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31(수)
잠결에 들리는 소윤이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요즘은 눈 떠서 그렇게 이유 없이 짜증 내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오랜만에 아침부터 징징거리고 있었다. 잠결이었지만 순간적으로 어제 맞은 일본뇌염, 독감 예방주사가 떠올랐다. 슬쩍 이마를 만져봤는데 열이 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잠을 덜 잤나 싶었는데 아내가 얘기했다.
"소윤이 열 조금 있어"
다시 만져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체온계로 재보니 37.8도. 미열이긴 했지만 몸은 힘든 모양이었다. 계속 낑낑대고 눕고 힘들다고 얘기하고. 어린이집 그만두고 나서는 한 번도 열이 오른 적이 없었는데 꽤 오랜만이었다. 어제 주사 맞을 때 일본뇌염은 열이 날 수 있다고 미리 설명해주셨다고 하니 아마 그것 때문인 듯했다.
사무실에 있는데 아내에게 영상 통화가 왔다. 소윤이랑 시윤이는 아침을 먹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윤이는 먹고 있었고 소윤이는 몇 숟가락 먹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힘겨워하고 있는 소윤이에게 좀 장단을 맞춰 주려고 하는데 눈치 없는 시윤이는 계속 옆에서
"압빠아아. 아아아아"
하면서 자기 밥 잘 먹고 있다는 거 보여주고 누나한테 장난치고. 예민해진 소윤이는 시끄럽고 거슬린다고 짜증 내고. 잠시 후 아내에게 전화가 왔는데 소윤이는 밥은 거의 먹지 못하고 방에 누웠는데 바로 잠들었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두 시간쯤 있다가 다시 전화가 왔다. 저 멀리 쫑알거리는 소윤이 목소리가 함께 들렸다.
"소윤이 괜찮아?"
"어. 자고 일어났더니 괜찮아졌네"
"그래? 열은?"
"열도 없어"
"다행이네"
1시간 30분의 취침으로 열을 쫓아내고 원래대로 복귀했다. 기특한 녀석. 어제 병원 다녀오면서 소윤이가 홍루이젠 샌드위치 사달래서 갔는데 다 팔리고 없는 바람에 그냥 돌아왔고 아내랑 소윤이는 오늘 재도전 하기로 했다.
"아빠 우리 이제 샌드위치 사러 갈거다여"
"진짜? 좋겠네? 소윤이 이제 안 아파?"
"네"
"하나도? 안 힘들어?"
"네 자고 일어났더니 멀쩡해졌어여"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여러모로. 아침에 소윤이가 아프다는 걸 알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 혹은 염려는
'아. 오늘 축구하러 못 가겠네'
였다. 거짓말처럼 이렇게 싹 나아주니 고맙기가 그지없구나 딸아. 참 다행이야. 오늘도 열심히 버스와 지하철을 오가며 퇴근하고 있는데 화정역을 막 지날 때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어디야?"
"나. 이제 화정역 막 출발했어"
"그래? 그럼 원흥에서 내려. 내가 데리러 갈게"
"여보 어딘데?"
"아. 지금은 커피앤수다인데. 차가 있어서 바로 갈 수 있어"
"난 괜찮은데. 그냥 버스 타고 가도 돼"
"그래도. 가면 편하잖아"
"그래 그럼"
원흥에서 내려 차에 탔다.
"소윤아. 시윤아"
"압빠아아아아" "아빠"
소윤이는 정말 멀쩡했다. 들어가는 길에 반찬용 돈까스 가게에 들러 치킨까스를 하나 샀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맘스터치를 보더니 감자튀김이 먹고 싶다는 소윤이를 위해 감자튀김도 사고. 집에 가서 부지런히 돈까스를 잘라 밥을 차려줬다.
"여보. 여보가 애들 먹여. 난 설거지할게"
애들 밥 먹는 동안 부지런히 설거지를 했다. 설거지를 하기 전 건조대(?)에 있던 물기가 마른 그릇은 각각 제자리를 찾아 정리하고. 설거지를 다 하고 나서는 싱크대 주변도 나름대로 정리하는 단순 설거지 이상의 한 단계 고차원적인 움직임까지 곁들였다. 애들이 밥 다 먹고 나서는 두 녀석 다 차례대로 씻기고 옷도 갈아 입히고.
"소윤아. 너네 아빠가 오늘 굉장히 헌신적이네"
정곡을 찔렸군. 10월의 마지막 밤을 그라운드에서 불태우기 위한 나름의 몸부림이었다고나 할까. 방에 들어가서 눕는 것까지 보고 집에서 나왔다. 주일에도 축구를 하고 수요일에도 축구를 하는데 느낌상 수요일이 더 잘되기도 하고 재밌게 느껴져서 왜 그럴까 궁금했는데 오늘 이유를 찾았다. 수요일은 부담이 없어서 그렇다. 오늘처럼 모든 걸 끝내 놓고 나오거나 거의 다 끝내 놓고 나오니까 신경을 안 써도 되는데 주일은 다르다. 뭔가 마음의 짐이 항상 묵직하다.
'잘 지내는지. 힘들지는 않은지'
쉬는 시간마다 수시로 연락 없었나 휴대폰 확인하고.
축구 다 끝나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집에 가보니 아내는 잠들어 있었다. 차에 있던 아내 휴대폰을 축구하러 가기 전에 차에서 꺼내 현관 앞에 툭 두고 갔는데 그게 그대로인 걸 보니 아예 나오지도 못하고 바로 잠든 것 같았다. 거실이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소윤이가 오리기 놀이 한 잔해들과 온갖 장난감이 제 멋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바로 치우지 않으면 왠지 자기 전에 못 치울 것 같아서 씻지도 않고 집을 치우기 시작했다. 조금씩 정리되는 집을 보며 역시 엉덩이 붙이기 전에 치우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치우고 있는데 아내가 좀비처럼 걸어 나왔다.
"일어나면서 11시만 안됐길 바랐는데"
이미 1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얼른 들어가서 자"
"그래야겠다"
아내는 휴대폰만 챙겨서 바로 다시 들어갔다. 쌀만 좀 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축구하러 나갈 때 버리려고 챙겨뒀다가(?) 까먹는 바람에 싱크대 위에 남겨진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눈에 밟혔지만 그것까지는 너무 귀찮았다. 내일 출근할 때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