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건국일

20.07.14(화)

by 어깨아빠

아내와 만난 지, 공식으로 연인이 된 지 11년 되는 날이다. 나의 선제적인 고백과 아내의 대승적인 수용이 조화를 이룬 11년 전 오늘 덕분에 소윤이, 시윤이, 서윤이가 있는 거다. 그러니 나름 의미 있는 날이다. 결혼 전까지는 가장 큰 기념일이었고. 나라로 치면 건국일 같은 거다.


결혼하고 나서도 아무것도 아닌 날처럼 그냥 지난 적은 없었다. 이걸 핑계 삼아 야식을 먹기라도 했다. 매년 반복되는 기념일이지만 매년 새롭다. 우리에게는 아이들이 있으니까. 매년 자라고 성장한 아이들을 보며 옛날을 회상한다. 올해는 없던 존재까지 새로 생겼고.


신촌역 2호선 투썸 플레이스 앞에서 처음 만나 소개팅을 하고 2달 뒤 다시 같은 자리에서 연인이 된 것을 기념했던 두 사람은 이제 없다. 젊음의 절정을 지나 급격히 늙어가는 애 셋의 엄마, 아빠가 있다. 아내는 이제 나를 오빠라고 부르지 않고, 나도 아내를 가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여보가 되었다.


우리의 일상도 커플 기념일 따위를 챙기기에는 너무 역동적이다.


[와 진짜 나 폭발함]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과연 무엇 때문일까 궁금했다. 참 신기한 게 문자에서도 기운이라는 게 느껴진다. 아마 11년 동안 주고받은 문자로 인해 수많은 데이터가 쌓였기 때문일 거다. 아내의 카톡은 '화가 나긴 하는데 진짜 극도로 짜증이 나고 열받아서 어찌할 줄 모르는' 상태는 아니라는 걸 말해줬다. 아마 그랬다면 이렇게 보냈을 거다.


[하아. 여보. 나 진짜 너무 짜증 나. 진짜 너무 싫다. 진짜. 어떻게 해야 돼. 하아]


하긴 그러고 보니 아내는 이미 폭발했다고 말했네. 보통 폭발을 참다가 참다가 못 참을 거 같을 때 보내는 카톡이 주로 후자에 가깝다. 물론 헛다리일지도 모른다. 진짜 극도로 짜증이 났지만 참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유는 시윤이었다. 한참(진짜 한참) 동안 우는 서윤이를 안고 달래서 겨우겨우 재우고 방에 눕혔는데 시윤이가 문을 쾅 열고 들어와서 시윤이가 깼다. 아내는 방에 들어가기 전에 그러지 말라고 말도 미리 했는데. 시윤이는 '보란 듯이' 소음을 만들었다.


지나가는 육아인 100명을 붙잡고 언제 가장 화가 나냐고 물어보면 BEST 3 안에 반드시 있을만한 상황이다. 혹시나 자신의 배우자가 이런 상황에서도 웃으며 인자하게 아이를 대한다면 그분께 잘하시라. 엄청난 성품의 소유자 거나 그때 참은 화가 본인에게 돌아올 것이니.


[하지만 괜찮음. 다행히 서윤이 다시 잠들어서 재우고 나옴]


이런 게 바로 결과주의 육아. 시윤아 너 살았다.


아내가 보내주는 낮 시간의 사진들이 건조한 사무실 생활에 찌든 나에게 큰 힘이 된다. 요즘은 점점 눈빛이 선명해지고 또렷해지는 서윤이를 보는 재미까지 더해졌다. 아내가 뜨거운 사투를 벌이는 대신 난 낭만에 젖어 아이들을 그리워한다.


아내는 요즘(이라고 해 봐야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빵을 멀리하고 있다. 유선염에 제일 안 좋은 게 빵이라고 해서. 밀가루에 달고, 짜고.


[여보. 진짜 먹을 게 없다. 인생의 즐거움이 없다]


아내에게 빵은 이 정도 무게다. 인생의 희비를 논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다. 그러면서 아내는 자연스럽게 [카페 마마스] 이야기를 꺼냈다. 파니니와 리코타 치즈가 먹고 싶다고 했다. 날이 날이니만큼 아내의 욕망에 호응하며


[원해요?]


라고 카톡을 보냈다. 아내는 거절도 수긍도 아닌 애매한 답을 보냈다. 퇴근하기 전에 다시 한번 물어봤다. 아내는 그냥 집에서 밥을 먹자고 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꽃집에 들러 꽃을 한 다발 샀다. 삭막하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삭막하게만 느껴질 육아 생활에 등장하는 기념일은 그 삭막함을 걷어낼 아주 좋은 기회다. 아내처럼 한 송이 꽃에도 금방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소윤이와 시윤이는 신이 나서 낮에 엄마와 나갔을 때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들을 얘기했다. 매일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너네 진짜 행복한 거야. 엄마랑 시간을 그렇게 많이 보내다니"


라고 말해주고 싶다. 좀 더 크면 자연스럽게 느끼겠지만. 아내에게도 마찬가지고. 나에게도 마찬가지고. 이때가 얼마나 행복했고 소중했는지 나중에 이 일기를 보는 모두가 추억하기를.


저녁은 김치볶음밥이었다. 정말 맛있게 먹었다. 나도 애들도. 더 있었으면 더 먹고 싶었는데 없었다. 다 먹은 그릇을 정리하면서 아내는 나한테 얘기했다.


"와. 진짜 배부르다. 오늘은 평소보다 밥을 조금 더 많이 넣었거든. 한 공기 정도? 평소에 볶음밥 하면 항상 뭔가 부족한 거 같아서 오늘은 좀 넉넉하게 했더니 엄청 양이 많네. 여보도 배부르지?"

"어? 어. 어. 그냥 엄청은 아니고"


맛은 이연복, 백종원 씨가 만든 김치볶음밥 같았는데 양은 마트 푸드코트에서 파는 6,500원짜리 정도라고 느꼈다. 당황했다. 아내의 확신에 찬 질문에.


오늘은 서윤이도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음, 물론 모유. 소윤이와 시윤이, 내가 저녁을 먹을 때 서윤이도 수유를 했다. 보통 저녁 식사가 끝나고 잘 때까지 버텼다가 수유를 하면서 재우는데, 오늘은 드문 시도였다(처음은 아니었지만).


먼저 수유를 마친 서윤이는 바닥에 내려놓자 몸을 부르르 떨어가며 울었다.


"안아라악!!!!!! 안으라고옥!!!!!!"


이렇게 우는 거 같았다. 허리의 고통을 참고 서윤이를 안았다. 조금의 공백도 없이 안자마자 울음을 그쳤다. 차마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자려고 다 함께 방에 들어갔을 때 서윤이도 아기 침대에 눕혔다. 아까처럼 정말 시끄럽고 정신이 쏙 빠지게 울었다. 이대로 실패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다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쫩쫩대는 소리가 좀 나더니 '히잉 히잉' 이러고는 잠들었다. 하긴 니 언니, 오빠도 잠은 잘 잤다. 머리가 좀 크고 나니 낮잠을 안 자서 그렇지.


아내는 커피를 사러 나가겠다고 했다. 아내에게 차에 가서 텀블러도 좀 챙겨달라고 부탁했다. 텀블러는 거들 뿐, 거기에는 꽃다발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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