없었는데 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 원래 세차도 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아서 세차는 하지 않고 바로 치킨집에 전화를 해 놓고 찾으러 갔다. 치킨 가게로 가는 동안 소윤이는 거의 잠들뻔했다. 거기에 똥까지 마렵다고 했다.


치킨 가게 화장실에 데리고 갔는데 하필 또 쪼그려 앉아서 싸야 하는 변기였다. 겁 많은 소윤이는 호들갑을 떨며 내 팔을 꼭 붙잡았다.


"아빠. 꽉 잡아여. 넘어질 거 같아여. 아빠. 꽉이여. 얼른"

"어 괜찮아. 아빠가 잡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빠. 빠질 거 같아여"

"어어어어어어. 소윤아. 고개 숙이면 안 돼. 머리카락 변기에 닿겠다"

"아빠 근데"

"아니아니아니. 머리 들어. 안 돼"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거 같지만 이런 일을 자잘하게 계속 한 거다. 그러니 시간이 빨리 갔고. '아, 먹은 게 없는데 왜 살이 찌지'라는 희대의 거짓말과 비슷한 거다. 기억에 남을 만큼 먹은 게 없었을 뿐 다 이유가 있는 것처럼. 그래도 오늘은 소윤이와 시윤이 모두 양호했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얼굴을 붉힐 일이 하나도 없었다. 기특하게도.


치킨을 찾아서 집에 돌아갔더니 아내는 서윤이 옆에 누워 자고 있었다. 자다 깨서 졸려 보이긴 했지만 확실히 평일의 얼굴과는 달랐다. 치킨을 먹으며 시윤이 생일 얘기를 하는데 대뜸 시윤이가 물었다.


"엄마아. 내일 내일 생일쭈까 할 때 어 어 께익 먹으 때 그떄 나늠 뭐 사둘 거에여엉?"


아내와 나는 또 흠칫 놀랐다. 시윤이는 생각보다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아니믄 내가 도아하는 빠방 자동차?"


생일과 선물의 개념은 물론이고 누나의 생일 때도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아내가 주문한 시윤이의 선물은 아직 도착 전이었다. 내일도 도착하지 않을 거고.


"시윤아. 엄마가 산 건 아직 집에 도착 안 했어. 내일도 아마 안 올 거야. 그래도 나중에 오면 그때 줄게. 알았지?"


시윤이가 잠들었을 때 차에서 기다리면서 소윤이한테 슬쩍 물어봤다.


"소윤아. 요즘 힘든 거 없어?"

"힘든 거여? 왜여?"

"그냥. 서윤이가 태어나서 엄마랑 시간도 많이 못 보내고, 아빠랑 보내는 시간도 줄었잖아"

"없어여"

"진짜? 하나도?"

"하나도는 아닌데 그래도 힘들지는 않아여"


그 뒤로도 대화를 좀 더 시도했지만 소윤이의 반응은 비슷했다. 더군다나 오늘 졸려서 그랬는지 평소보다 훨씬 차분했다. 꼭 뭔가 삐진 게 있는 것처럼. 나중에 애들 재우고 아내랑 얘기하다 보니 아내도 오전에 잠깐 소윤이랑 대화를 나눴는데 비슷한 모습이었다고 했다. 아내가 느끼기에는 시윤이가 꼭 뭔가 지친 사람 같았다고 했다.


가슴이 아팠다. 아내의 분석이 정확한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상황만 놓고 보면 소윤이가 충분히 그렇게 느낄만했다. 어렸을 때(6살도 어리지만)는 첫째라는 이유만으로 누리는 게 많았는데 점점 첫째라 요구되는 책임과 규율이 많아져서 힘들었을까 싶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지금 서윤이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지극정성을 쏟고 사랑을 부어가며 길렀는데. 여전히 소윤이는 우리에게 그런 존재인데. 소윤이는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그건 너무 슬픈 일이었다. 방법은 딱 하나다. 더 많이, 진하게, 명확하게 사랑을 부어주면 된다. 치열하고 고된 일상과 현실을 뚫고 전해줘야 하니 쉽지 않은 거다.


오늘은 재우러 들어가서도 일부러 좀 오래 있다가 나왔다. 오늘만큼은 소윤이가 울며 잠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소윤이, 시윤이 모두 곤히 잠든 걸 확인하고 나왔다.


거실에 있던 아내는 디카페인 카누(인스턴트 커피)를 타서 마시겠다고 했다.


"여보. 그럴 거면 차라리 맛있는 디카페인 커피를 마셔"

"맛있는 게 어딨어"

"윌 커피?"

"윌? 여보가 사다 주게?"

"그러지 뭐"

"됐어"

"뭘 돼. 진짜야. 나도 한 잔 마시고"


아내는 출산 후 처음으로 돈 주고 커피를 사 마셨다. 아내는 첫 모금을 넘기고는 이렇게 얘기했다.


"여보. 서윤이 낳기 전에는 디카페인 되게 맛없었는데 오랜만에 먹으니까 이것도 엄청 맛있네?"


드디어 아내가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반가웠다. 아내가 조금씩 옛(?)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니까.


아내는 커피를 마시며 한마디 덧붙였다.


"여보. 혹시 오늘 서윤이가 안 자더라도 그건 커피 때문이 아니야. 그건 얘가 이미 많이 잤기 때문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