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5(수)
아침에 일어났는데 식탁에 웬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자를 열어보지도 않은 건 물론이고 멀리서 보자마자, 그게 뭔지 알아차렸다. 평소에 내가 갖고 싶은 (그냥 소유해 보고 싶은) 노트북이 있었는데, 아내가 어제 '만약에 나중에 사게 되면 어떤 색을 사고 싶냐'라고 계속 물어봤었다. 설마 당장 사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게 식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새벽에 화장실 가느라 깼을 때, 아내는 그때까지도 잠을 안 자고 있었다. 굉장히 이례적인 풍경이라 깜짝 놀라며
"안 자고 뭐해?"
라고 물었더니
"그냥. 잠이 안 와서"
라고 답했는데, 이것 때문이었나 싶기도 했다.
아내의 선물 상자 위에는 소윤이의 편지도 함께 놓여 있었다.
[36 생신 아빠에게. 아빠 생신 축드(ㄷ자가 거꾸로)려요 ♥︎ 사랑해요 ♥︎]
그 밑에는 찰흙과 이름 모를 자그마한 블록 같은 걸로 내 이름 석 자를 붙이고 꾸며놨다. ㄷ자를 거꾸로 쓰고 '하' 자를 빼먹은 것이 눈에 띄며 '소윤이가 요즘 한글 공부를 좀 안 했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려고 하는 걸 애써 밀어내고, 이걸 쓰며 기뻐하고 뿌듯했을 소윤이를 떠올렸다. 안 그래도 어제 퇴근했더니 자기가 먼저
"아빠. 저기 책장에 하얀 책 위에 있는 하얀 봉투는 보면 안 된다여"
라고 먼저 말했다. 귀여운 녀석. 시윤이 놈은 아빠의 생일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아내는 아침에 일어나서 축하도 해주고 나의 반응도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저녁은 밖에서 먹기로 했다. 아내의 원래 계획은 집에서 미역국 끓여서 먹는 것이었지만, 내가 산다는 말에 바로 외식을 결심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퇴근 시간이 맞춰 회사 근처로 나오기로 했다.
남편과 아빠의 생일이어도 주인공 없는 집에서 보내는 이들에게는 다른 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요일일 뿐이다. 아내는 매트리스 위에서 잠든 서윤이의 사진을 보내며 이렇게 얘기했다.
[내 자리가 저 옆이었는데. 아쉽다]
요즘 이럴 때가 많다. 서윤이 재우러 들어간 김에 애초에 의도를 가지고 좀 눈을 붙이거나, 아니면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도 막상 재우다 보면 잠이 들거나. 소윤이와 시윤이는 그걸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서윤이가 잠들었으니 엄마는 나와야 한다면서 옆에 와서 깨우거나 아내가 나름 수를 써서 애들을 밀어내도, 아내가 더 이상 잘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 이를테면 똥이 마렵다거나, 목이 마르다거나, 배가 고프다거나 이런 본능의 욕구를 들먹이며 아내를 일으킨다. 하루에 낮잠이 한 시간, 두 시간 정도만 보장되어도 육아하는 엄마의 삶의 질이 훨씬 높아질 텐데.
아내는 시윤이도 재웠다고 했다. 대놓고 낮잠 자라고 하면 싫다고 하니까 '잠깐 누워서 눈만 감아볼까'라고 하면서 유인책을 썼더니 금방 잠들었다고 했다. 어느새 누나보다 팔과 다리가 두꺼워졌지만, 애기다 애기. 시윤이를 볼 때마다 '언제쯤 안 귀여워질까' 생각해 본다. 그런 날이 오지 않으면 좋겠지만, 언젠가는 나처럼 산적 같은 놈으로 자라겠지.
잠시 후에는 놀랍게도 소윤이가 잠든 사진까지 도착했다. 아내에게 안아달라고 하더니 금방 잠들었다고 했다. 소윤이는 아침부터 비염이 엄청 심했다. 쉴 새 없이 콧물이 흘렀다. 지난주 휴가가 너무 피곤했나 싶기도 했다. 갔다 와서는 좀 잠도 푹 자고 그러면 좋을 텐데, 오히려 아침부터 일어나서 나를 배웅하고 그랬으니 피로가 풀릴 틈이 없기는 했다.
어쨌든 저녁을 바깥에서 먹기로 했는데, 누군가 졸려서 짜증 내고 징징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비가 많이 와서 걱정했지만 아내는 무사히 사무실까지 왔다. 회사 근처에 있는 베트남 쌀국수 집으로 갔다. 가 본 곳은 아니었고 검색하다 보니 평이 좋길래. 애석하게도 유모차 입장 불가였다. 공간이 그렇게 좁은 것도 아니고 사람이 꽉 찬 것도 아니고, 구석 자리에 앉으면 통행에 방해도 안 될 거 같았다. 그래도 정해진 규칙이 그러하다니 별말 않고 들어갔다. 서윤이는 내가 안고 먹기로 했다. 아내는 자기가 안고 먹겠다고 했지만 난 역시나 거절했다. 아내는 멀티태스킹이 안 되지만 난 가능하니까.
서윤이가 아빠 생일인 걸 아는지 나를 자꾸 일으켜 세웠다. 앉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잠이 든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붙이면 번쩍 눈을 떴다. 물론 울었고. 그래도 난 꿋꿋하게 잘 먹었다. 아주 즐겁게, 맛을 음미하면서. 물론 시간이 갈수록 야박하게 '유모차 입장 불가' 방침을 정한 사장님(누군지는 모름)이 원망스럽기는 했지만. 소윤이와 시윤이도 아주 잘 먹었다. 소윤이는 콧물이 너무 줄줄 흘러서 힘들어했다. 전형적인 비염의 증상이기는 했는데 너무 심했다. 코는 꽉 막혀 있고, 바깥으로는 흐르고. 하도 닦아서 코밑이 아프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낮잠까지 잔 것치고는 뭔가 내가 아는 소윤이의 '가장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말과 행동, 혹은 그 공백 사이에 '고단함'이 느껴졌다.
서윤이가 생일 선물이라고 자기를 실컷 안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근처의 카페에 잠시 들렀다. 여기서도 소윤이는 뭔가 '최상'이 아니었다. 나나 아내만 느낄 수 있는 미세한 차이였다. 기분이 좋지 않거나 우울한 건 아니지만 평소보다 뭔가 쳐지는 기운이 느껴진달까. 비염이 너무 심해서 많이 힘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혹시라도 감기나 몸살의 전조증상일까 봐.
아내가 선물한 노트북도 좋았지만 소윤이가 서툰 글씨로 써 준 편지도 좋았고, 아내와 아이들이 내가 있는 곳인 생소한 동네로 와서 함께 저녁 먹고 커피 마신 것도 좋았다. 아이 셋과 함께하는 생활을 너무 미화하는 거 아니냐고 항의를 받을지도 모르지만, 좋은 건 좋은 거니까. 가치의 무게를 어디다 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런 게 진짜 행복이지 싶다.
집에 도착하니 10시가 넘었다. 서둘러 애들을 씻기고 재웠다. 아내가 애들을 재우는 동안 난 아내가 선물한 노트북을 음미하며 며칠 뒤면 익숙함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질 기쁨을 만끽했다. 소윤이가 써 준 편지도 다시 한번 보고.
36번째 생일, 꽤 행복했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