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아내

18.10.29(월)

by 어깨아빠

오늘 저녁에는 아내가 친구를 만나기로 해서 최대한 빨리 귀가하고 애들을 넘겨받아야 했다. 빠른 귀가를 위해 차를 가지고 출근했다. 자전거 탄다고 호들갑 떤 것에 비해 정작 자전거 타는 날은 얼마 안 되는구나.


장모님이 놀러 오신다고 했다. 오후에는 키즈카페에서 놀고 있는 소윤이, 시윤이 사진이 도착했다. 이사 와서 처음에 많이 갔던 키즈카페였는데 그 후에 더 좋은 곳이 많이 생겨서 잘 안 가던 곳이었다. 소윤이도 좀 시시해하는 것 같고 그래서 다른 곳으로 많이 갔다.


[소윤이 잘 놀아? 지루해하지 않아?]

[응. 아기 돌보느라 바쁨]


소윤이도 소윤이지만 시윤이가 특히 잘 놀았다고 했다. 편백방에 들어가서 움직이지도 않고 한 자리에 앉아 한참을 놀더니 그다음에는 자동차 장난감이 있는 곳으로 가서 또 한참 놀고. 어려서부터 소윤이는 놀이 그 자체보다 나나 아내가 함께하느냐 안 하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긴 것에 비해 시윤이는 확실히 놀이, 장난감 그 자체에 집중한다. 키즈카페에서 즐겁게 놀고 있는 아이들의 동향을 전하는 아내에게 뜬금없는 카톡을 보냈다.


[여보!! 갈게!! 이번주에!!]


내막은 이러하다. 은근하게 나 홀로 여행에 대한 추파를 아내를 향해 계속 던져왔다. 아내는 더 추워지고, 바빠지기 전인 11월에, 그것도 당장 이번 주에 다녀오라고 어제 얘기했다.


"여보. 이번 주에 갔다 와"

"이번 주? 너무 갑작스러운데"

"왜?"

"그냥 숙소도 그렇고 회사랑 교회에 얘기도 해야 되고"

"어차피 금요일 하루는 빠져야 되잖아"

"그렇긴 한데"


뭔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랬는지 흥이 확 타오르지 않았다.


"여보. 그냥 다음 주에 갈게"

"다음 주? 별일 없나? 무슨 일 생길지도 몰라"

"뭐 생기면 어쩔 수 없고. 안 가는 거지 뭐"


그러고 나서 아침에 출근을 했는데 불안해졌다.


'진짜 다음 주에 무슨 일 생기면 어떻게 하지'

'막 날씨가 안 좋으면 어떻게 하지'

'애들이 아프면 어떻게 하지'


군대에 있을 때 휴가 신청해서 승인 받았는데 갑자기 비상 걸려서 휴가 잘리거나 밀리면 얼마나 짜증이 나고 김이 샜는지. 꼭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아내에게 급 선포했다. 이번 주에 가겠노라고. 퇴근했더니 아내는 열심히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애들은 장모님이랑 권사님(장모님의 절친)이랑 놀고 있었다. 아내는 운정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고 장모님과 권사님(운정, 금촌) 도 모셔다 드리기로 했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가득 찬 졸음에서 유발되는 일상 수준의 짜증이나 떼를 보이고 있었다. 시윤이는 엄마의 외출을 눈치채고 더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이럴 땐 아내가 빨리 나가는 게 상책이다. 차라리 그게 낫다. 엄마가 나가고 나면 놀라우리만치 일상이 회복된다. 소윤이는 당연하고 시윤이도 울어서 되는 상황과 울어도 바뀌지 않는 상황을 조금씩 구별한다. 오늘 같은 날은 특히 더 깔끔하게 태세를 전환한다. 벌써 여러 번 겪은 반복 상황이라 그런지 아내가 나가고 나면 순한 양이 된다. 오늘도 아내가 사라지고 처음 몇 분은 나한테 안겨서 세차게 울었다.


"맘마 먹을까? 시윤아?"


밥 제안에도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울어댔다. 시윤이를 달래고 있는데 소윤이가 어디선가 낙엽을 잔뜩 들고 와서는 거실 바닥에 뿌리며 얘기했다.


"시윤아. 이거 선물이야"


소윤이는 나름대로 동생을 달래주려고 했던 것 같다.


"소윤아. 그거 더러워. 그렇게 집 안에 가지고 들어오면 안 돼. 얼른 갖다 놔"

"....."


소윤이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 말을 무시하고 계속 낙엽을 늘어놨다.


"소윤아. 아빠가 치우라고 했잖아"

"......."

"소윤아 얼른 치워"

"아빠아. 치우고 있잖아여. 나 삐졌어"


바닥에 흩뿌렸던 낙엽을 두 손 가득 들고 가더니 현관에다 내팽개치듯 집어던졌다.


"강소윤. 지금 뭐 하는 거야? 원래 있던 곳에 담아 놔"

"싫어. 나 삐졌어"


소윤이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 안 나오면 아빠랑 얘기 못 해. 얼른 나와"


매우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삐죽삐죽 걸어 나왔다.


"얼른 다시 넣어 놔"


마지못한 발걸음으로 현관에 가서 낙엽을 주워 쇼핑백에 담았다.


"소윤아. 이리 와 봐. 소윤이 지금 왜 짜증 났어?"

"아니. 아빠가 아까 내가 내가 그거 꽃 치우고 있는데 그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어 뭐냐. 최. 최대한인데 아빠가 더 빨리 하라고 했잖아"


최대한이라니. 단어 선택도 그렇고 단어의 구사도 그렇고. 흠칫 놀랐다.


소윤아. 아빠가 너처럼 영어공부를 해야 하는데.


며칠 전에는 혼자 뭐라 뭐라 말하다가


"어쩌구저쩌구 비시(빛이) 이렇게 왔는데. 아니 아니 비치(빛이) 이렇게 왔는데"


이러면서 자가 발음 수정도 했다.


어쨌든 소윤이에게 사과할 건 사과하고(하고 있는데 재촉한 거) 잘못한 건 알려주고 잘 다독여서 마음을 풀어줬다. 소윤이를 앉혀 주고 소윤이 밥그릇, 시윤이 밥그릇을 식탁 위에 가져다 놨다. 그때까지도 밥 안 먹겠다며 시위하고 있던 시윤이는 실물 밥을 보자 그제야 자존심을 버리고 실리를 택했다.


"마. 마. 마"


손가락으로는 식탁의자를 가리키며 앉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더니 또 밥그릇을 자기 앞에 갖다 놓으라며 막 울려고 그러길래 얼른 갖다 줬다.


'그래. 치우면 되지 뭐. 니 맘대로 해라'


메뉴는 소고기 장조림, 무나물, 호박 부침이었다. 시윤이는 밥이랑 반찬을 손으로 집어 먹으며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중간중간 숟가락으로 떠서 먹여주는 것도 넙죽넙죽 잘 받아먹었다. 소윤이도 그냥 내가 먹여줬다. 덕분에 굉장히 웃음이 넘치고 유쾌한 저녁 식사 자리가 연출됐다.


"아빠. 어제 비요뜨 먹기로 했잖아"


어쩜 이런 건 그렇게 잘 기억하니.


"그래. 밥 먹고 줄게"


분명 누나 혼자 뭐 먹는 걸 보면 자기도 달라면서 울음을 터뜨릴 텐데. 시윤이는 뭘로 입을 막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아내가 나가면서 식탁 위에 빵 있으니 간식으로 먹여도 된다고 했던 게 생각났다. 시윤이한테는 그걸 줬다. 엄청 잘 먹었다. 계속 줬으면 내 얼굴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빵을 다 먹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와구와구 잘 먹었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나한테도, 소윤이한테도 계속 눈웃음치며 애교를 발사했다.


밥도 잘 먹고 씻고 옷 갈아입는 것도 일사천리고. 착착 착착 잘 준비를 진행했다. 소윤이는 고맙게도 아주 짧은, 본인 수준보다 한참 아래인, 시윤이가 조금 더 크면 읽어줄 만한 그런 책을 두 권 골라왔다. 두 권을 읽는데 3분이 채 안 걸린 것 같다. 금방 둘을 재우고 나와서 아내에게 상황을 전했다. 그러고는 거실에 앉아서 한 방에 숙소부터 차편까지 예약을 마쳤다. 신이가 신이가 마구 났다 비록 국내고, 2박 3일이지만 시윤이 낳기 전 혼자 갔던 군산 여행 때의 기분이 되살아났다.


'오예. 여행'


아내가 돌아와서 말했다


"어제는 그렇게 쿨하게 못 가도 상관없다더니"


쿨? cool? 나 세상 둘도 없는 핫가인데? 못 가면 울건대?


여보야아아아. 미안해에에에에.

난 다르다고 생각했는데에에에에.

나도 어쩔 수 없는 속물인가봐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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