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3(수)
시윤이 여름 샌들을 누가 선물해줬는데 소윤이가 그걸 보고는 자기도 사고 싶어 했다. 자기도 사달라고 하지는 않고
"아, 나도 샌들 사고 싶다"
또 이렇게 독백을 가장한 화법으로 얘기했다.
아내는 큰마음 먹고 소윤이 샌들을 하나 사주기로 했다. 샌들을 사주기로 한 게 큰마음이 아니고 소윤이가 색깔을 고르도록 한 게 큰마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윤이는 분홍색 아니 핫핑크를 골랐다. 그리고 무척 행복해했다. 택배는 언제 도착하냐며 물어보고. 그런 소윤이의 기대를 부수는 비보가 전해졌다.
[상품 품절로 인해 취소되었습니다. 불편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물론 거기 아니라도 파는 곳은 많았다. 그 가격에 파는 곳이 없었지. 소윤이에게 다시 고르도록 했다. 소윤이는 못 골랐다. 핫핑크와 보라색을 두고. 소윤이는 마트에 가서 먹고 싶은 거 고르라고 해도 비슷하다. 한참 걸린다. 소윤이는 고민 끝에 보라색을 골랐다. 아내와 내가 고른다면 절대 고르지 않을, 여태껏 선택한 적도 없는 색이었지만 소윤이가 좋다고 하니 뭐. 이제 소윤이가 커서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닌 단순 기호의 문제를 우리의 뜻대로 밀어 부칠 수도 없고. 유일한 근거가 있다면 전주(錢主)가 우리라는 건데, 6살짜리한테 그걸 들이밀면 너무 치사하니까.
아내는 오늘도 시윤이와 씨름, 사투, 아니 뭐라고 해야 하지. 시윤이의 밑도 끝도 없는, 실체 없는 똥고집과 전쟁을 벌였다. 시윤이는 별의별 걸 다 트집을 잡아서 생떼를 부렸다. 밥 먹을 때 의자가 너무 멀어서 당겨놨더니 그게 싫다고 난리고, 서윤이 겨울옷 가지고 와서 그걸로 갈아입히라고 억지 부리고. 밥 열심히 안 먹어서 밥그릇 치우면 뻔뻔하게 앉아 있고. 아내의 속 터짐과 열불이 느껴졌다. 아내의 토로를 이렇게 멀찌감치서 듣기만 할 때는, 오은영 박사가 따로 없다. 시윤이가 지금 시기적, 환경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거고 아내는 또 아내대로 힘들고 여유가 없으니까 그렇고. 주절주절. 막상 그 현장에 놓이면 인간 용광로가 따로 없지.
아내는 가슴 마사지를 예약했다. 며칠 전부터 가슴이 뻐근하고 뭉치는 게 '느낌'이 안 좋다고 했다. 그 '느낌' 이 아주 예민하고 중요한 척도다. 유선염 트라우마가 있는 나는 아내의 가슴 '느낌'이 안 좋다는 소리를 들으면 긴장이 된다. 아, 이렇게 써 놓으면 나 편하자고 그런다고 오해하겠구나. 그런 건 아니고 아내도 가슴 마사지 받으면 항상 만족했다. 가슴도 풀리고 마음도 풀리고.
낮에 장모님이 오셔서 애들을 봐 주신다고 했다. 무려 세 명이나. 세 명을 맡기고 가는 건 처음이라 걱정을 많이 했지만, 부질없는 염려였다. 아내가 떠나고 서윤이는 아내가 돌아올 때까지 계속 잤다. 자고 있는 서윤이 사진 속 구석탱이에 숨어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시윤이었다. 시윤이는 오늘도 낮잠을 잤다고 했다.
[오늘은 내가 셋 데리고 나갈 테니 가능하다면 서윤이 수유텀 맞춰 봐]
[저녁에 퇴근하고 와서?!]
[응. 시윤이는 어차피 안 잘 텐데 뭐]
사람이 극한 상황에 몰리면 근거 없는 배짱과 배포가 생길 때가 있다. 아니면 그 고통을 즐기게 되거나. 나처럼. 아내한테 얘기하면서도 도대체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래도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애들은 나가니 좋고, 아내는 애들이 나가니 좋고. 난 정신이 나가 아니 애들이랑 나가니 좋고.
아내와 아이들, 장모님은 카페에 있었다. 퇴근하는 길에 들러서 태우고 가려고 했는데 아내도 차를 가지고 나왔다고 했다. 집에서 먼 곳은 아니었지만 애들 데리고 걷기가 좀 힘들었던 거 같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내 차에 타고, 아내는 따로 운전을 해서 돌아가기로 했고, 장모님은 서윤이를 유모차에 태워서 걸어오신다고 했다. 소윤이는 자기도 할머니랑 같이 걸어가고 싶다면서 할머니한테 칭얼댔다. 장모님은 소윤이에게 말씀하셨다.
"소윤아. 할머니 서윤이 데리고 가면서 힐링 좀 하게. 사실은 할머니도 좀 쉬고 싶어서"
분리 자체만으로 휴식이 되는 육아의 세계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곧바로 애들을 데리고 나왔다. 서윤이는 유모차에 태우자마자 잠들었다. 요즘은 유모차에 태우면 여지없이 잔다. 멀리 가지는 못하고 동네 마트 앞 광장(공터)에 갔다. 그런대로 애들 자전거, 킥보드를 탈 만하다. 타는 애들도 많고. 소윤이랑 시윤이도 자전거, 킥보드를 가지고 나갔다. 잠깐 앉아서 쉴 때 소윤이가 얘기했다.
"아빠. 원래 아까 집에 갈 때 할머니랑 슈퍼에 가서 작은 수박 사기로 했는데 못 샀어여"
"아, 아까 카페에서 바로 가는 바람에?"
"맞아여"
"그럼 이따 들어가는 길에 아빠랑 살까?"
"그러자여"
거기서 한참을 놀고 마트에 들렀다가 놀이터 앞에서도 또 놀다가 놀이터에서 그네도 타고 집에 왔다. 엄청 오랜 시간인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아내는 여유롭게 저녁도 먹고, 소파에 누워 잉여롭게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그러라고 만들어준 공백이었다.
서윤이는 내내 잤다. 심지어는 들어와서도 잤다. 침대가 아닌 유모차에서. 아내와 내가 자러 들어갈 때까지 잤다. 마지막 수유를 하고 나서도 바로 다시 자고.
나와 소윤이와 시윤이가 외출로 만들어 준 숨구멍, 서윤이가 길고 긴 잠으로 만들어 준 숨구멍으로 내일도 아내가 가쁜 숨이라도 쉬며 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