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4(토)
여행 일정이 2박 3일이라면 가장 소중한 날이 바로 두 번째 날이다. 오고 가는 것에 방해받지 않고 온전하게 여행자로 살 수 있는 유일한 하루니까. 아무리 육아의 연속이라도 난 여행이 즐겁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소란으로 조금씩 방해받던 잠은 서윤이의 매서운 울음소리로 마침표를 찍었다. 역시나. 여행이지만 평소의 주말과 다른 게 없는 풍경이다. 유일한 차이가 있다면 보다 너그러워지고 풍요로워진 나의 마음일 텐데, 이게 사실 제일 중요하다.
아침은 짜장 라면이었다. 평소에 인스턴트 라면은 웬만하면 안 먹이지만 오늘은 여행이니까 특별히. 이렇게 말하면 애들은 엄청 먹고 싶어 하는데 우리가 안 주는 것처럼 보이겠구나. 그런 건 아니다. 그저 마땅한 반찬거리가 없었고 아침을 대신할만한 먹거리도 없었다. 소윤이는 흔쾌히 짜장 라면을 먹겠다고 했는데 시윤이는 싫다고 했다. 시리얼을 먹겠다고 했다. 진짜 시리얼을 먹고 싶거나 짜장 라면이 싫어서가 아닌, 괜한 특유의 청개구리 똥고집이라고 생각했다. 시리얼을 먹어도 상관은 없으니 시윤이의 뜻대로 시윤이만 시리얼을 줬다.
요즘 소윤이는 식사 시간마다 아내와 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어떤 음식이든 그릇을 싹싹 비우고, 먹는 것도 와구와구 복스럽고. 시윤이는 식사 시간마다 아내와 나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고. 어쨌든 시윤이도 시리얼은 잘 먹었다. 과자도 먹고 과일도 먹고.
TV도 봤다. 물론 소윤이와 시윤이의 취향에 맞춰서. 페파 피그인가 하는 거였는데 내가 보기에는 소윤이 수준은 아니었는데 평소에 영상을 잘 못 봐서 그런가 소윤이, 시윤이 모두 엄청 재밌어했다. 아내 말로는 엄마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영어 교육용 만화라던데, 우리는 한글로 봤다. 한참 봤다. 시윤이의 요구를 반영해 타요도 보고.
어디 갈 계획은 전혀 없었다. 이번만큼은 철저하게 무이동 여행이었다. 한 번씩 강릉까지 온 게 아까우니 어디 바다라도 갔다 와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실속을 챙기기로 했다. 그런 면에서 숙소에 욕조가 없는 건 정말 아쉬웠다. 미니 풀장은 고사하고 작은 욕조만 있었더라도 아이들에게 큰 놀 거리가 됐을 텐데. 아쉬운 대로 챙겨간 물총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 작은 수돗가라도 하나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없었다. 작디작은 소윤이와 시윤이의 물총에 물을 수시로 채워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긴 거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계단을 올라가서 2층에 있는 우리 방 화장실까지 갈 수도 없고. 애들 키우면서 자주 느끼지만 진짜 뭐 하나 쉽게 되는 일이 없다. 항상 변수의 연속이고. 500ml 물통, 2L 물통, 다 마신 커피컵에 물을 채워 왔다.
상대를 공격하거나 해를 가하는 일체의 놀이를 금지하고 있다. 우리 집에서는. 물총 놀이라고 하면 으레 서로를 향해 물을 쏘고 도망치지만, 그 재밌는 걸 못하는 거다. 뜨거운 태양볕 아래 물총 하나 달랑 쥐여주고 "서로 쏘지 말고, 재밌게 놀아" 라니. 어떻게 하면 애들이 좀 재밌어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소윤이와 시윤이가 알아서 찾아냈다.
"아빠. 이거 봐여. 우리가 아빠 차 세차하고 있어여"
"아빠아. 때따하고 이떠여엉"
소윤이와 시윤이는 차에 열심히 물을 뿌렸다. 꽤 오래 했다. 소윤이는 놀이가 아니라 진짜 세차를 하는 모양이었다.
"아빠. 이거 봐여. 여기가 진짜 깨끗해졌져?"
둘 다 얼굴이 벌겋게 익을 정도로 한참 밖에서 놀았 아니 세차를 했다. 아내와 나, 시윤이는 소윤이와 시윤이가 노는 걸 보며 서 있었는데 (서윤이는 유모차에서 잤고) 너무 뜨거웠다. 물총 놀이를 마치고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어디 가지를 않으니 마땅히 할 게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드러누워서 TV나 봤으면 좋겠는데 애들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시내 구경이라도 하고 올까 싶었지만 시간이 애매했다.
숙소에 젠가(보드게임)가 있길래 해 봤는데 역시, 소윤이랑은 하는 재미가 있었다. 시윤이도 곧잘 하긴 했지만 자기 취향이 아닌 듯 금방 흥미를 잃었다. 문제는 나도 금방 흥미를 잃었다는 거다. 젠가 같은 초 단순 게임이 재밌으려면 뭔가 걸어야 한다. 소윤이는 거는 게 없어도, 태초의 젠가 규칙만으로도 즐거워했다. 질려 하지도 않고.
서윤이는 자고, 깨고, 먹고를 반복했다. 기분이 좋아서 울지 않고 오래 누워 있을 때는 나도 옆에 가서 눕기도 했다. 애초의 마음은 서윤이 보려고 간 건데, 옆에 누울 때마다 잠들었다. 머리만 대면 잔다는 표현 그대로였다. 얘들아, 아빠 즐거운데 왜 이렇게 피곤하니.
아내도 나랑 비슷해 보였다. 여행이라고 해서 막 엄청 흥분하고 신나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여전히 세 아이의 엄마였으니까. 그래도 혼자 집이었으면 눈물 콧물 다 뺐을지도 모르는 상황에도 아내는 넉넉히 이기고 있었다. 여행이니까. 함께니까.
저녁에는 밖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새우도 구워 먹고. 난 열심히 구웠고 아내는 열심히 날랐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잘 먹었다. 서윤이는 내내 아내가 안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서윤이가 제일 고생인지도 모르겠다. 서윤이도 바뀐 공기의 기운을 좀 느끼려나. 마지막에는 마시멜로도 구워 줬다. 이건 나의 제안이었다. 아무 이유는 없었고 그저 애들한테 조금 더 쾌락적 재미를 주기 위해서였다. 보는 재미, 먹는 재미 둘 다 잡긴 했다. (난 마시멜로가 뭐가 맛있는지 모르겠다. 마치 식약처 비인가 불법 식품을 먹는 느낌이었다. 마시멜로는 초코파이의 조연을 할 때 가장 빛이 난다.)
저녁을 먹고 들어와서는 애들을 씻겼다. 이때쯤 아내와 나의 체력이 슬슬 바닥을 보였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는 저녁 먹고 밤에는 잠깐이라도 나갔다 오자고 낮부터 약속을 했다. 이럴 줄 몰랐다. 끝없는 수유에 지친 아내도, 분리 없는 연속 육아에 지친 나도 무척 버거웠다. 감정적으로는 조금도 나쁘지 않았는데 말 그대로 정말 지쳤다. 체력이 동이 났다. 아내는 서윤이의 마지막 수유 시기도 재고 있었다. 요즘 아내에게는 이게 아주 중요하다. 밤잠과 통잠의 습관을 들이는 핵심이니까.
"소윤아, 시윤아. 우리 오늘은 그냥 잘까?"
아내의 조심스러운 제안을 소윤이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소윤이는 더 어릴 때도 그랬지만 크면 클수록 아내와 나의 상황을 알아서 이해하고 처신할 때가 참 많다. 기특하면서도 짠하고 그렇다. 시윤이는 공손하게 거부 의사를 표명했다.
"더녁 먹꾸우 나간다고 했따나여엉"
외출을 못 하는 대신 TV를 좀 보다 자는 건 어떠냐는 제안도, 소윤이는 수락했고 시윤이는 거절했다.
"그럼 소윤이는 숙소에서 엄마랑 TV 보고 시윤이는 아빠랑 마트 갔다 오자"
소윤이는 고민했고 시윤이는 받아들였다. 소윤이는 TV도 보고 싶었지만 밖에 나가고 싶기도 했다. 오랜 고민 끝에 소윤이는 외출을 선택했다.
"여보. 내가 애들 데리고 나갔다 올 테니까 여보는 서윤이 먹이고 좀 쉬어"
"아니야. 그럼 나도 같이 갈게"
"있어도 돼. 애들 데리고 갔다 오지 뭐"
"나도 나가고 싶어서"
처음(낮 정도까지) 나의 계획은 시내에 가서 구경도 좀 하고 돌아다니다 오는 거였다. 저녁쯤 되니 그 생각이 싹 사라졌다. 너무 피곤했다. 마트에 들러서 필요한 것 좀 사고 애들 군것질거리도 좀 사고. 그게 끝이었다. 그래도 즐거웠다. 평범하고 일상 같은 여행인만큼, 매 순간 즐겁고 감사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렇게 유도했고.
숙소는 넓은 원룸형이었다. 다시 말하면 애들을 따로 재울만한 방이 없었다는 거다. 애들 자는 침대도 아내와 내가 자는 침대도 서윤이가 누워야 할 공간도 TV도 모두 같은 공간에 있었다. 육아인들에게 이건 아주 치명적인 단점이다. '애들 재우고' 벌어질 꿈과 환상의 시간을 포기하거나 방해받을지도 모르니까. 다행히 우리의 1, 2, 3호는 잠귀가 밝지 않고 예민하지 않다. 소윤이와 시윤이야 그렇다 쳐도 심지어 서윤이도 마찬가지였다. 잠자리가 바뀌었어도 집에서처럼 잘 잤고, 아내와 내가 시끄럽게 영화를 봐도 전혀 구애받지 않았다. 중간에 잠깐 깼을 때도 손가락 좀 빨고 이리저리 둘러보며 바둥대더니 다시 혼자 잠들었다.
덕분에 아내와 나는 영화도 한 편 봤다.
"소윤아, 시윤아. 어떡해"
"왜여? 아빠?"
"이제 내일이면 집에 가야 한다니"
"하아. 그러게여"
"아빠아. 우디 여기더 계독 살다여엉"
시윤이는 집에 가지 말고 여기 계속 눌러 앉자고 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여행이 얼마나 감사한 건지, 시윤이는 아직 모르겠지.
아빠가 제일 가기 싫다. 그래도 가야 해. 그래야 다음에 또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