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열심히 살았다

18.10.30(화)

by 어깨아빠

오늘은 홈스쿨 모임 장소가 우리 집이었다. 아내에게는 차가 있으면 좋기는 하지만 없어도 큰 장애가 아닌 날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기에는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탓에 아침에 일어나면 도무지 몸이 풀리지 않고. 그냥 대중교통을 택했다. 차를 써도 상관없지만 차 안 쓰고 대중교통 타고 다니는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차 타고 다닐 때는 못 보던 것들, 이를 테면 다른 사람들의 행색이라던가 어떤 사연이 있을까, 어디로 가는 걸까. 이런 것들을 볼 수 있는 낭만은 개뿔 그 딴 거 없다. 그냥 내가 타야 하는 버스가 언제 올지 모르니 냅다 뛰는 거다. 스마트폰으로 다 확인이 가능하지만 귀찮으니 일단 뛰는 거다. 새벽 댓바람부터. 지하철에 타면 잠깐이나마 책을 읽는데 그 '잠깐'의 힘이 어마어마하다. 평소에는 아예 한 페이지 읽을 엄두도 못 내던 것을 벌써 100페이지 넘게 읽었다.


요즘은 굳이 스마트폰이 없어도 버스 정류장에 있는 키오스크에 도착 정보가 뜨고 거의 맞는다. 대화역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학생(고양예고 점퍼를 입고 있다)도 많고 어딘가로 출근하는 듯한 사람도 많고. 200번 버스에 올라타면 늘 맨 앞자리(출입문 쪽)에 앉고 안전벨트를 맨다. 항상 생각한다.


'왠지 벨트를 매도 앞으로 튕겨져 나갈 것만 같은데'


어디선가 운전석 뒷자리가 가장 안전하다는 걸 봤지만 거기는 너무 답답하다. 졸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몸을 깨워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오늘은 잠들어 버렸다.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치지 않은 게 다행이다. 내가 내리는 곳 정도 되면 버스에 거의 아무도 없다. 타고 내릴 때 꼭 인사를 드린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고생하세요"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군대 시절, 수고하세요는 상급자에게 건네는 인사가 아니라고 배웠다. 아직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매번 고민한다. 고생하시라고 해야 할지 수고하시라고 해야 할지. 덕분에 가장 많이 선택받는 건 감사합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나의 출근 여정을 짧게나마 기록해 두는 건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위해서다. 아니 나를 위해서인가.


얘들아. 아빠 나름 열심히 살았어. 지금 34살이니까 어찌 보면 많은 나이는 아닌데 너네 둘을 기르는 부모가 됐고 아빠도 엄마도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았어. 그냥 혹시 엄마나 아빠가 전해주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그때는 이걸 보고 알아 달라고.


홈스쿨 모임을 우리 집에서 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동하지 않는 편리함을 누리는 대신 집을 치워야 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물론 거의 아내의 몫이다. 어젯밤


"이제 집 좀 치워야지"


라는 말을 한 서너 번은 들었고 시간상으로는 거의 2시간이 흘렀다. 차라리 오늘은 그냥 두고(혹은 쉬고) 내일 일어나서 하는 게, 임박했을 때 발휘되는 초인적인 힘 덕분에 더 잘 될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혹시나 아내가 기분 나빠할까 봐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있었는데 아내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여보. 그냥 내일 닥쳐서 할까 봐. 그게 나을 것 같아"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덕분에 아내의 오늘 아침은 무지하게 바빴을 거다. 아주 늦은 오후에 연락이 됐다. 소윤이랑.


"아빠아"

"어. 소윤아"

"아빠 우리 지금 병원이에여"

"아. 병원 갔구나"

"오늘 시안이랑은 재밌게 놀았어?"

"네에"

"엄마는 뭐하셔?"

"엄마는 지금. 어. 뭐. 종이에 뭐. 쓰고 있어여"

"아. 그렇구나"

"엄마는 지금 바빠여"

"아. 그렇겠네. 시윤이는 뭐해?"

"시윤이는 그냥 있어여"

"병원에 사람은 많아?"

"어. 지금. 어. 네 명 있어여. 네 명"

"아 별로 없네, 소윤아 오늘 검진 잘 받고 이따 만나자?"

"네에"


정말 아내의 도움 하나 없이 오롯이 소윤이하고만 통화했는데 대충 상황이 파악됐다. 이제 소윤이랑 이 정도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니. 우리 첫째가 너무 빨리 크고 있다. 병원에 있는 사람들이 소윤이의 전화통화를 듣고 다들 웃었다고 했다. 뭐랄까 소윤이의 언어는 표현도 표현이지만 가끔 30-40대 아주머니 같은 능청과 원숙함이 보일 때가 있다. 아내랑 나도 웃음이 터질 때가 많다.


영유아 검진이 끝나고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어. 끝났어?"

"어. 지금 차에 탔어"

"애들 울었어?"


소윤이가 대신 대답했다.


"아빠. 나는 으 이렇게만 하고 하나도 안 울었어여"

"우와. 소윤이 대단하네. 시윤이는?"

"시윤이는 쪼오끔 울었어"

"그랬구나. 소윤이는 안 아팠어?"

"쪼금 아팠는데. 참았어여"


그래. 니 인생에 주사만큼 고통스러운 게 또 어딨겠니. 그걸 참아낸 건 정말 대단한 거지.


아침부터 극심한 두통을 호소하던 아내가 걱정됐는데 퇴근해서 보니 아침보다는 많이 나아져 있었다. 오늘은 특별히 애들이랑 놀아줄 때 힘든 내색을 하거나 거절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실 그래 봐야 뭐 엄청 짧은, 아내가 저녁상 차리기 전까지의 시간이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말타기를 하자고 하면 말타기를 해주고 안아달라고 하면 안아주고 모르는 체 하라고 하면 모르는 체 하고. 이제는 시윤이도 자기가 원하는 걸 주문할 수 있어서 마음먹고 놀아주려면 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다른 건 없고 그냥 애들 웃음소리 한번 더 들으면 그게 그렇게 흐뭇하고 기분 좋을 수가 없다. 깔깔대면서 뒤집어지는 소윤이, 시윤이를 보고 있으면 진짜 절로 웃음이 난다. 밀도 있게 놀아주면 저녁 먹을 때도 좋은 쪽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나 혼자 생각하고 있다.


저녁 식탁의 중심 반찬은 훈제오리였다. 한살림 훈제오리인데 진짜 괜찮다. 싼 건 아니지만 질적으로 우수한 오리고기를 먹이고(혹은 먹고) 싶으면 추천할만하다. 소윤이랑 시윤이도 입에 맞았는지 우걱우걱 시원스럽게 잘 먹었다. 재울 준비를 마치고 다 함께 방에 들어갔다. 소윤이에게 책 두 권을 읽어주고 났더니 소윤이는 곯아떨어졌다. 시윤이가 조금 더 버티긴 했지만 금방 나가떨어졌다. 헬스 가려고 준비하는데 아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었다.


"여보. 뭐해?"

"어. 나 뷰티 인사이드 받으려고"


본방 하려면 약 1시간 정도 남은 시간이었으니 그동안 어제 방송분 보고 그러고 나서는 오늘 방송 본방으로 보고. 엄청 피곤해하던 아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운동하고 왔더니 아내는 매우 밝은 모습이었다. 다 보고 나오면서


"혼자 엄청 울었네. 오늘 서현진 엄마가 죽었어"


라고 얘기했다. 그러더니 또 소파에 앉아서 뭘 열심히 보길래 뭐하냐고 물었더니 웹툰을 본다고 했다. 내일은 공식 일정이 아무것도 없어서 부담이 없는지 열심히 놀았다. 시윤이는 누나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소윤이도 더 어렸을 때는 가분수에 가까운 비율이었는데. 시윤이도 키는 하위 10%인데 머리 크기는 상위 70%랬나 80%랬나. 아무튼 크다. 머리 크기도 크긴데 키가 그렇게 작은 줄 몰랐다. 요즘 보면 배는 터질 듯이 나오던데. 벌써부터 아빠 닮아가나. 흑.


소윤이는 다 중간이다. 키도, 몸무게도, 머리 크기도.


아픈 데 없이 잘 자라고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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