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3(금)
며칠, 아니 정확한 때를 알 수는 없지만 꽤 한참 전부터 여행 욕망이 끓어 올랐다. 지난해 말 백수 기념(?) 여행을 끝으로 여행이 없었다. 그러고 나니 서윤이가 태어나고 새로운 직장에 들어가고. 일상이 변화와 적응으로 뒤덮여서 여행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제 여유가 좀 생긴 건가. 아니면 좀 지친 건가. 아무튼 '여기에' 가고 싶다가 아닌 '어디든' 가고 싶다, 다시 말하면 잠시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 찼다.
"여보. 우리 이번 주말에 여행 갈까? 가까운 데로. 2박 3일"
"갑자기?"
"응. 금요일에 퇴근하고"
아마 수요일쯤 얘기를 꺼낸 거 같다. 아내와 나는 부지런히 숙소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내와 나는 다소 충격을 받았다. 코로나 시국이 무색하게 거의 모든 방이 예약 완료였다('모든'의 범위가 어디까지냐가 관건이겠지만, 우리 수준에 적합한 비용과 거리가 소요되는 곳 정도로 해두면 되겠다). 싸고 괜찮은 방은 당연히 누군가의 차지였고 비싸지만 괜찮은 곳도 마찬가지였다. 남은 거라고는 비싸고 후진 곳뿐이었다.
"여보. 여보의 조건은 뭐야?"
"음, 앞에 마당이 있고 숙소는 깨끗하고 사람은 없고 너무 멀지 않은 곳?"
"여보. 그런 곳은 없어"
코로나 시국이기도 했고, 특정한 목적지를 가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잠시 일상이 아닌 곳에 가고 싶었다. 김영하 작가가 언젠가 알쓸신잡에 나와 호캉스를 논했던 게 딱 내 마음이었다.
"호텔에는 일상의 근심이 없어요. 가만히 있다가 세탁기만 봐도 '저거 돌려야 되나' 생각이 들고, '설거지도 저거 해야 되나' 여러 가지 생각이 들잖아요.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오래 살아온 공간에는 우리의 상처가 있어요. 오직 일상의 상처와 기억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먼 나라로 갈 필요가 없는 거에요"
누가 보면 큰 풍파와 어려움을 겪는 줄 알겠지만, 그런 건 아니고 그저 좀 지쳤거나 지루했거나 정도였다. 게다가 우리의 여행은 일상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은 애초에 불가능하고. 비관적으로 보자면 장소를 바꾼 '육아의 연속'일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이런 모든 이유를 종합해서 내가 원하는 숙소는 '차로 1시간 이상 떠나야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멀지 않은 자연 속에 위치한 마당이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별개의 공간인 깨끗한 곳' 이었다. 사실 금방 찾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들 여행 안 가고 집에 있는 줄 알았다.
오늘 아침까지도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해서 고심했다. 조금 일찍 사무실에 도착해서 차에 앉아 급히 몇 곳을 찾아 아내에게 보냈다. 어젯밤에는 안 보이던 숙소들이 오늘 아침에는 왜 보이는 건지(진짜 그런 건 아니고 느낌이 그렇다는 거다). 서너 곳의 후보지 중 한곳을 골랐다. 숙소가 깨끗했고 마당도 있었고. 이미 다녀간 사람들의 후기도 좋았고. 일사천리로 입금을 마치고 예약을 완료했다.
"와웅. 씬난당"
갑자기 업무 효율이 상승했다.
육아계의 고인물 아내는 오늘도 애 셋을 데리고 혼자 카페에 갔다가 장도 보고 짐도 다 싸 놨다. 아내랑 나랑 둘이 오붓하게 떠나는 여행이 아니고 다섯 명이 움직이는 제법 덩치가 큰 여행이었다. 비록 일정은 짧더라도. 그걸 준비하는 게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퇴근해서 바로 출발만 하면 되는 정도였다.
다만 한 가지 변수가 생겼다. 애들보다 더 신나서 설레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내가 얘기했다.
"어, 여보 왔어. 여보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어"
"왜?"
"시윤이가 좀 이상해"
"이상하다고? 왜?"
"아니, 잘 놀다가 갑자기 토할 거 같다고 그래서"
"그래?"
시윤이는 장모님과 함께 화장실에 있었다. 울면서. 꼭 열나고 아플 때의 말투와 몸짓이었다. 장모님은 아까 먹은 만두가 얹혀서 그런 거 같다고 하셨다. 아내는 '잘 놀다가 정말 한순간에. 갑자기 저렇게 됐다'라는 사실을 의아해했다. 시윤이에게 가서 이것저것 물었다. 시윤이는 나의 질문은 듣지 않고 무조건 '엄마가 안아달라'라는 말만 했다. 아내가 수유 중이기도 했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시윤이의 요구(이자 떼)를 무조건 듣기만 해서는 안 됐다. 조금 더 단호하게 일단 지금은 아빠의 말을 들어야 너의 문제도 해결이 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일단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나의 말을 따랐다. 이건 아직 정상의 사고 회로를 가동할 여력이 남아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도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지는 못했다. 계속 토할 거 같다고 얘기하는 걸로 봐서 장모님 말씀처럼 만두가 얹혔나 짐작할 뿐이었다. 장모님과 아내는, 내가 가기 전에는 얼굴이 창백해졌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는데 낯빛과 손과 발의 온기가 돌아왔다며 좀 괜찮아진 거 같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도 겉모습은 정상이었다. 시윤이 스스로 토할 거 같고 속이 울렁거린다고 말하고, 계속 누워 있으려고 해서 일단 기다렸다.
"여보. 아직 자기 상태를 정확히 모르는 거 같아"
"그러게. 좀 그런 거 같네"
아내와 나는 '아까 아픈 느낌'의 여운을 가지고 '여전히 아프다'라고 착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살짝 장난을 치니 약간 웃음을 보이기도 했고. 원래 도착하자마자 바로 출발하려던 계획은 이미 조금 늦어진 상태였다.
"시윤아. 아직도 속이 울렁거려? 토할 거 같아?"
"네"
"더 누워 있고 싶어?"
"네"
"그럼 오늘 여행 가지 말고 집에서 잘까?"
"아니여엉. 여행 가꺼에여엉"
"여행은 가고 싶은데 조금 더 누워 있고 싶어?"
"네"
여행을 가겠다는 걸로 봐서는 엄청 심하게 고통스러운 건 아닌 듯했다(어디가 불편한지는 몰라도). 괜찮아졌는데 스스로 잘 몰라서 그러는 거 같기도 하고 정말 어딘가 불편한 거 같기도 하고. 확신이 서지 않았다. 괜히 무리해서 출발했다가 차에서 토하거나 더 상황이 안 좋아지면 안 되니까 성급히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기도 어려웠고.
그러던 와중에 소윤이가 당시 상황을 다시 진술했다. 아내와 장모님은 다른 일하느라 잠시 신경을 못 쓰고 있을 때, 소윤이와 시윤이는 작은방에서 놀고 있었다. 작은방에 있는 의자에 한 명이 앉고 나머지 한 명은 그 의자를 돌렸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모든 조각이 맞춰졌다. 시윤이가 의자에 앉았을 때 소윤이가 세게(아내와 내가 강도를 물어봤더니 '엄청 살살은 아니었어여'라고 대답했다) 의자를 돌렸다는 거다. 아내가 '갑자기' 애가 이상해졌다고 말하는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랬네. 시윤이가 멀미가 왔나 보네. 만두 먹은 게 소화가 안 된 상태에서 막 돌아가지고 속이 울렁거렸나 보네"
아내와 나는 멀미로 추측했다. 멀미라면 딱히 해결책은 없고 그저 시간이 지나면 될 일이었다.
"자, 그럼 아빠가 어디 한번 테스트를 해 볼게요. 이 초코송이를 하나 먹고 괜찮으면 출발하는 거에요. 알았죠?"
이미 약간씩 움직이고는 있었기 때문에 그냥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초코송이를 하나 줘봤다. 딱 하나. 그걸 앉아서 씹던 시윤이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토하꺼 가따아아아"
서둘러 손을 잡고 화장실로 가려는데 시윤이의 안면 근육이 빵빵해졌다. 난 급히 두 손을 모아 시윤이의 턱 아래에 갖다 댔다. 나이아가라 폭포가 그런 모습일까. 작은 입에서 많이도 쏟아져 나왔다. 아내가 급히 싱크대에 있던 물받침을 가지고 와서 내 손 아래에 받쳤다. 난 내 손 가득 담긴 내용물을 유심히 살폈다. 아내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서윤이를 배에 품었을 때처럼 우엑거렸다. 그 뒤로도 계속. 우엑 우엑. 아내도 토할 판이었다. 다행히도 난 이런 쪽으로는 (적어도 내 새끼에 한해서는) 비위를 논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아무렇지도 않다.
시윤이의 토사물을 보고 바로 원인을 찾아냈다. 제대로 씹지 않고 넘긴 귤 몇 알(합쳐보면 귤 한 개 정도)이 도로 넘어왔다.
"여보. 얘 귤이 얹혔네. 그대로야 그대로. 안 씹고 삼켰네"
시원하게 토하고 난 시윤이는 바로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까는 몇 번을 괜찮냐고 물어봐도 안 괜찮다고, 토할 거 같다고 대답하던 녀석이 토하고 나서 물었더니 아무렇지도 않고, 괜찮아졌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시윤이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그 뒤에도. 쭉.
"우와. 소윤아, 시윤아. 이제 여행 가자. 소윤이랑 시윤이도 신나?"
"그럼여. 당연하져"
사실 내가 제일 신났다.
"여보. 그런데 우리 장소가 어디였지? 강릉이었나?"
"어"
"멀긴 머네"
숙소를 위주로 고르다 보니 '너무 멀지 않은' 조건을 포기하게 됐다.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지만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금요일 퇴근하고 바로 짐 챙겨서 떠나는 여행이라니.
심지어 가는 길도 수월했다. 이제 소윤이와 시윤이는 그 정도 장거리, 장시간 여행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듯, 즐겼다. 인생 최장 거리, 시간을 차에서 보낸 서윤이도 마찬가지였다. 즐겼는지는 모르겠는데 밤잠 시간과 겹쳐서 가는 내내 잤고 숙소에 도착해서도 수유했더니 곧바로 다시 잠들었다(어둠 속에서 혼자 촵촵대고 옹알거리는 걸 듣는 게 요즘 아내와 나의 또 하나의 낙이다).
여기도 육아, 저기도 육아, 온 천지가 육아면 어떠하리. 피할 수 없으면 즐기면 되거늘. 일탈 육아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