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30(목)
1차로 눈을 떴을 때 소윤이랑 눈이 마주쳤다. 소윤이는 깬 지 시간이 좀 지난 듯 눈이 똘망똘망했다. 가벼운 포옹과 뽀뽀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다시 눈을 감았다. 잠깐 감았다 떴는데 2시간이 지났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방에 없었다. 아내도 깼다. 서윤이는 아기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었고. 아주 오랜만에 아내 옆에 가서 누웠다. 서윤이 냄새가 났다. 아니 서윤이한테서 아내 향기가 나는 건가. 아니면 둘에게서 모유 향기가 나는 건가.
"소윤아, 시윤아. 아침 뭐 먹을래?"
"계안밥이여엉"
"소윤이는?"
"저는 계란 볶음밥"
계란밥은 밥에 계란 프라이를 얹어서 비벼 먹는 거고 계란 볶음밥은 파와 야채를 기름에 볶다가 계란도 넣고 밥도 넣어서 볶아 먹는 거고. 계란 볶음밥을 해줬다. 좀 짜게 됐지만 모두 맛있게 먹어줬다. 아침 먹고 나서 아내는 수유를 하고 서윤이와 함께 방에 들어갔다. 난 애들이랑 거실에서 자석 블록을 했다.
시윤이 머리가 너무 길어서 앞머리는 눈까지 내려오고 옆머리는 더벅더벅하고. 보는 내가 다 답답했다. 원래 다니는 미용실은 파주라 평일(출근하는 날)에는 가기가 힘들어서 쉬는 날 가야하는데 이번 연휴때는 문을 안 연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집 앞 미용실에서 자르기로 했다.
예약하고 간 거라 가자마자 바로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미용실에 가서 애들 머리 자르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던데 우리 애들은 그런 게 없다. 소윤이도 그랬고 시윤이도 그랬다. 아주 어릴 때부터. 시윤이는 오늘도 의젓하게 자기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는 걸 지켜봤다. 머리까지 감았다.
옆머리는 허옇게 밀고 가운데만 조금 살렸다. 시윤이랑 똑같은 머리를 하고 싶었지만 나이와 회사를 떠올리며 참았다. 아무튼 내 속이 다 시원했다. 취향이랄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윤이도 마음에 들어했다(이상하다고 울지 않았다. 그럼 마음에 든 거지 뭐).
바로 집에 들어가기에는 날씨가 너무 좋아서 아쉬웠지만 아내 점심을 차려주려면 얼른 들어가야 했다. 대신 점심 먹고 다시 나오기로 했다. 집에서 나올 때 방에서 자고 있던 아내는 깨서 거실에 있었고 서윤이는 없었다. 집에 밥이 없었다. 밥이야 쌀 씻어서 불 올리면 금방이었지만 귀찮았다. 아무거나 먹지 못하는(상관없지만 자제하고 있는) 아내가 있기 때문에 바깥 음식도 선뜻 떠오르지는 않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아내와 나는 수제 버거, 애들은 돈까스를 먹기로 했다. 내가 나가서 사왔다. 밥 하는 건 귀찮다면서 집 밖으로 나가는 수고를 감당하는 자가당착 무엇.
누군가 육아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집안일의 무한한 확장'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집밥으로 먹으면 설거지를 해야 하고 바깥 음식을 먹으면 분리 수거를 해야 하고. 설거지는 밑바탕일 뿐 그 위에 촘촘히 얹어지는 다른 집안일을 모두 쳐내려고 하면 몸이 두 개여도 모자라다는 말이 왜 나오는지 실감하게 된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직 이걸 모르겠지. 그럴 거다. 왜냐하면 나도 결혼하고 애 낳고 나서야 좀 알고 있으니까.
점심 먹고 바로 나가기로 약속했다. 난 약속을 지키고 싶었는데 내 몸은 아니었나 보다. 소파에 누운 서윤이를 본다는 핑계로 잠시 서윤이 옆에 팔을 받치고 누웠는데 눈이 감겼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빠. 눈 감지 마여"
"아빠아. 자지 마여어엉"
을 줄기차게 외쳐가며 나를 깨우려 했지만 내 본능이 더 강했다. 잠들었다. 아주 옅지만 달콤한 그런 잠이었다.
"아빠. 언제 나갈 거에여?"
소윤이가 날 흔들어 깨우며 물었다. 잠결에(정말 잠결이었다) 소윤이에게 짜증을 냈다.
"아, 아빠 너무 졸리다니까. 아빠가 나간다고 했잖아. 그만 좀 깨워. 이제 너희한테 미리 안 말해 줄 거야"
다 기억 나는 걸 보면 잠결이 아니었나. 아무튼 짧은 단잠을 털어내고 놀이터를 향해 나갔다. 마침 아내 친구네 부부가 잠시 온다고 했다. 놀이터에서 만나 놀기로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먼저 나가서 놀며 기다렸다. 날이 좋으니 놀이터에 사람이 많았다. 자전거랑 킥보드를 타며 기다리도록 유도했다. 잠시 후 아내 친구네도 왔다. 첫째가 소윤이보다 한 살 어린 딸인데 자다 깨서 기분이 별로였다. 둘째는 아들인데 두 살이라 같이 놀 군번이 아니었고. 아내 친구는 잠시 아내의 얼굴을 보러 집에 올라갔고 딸도 따라갔다. 같이 놀 걸 기대하며 기다린 소윤이는 조금 아쉬워했지만 삼촌(아내 친구 남편)이 워낙 재밌게 놀아줘서 오히려 많이 웃었다. 세상은 넓고 자상한 육아인은 많다.
아내 친구와 그녀의 딸이 다시 내려왔다. 기분이 회복된 아내 친구의 딸은 소윤이, 시윤이와 즐겁게 어울렸다. 다만 시간이 너무 짧았다. 한창 흥이 끓어 오르려고 할 때 헤어지게 됐다. 아쉬운 마음을 엄마에게 마구 쏟아냈다. 우리(나, 소윤, 시윤)가 먼저 자리를 떴다. 방문객을 남겨두고 떠나는 게 영 이상한 그림이었지만 그렇게 했다.
아내는 좀 쉬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다.
"여보. 내가 애들 데리고 나가는 게 나아? 아니면 애들이 있어도 나도 같이 있는 게 나아?"
"음, 상황에 따라 다르지"
서윤이가 자면 전자가 나을 거고 안 자면 후자가 나을 거고.
아내는 커피를 원했다. 아주 강력하게. 자주 가는 카페 중에 디카페인 커피를 파는 곳에 가서 커피를 사다 주기로 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저녁을 차려주고 난 카페로 갔다. 아내에게 맛있는, 그렇지만 카페인은 거의 없는 커피를 사다 줄 생각에 귀찮지도 않았다.
커피 사오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현관문을 열었더니 소윤이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빠. 서윤이가 엄청 토했어여"
아내는 서윤이의 토가 묻은 옷을 벗고 뒤처리 중이었다. 아내의 행동과 표정에서 얼마나 정신없었는지가 느껴졌다.
"애들은? 씻었나?"
"아니. 아직"
진척되지 않은 상황에 뭔가 짜증이 났다. 끝이 없는 육아와 집안일에도. 상황이 짜증났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상황에 대고 짜증을 낼 수는 없다. 그러니 그 상황에 함께하는 누군가를 향할 거고. '참고 있는 듯' 말하고 행동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겠지. 스스로 감정을 좀 다스리거나 알아서 사그라들 때까지 자가 격리를 하지 않으면 확진자가 되어서 분명 어딘가 옮기고 다닐 거다.
모든 과업을 마치고 소윤이와 시윤이를 데리고 방에 들어갔다.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소윤이가 훌쩍였다. 정말 너무나도 갑자기. 어떤 말이나 행동이 오간 것도 아닌데.
"소윤아. 왜 그래? 왜 울어?"
"아니에여"
"왜. 얘기해 봐. 아빠 진짜 몰라서 그래"
"아니. 아까 책 읽을 때 저는 아빠가 한 장을 빼 먹어서 얘기해 준 건데 아빠가 귀찮다는 듯이 읽어서 그게 속상했어여"
"아, 그랬어? 아니야. 아빠 귀찮아서 그런 게 아니고 좀 피곤해서 그런 거야. 미안해. 그게 속상했구나"
"네. 많이는 아니고 조금 그랬어여"
"미안해. 아빠가 피곤해서 그런 거야. 울지 말고"
이런 식으로 짜증의 기운은 어떻게든 전달이 된다. 아내에게도 비슷했을 거다. 아내는 서윤이 보느라 사 온 커피도 못 마시고 있었다. 육아의 세계가 이렇다. (물론 육아를 남일처럼 여기고 행동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다른 얘기겠지만) 보통은 너나할 것 없이 애를 쓴다. 하루의 일과라고는 수유와 수유 대기뿐인 아내나 그런 아내의 짐을 덜겠답시고 동분서주하다가 지치는 나나 누구도 짜증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내는 가만히 있었다. 나 혼자 난리.)
괜히 짜증내서 미안하다는 말을 돌려돌려 쓴 일기. 여보,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