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03(토)
* 주의사항
1. 육아일기 없음
2. 글 쓸데없이 김
3. 쏠쏠한 여행 정보 없음
새벽부터 뭘 하는지 옆방 여자가 내는 굉음에 잠이 깼다. 일찍부터 나갈 준비를 하는 건지 아무튼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침대에 누워서 한참 동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오늘은 또 어디를 가볼까 고민하면서.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아침의 게으름을 한껏 만끽하면서.
어제 버스 타려고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독립 서점이 한 곳 있었는데, 토요일은 문 여는 시간이 오후 1시였다. 문 여는 시간이 될 때까지 테라로사에 가서 머물기로 했다. 밀린 글도 좀 쓰고. 숙소에서는 11시가 거의 다 되었을 무렵에 나왔다. 숙소 바로 앞에 [대도호부관아] 라는 곳이 있었다. 찾아보니 고려 시대 지방행정기관이었다. 뭐 지금으로 치자면 도청쯤 되려나. 거기서 무슨 행사를 하고 있었다. 강원도 소재의 장애인 단체, 복지 단체, 사회단체 등이 연합해서 주최하는 행사였다. 막 행사가 시작했을 때라 굉장히 분주하고 어수선했다. 한 바퀴 슥 둘러봤는데, 나 같은 여행객이 관심을 가질만한 부스는 없었고, 애초에 그런 행사도 아니었다. 아, 딱 한 곳. 먹거리 부스에서는 좀 기웃거리고, 먹을 걸 사기도 했다. 김밥과 소떡소떡을 각각 1,000원씩 주고 샀다. 이게 오늘 나의 브런치 메뉴. Rice with Gim & Grilled Sausage, Dduk. 식권을 사면서 보니 식권 교환해 주시는 분도 약간의 장애를 가지고 계셨다.
아침 겸 점심 식사를 마치고 테라로사로 향했다. 찾아보지도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원래 강릉의 테라로사로 유명한 곳은 아마 따로 있을 거다. 거기가 테라로사의 본점일 거고. 엄청 많은 사람이 몰릴 게 뻔했다. 또 제주를 비롯해 여러 곳의 테라로사를 가 본 결과, 어차피 거기서 거기라는 결론을 가지고 있었다. 본점이라는 특수성이 있기는 했어도 과감히 포기했다.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갈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대신 숙소 근처의 테라로사 임당점에 가기로 했다.
테라로사 임당점은 울산의 성남동, 일산의 라페스타와 비슷한 분위기의 거리 한 편에 조그맣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야말로 로드샵의 느낌이었다. 매장 안은 다른 테라로사랑 다르지 않았다. 커피 맛도 비슷하고. 처음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었는데 약 2시간 남짓 머무는 동안 많아졌다. 중간에 소윤이만 한 여자 아이와 부모가 들어왔는데, 들어오자마자 매장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다가 결국 엄마한테 끌려 나가서 호되게 혼났다. 밖으로 왜 끌고 나갔을까 싶을 정도로, 바로 문 앞에서 다 들릴 정도로 호되게 혼내고 혼나는 모녀의 모습이 전혀 생소하지 않았다. 그 가족은 순식간에 커피를 마시고 30분도 안돼서 퇴장했다. 소윤아, 오겡끼데쓰까.
원래 [독립서점 하루]의 문 여는 시간인 1시쯤 나가려고 했는데 한 시간 정도를 더 머물렀다. 토요일 오전에 혼자 카페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여유와 호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내가 보내준 동영상에는 장인어른이 나 대신 소윤이, 시윤이의 놀이터가 되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어주고 계셨다. 겨우겨우 무르익은 여유로움을 정리하고, 서둘러 발길을 옮겨 서점으로 갔다. 띠로리. [독서대전에 참가해요. 월화 거리로 오세요]라는 쪽지가 붙은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사실 독립서점을 가본 적은 없다. '한 번 가보고 싶다' 이런 생각은 있었는데 어디 있는지 알아보고 찾아갈 정도의 열정은 없었다. 여행 왔는데 마침 가까운 곳에 있으니 가보고 싶었던 거다. 막상 문이 닫혀 있으니 아쉬웠다. 월화거리를 찾아갔다. [인문독서대전]이라길래 나름 기대를 안고 찾아갔는데 특색 있는 행사는 아니었다. 독서대전이라고 하기에는 책과 상관없는 부스가 너무 많았다. 같은 모양, 같은 색, 같은 크기의 천막을 일렬로 쭉 세워 놓은 것도 재미없었고. [하루]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는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106호든 206호든 306호든 어디를 들어가도 비슷한 구조와 모양이라 굳이 궁금하지 않은 것처럼, [하루]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독서대전에 어울리지 않는 여러 부스 중에 액세서리를 팔거나, 각종 핸드메이드 제품을 파는 곳들이 있었다. 거기서 소윤이랑 시윤이 마스크를 하나씩 사고 소윤이 머리핀도 하나 샀다. 소윤이 마스크와 핀은 모두 소윤이가 좋아하는 핑크색으로. 자동차를 좋아하는 시윤이를 위해 자동차 무늬가 들어간 마스크를 찾았지만 없었다.
이거 없었으면 독서대전 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거다
인문 독서대전이 안겨준 소득은 소윤이, 시윤이 선물 말고도 또 있었다. 월화거리라는 곳이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것. 그리고 월화거리가 강릉중앙시장 바로 옆이라는 걸 알려준 것. 원래 중앙시장에는 이따가 밤에 올 생각이었는데 기왕 온 김에 구경이나 하고 가기로 했다. 사람이 엄청 많았다. 닭강정 가게의 호객 행위가 어마어마했다. 가장 큰 가게로는 [명성 닭강정], [배니 닭강정] 이렇게 두 개가 있었고, 나란히 위치하고 있었다. 명성 닭강정은 젊은 남자 청년들이, 배니 닭강정은 아주머니들이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두 가게 모두 손님들이 많았다.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이번 강릉 여행의 나름의 철칙이 하나 있었다.
'줄 서서 먹는 곳은 가지 말자'
[강릉 맛집]을 검색해보면 주로 나오는 곳들을 오며 가며 마주치기도 했는데 대부분 입장을 기다리는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중앙시장에도 여러 곳이 있었다. 닭강정 가게, 아이스크림 호떡 가게, 꼬치어묵 가게, 야끼도리 가게 등등. '나는 My way 다'라는 심정으로 나만의 맛집을 찾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었다. 원래는 아침 겸 점심만 먹고 나중에 저녁을 먹으려고 했는데 구경하다 보니 출출해졌다. 간단한 간식으로 먹을 만한 게 없을까 살펴보다가 [녹두전] 세 글자가 눈에 박혔다. 전을 파는 집은 무지하게 많았다. 그중에 전 부치는 곳이 밖에 나와 있고, 그 앞에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고, 녹두전을 판매하는 곳이 한 곳 있었다. (물론 다른 곳도 더 있었을 거다) 착석했다.
"사장님, 녹두전 한 장 주세요"
포장되어 있던 녹두전을 꺼내시더니 기름을 두르고 더 부쳐 주셨다. 꽤 기다리고 나서 녹두전이 내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먹기 좋게 조각내 주신 녹두전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입에 넣고는 혼자 백종원에 빙의해서 팔짱 기고 맛을 음미했다.
"음, 이거 재밌네?"
"음, 이거 기가 막히네"
입 밖으로 내지만 않았지 마음속으로는 백종원 놀이를 계속했다. 첫맛은 밍밍했는데 먹다 보니 나름 녹두 향도 가득하고 괜찮았다. 두툼해서 배도 찼다. 나 홀로 여행의 최고의 단점은 뭐든 여러 가지를 맛보기 힘들다는 거다. 둘이 왔으면 하나라도 더 시켜서 두 가지를 맛볼 수 있을 텐데 혼자 오면 그게 안 된다. 물론 나 혼자여도 전 두세장이야 끄떡없지만, 혼자 두 개 시키면 괜히 돈도 아깝고 탐욕의 노예가 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전까지 먹고 나니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기름기 가득한 전을 먹고 나니 뭔가 마시고 싶었다. 제대로 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기는 힘들 것 같아서 이례적으로 다른 음료를 선택했다. 월화 거리(풍물시장)에 늘어선 푸드 컨테이너 중 한 군데에 가서 00 라임모히또를 사 마셨다.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 목적지는 경포대로 정했다. 그래도 강릉에 왔는데 강릉의 상징인 경포대는 봐야 하지 않겠어?라는 마음의 소리를 따르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30여분 정도 이동했다. 이번 강릉 여행을 하며 느낀 건데 강릉도 버스로 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시내 근처는 꽤 많은 노선이 오가고 있고, 멀리까지도 운행하는 버스들이 있어서 얼마든지 버스로 움직일 수 있다.
경포대 버스 정류장에 내리니 먼저 경포호가 보였다. 장관이었다. 여행 감성이 묻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봤던 호수 중에는 가장 아름답고 운치 있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크로스백만 아니었어도 당장 자전거를 빌려서 좀 달렸을 거다.
호숫가에 있는 벤치에 한참 동안 앉아서 경치를 감상했다. 특별한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뭔가 생각하고 싶었는데 오히려 어떤 생각도 머리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산만하게 흩어졌다. 그러고는 바로 옆, 경포해변으로 걸음을 옮겼다. 역시, 바다는 동해바다다. 동해바다 특유의 시원시원한 맛과 바다스러움은 다른 바다가 따라갈 수가 없다. 구명조끼를 입고 모터보트를 타는 사람들이 참 재밌어 보였다. 얼마나 하나 가까이 가서 봤더니 제일 싼 게 40,000원이었다. 한 사람에 40,000씩이나 줘야 하는 걸 이렇게 많은 사람이 탄다는 게 신기하게 여겨졌다. 어떤 할아버지가 보트 주인에게 가서 묻는 소리가 들렸다.
"이거 얼마예요?"
"5명에 40,000원이에요"
할아버지는 아쉬워하셨다. 사모님도 함께 계셨다. 슬쩍 다가가서 함께 타시려고 묻고, 두 명 정도를 더 찾아볼까 고민했지만 보트 주인아저씨가 퇴근 채비를 하고 계셨다. 산책로 끄트머리에 앉아 또 한참 동안 바다와 풍경을 감상했다.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들과 캐치볼을 하는 아저씨가 있었다. 축구모임에 가면 대학생 아들과 함께 축구하러 오시는 분이 몇 분 있는데 참 좋아 보인다. 기왕이면 시윤이가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보는 거든 하는 거든.
경포대와의 짧은 만남을 마치고 다음 목적지로 가기 위해 일어섰다. [참깨책방 깨북]이라는 곳이었는데, 역시나 독립서점이었다. 마치 내가 독립서점 매니아인 것처럼 보이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음을 다시 한번 알린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어떤 곳이고, 뭘 파는 곳인지.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갈아타는 곳에 내려서부터는 그냥 걸어갔다. 한 30분 정도를 걸었는데 역시 여행은 걸어야 맛이다.
마감시간 1시간 전쯤 서점에 도착했다. 자그마한 규모의 서점이었는데 독립출판물 위주로 전시/판매하고 있었다. (전부 독립출판물인지, 정확히 독립출판물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지식이 없어 확신할 수는 없다) 재밌었다. 어딜 가나 똑같은 책, 똑같은 출판사의 책들이 비슷한 모양으로 구매를 강요하는 듯한 대형서점 하고는 확실히 달랐다. 어떤 책들은 '이게 책이야?' 싶은 책들도 있었다. 생각지도 않은 지출을 감행했다. 엽서북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산 것 중 하나인 [우리 딸]을 예로 들자면, 딸에게 해줄 만한 이야기(한 줄)와 그림이 각 페이지마다 있고, 마지막에는 편지를 쓸 수 있도록 공간이 마련된 그런 책 (설명할수록 미궁에 빠져드는 느낌이다) 두 권(우리 딸/우리 아들 각 한 권씩)을 사고, 아내에게 줄(쓸) [사랑해]를 샀다. 육아일기가 기록된 책도 한 권 샀다.
첫 독립서점 나들이었는데, 우리 동네 혹은 가까운 곳에도 이런 곳이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예외 없이 자본에 잠식되어 그 논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출판업계에서 훨씬 신선하고 덜 길들여진 창작물을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명확한 곳이었다. 물론 수익이 동반되지 않는 꿈이나 목표를 얼마나 더 지속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안타까웠다. 그래도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바보처럼 현실을 등지고 꿈과 이상을 좇는 비이성적인 작가들도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굳이 현실을 등지지 않고도 꿈과 이상을 쫓아갈 수 있으면 더 좋을 거고.
다시 버스를 타고 중앙시장으로 이동했다. 저녁을 먹기 위해서였다. 단지 저녁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나에게는. [광덕식당] 이라는 꽤 유명한 곳에서 국밥을 먹을 생각이었다. 소머리국밥 골목이 따로 있었다. 골목 어귀에 들어서자 특유의 돼지 비린내가 코 끝을 강타했다. 이건 시장에서만 맡을 수 있는 냄새인데, 한두 개의 가게로는 불가능하고 그야말로 '골목'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의 많은 가게들이 동시에 뿜어내야 느낄 수 있는 강렬한 돼지 비린내였다.
'그래. 바로 이거지. 이게 진짜지'
아마 아내랑 함께 있었으면, 아내는 바로 코를 막았을 테고. 괜찮냐는 나의 물음에 괜찮아라고 의례적으로 답하지만, 몇 분 뒤 헛구역질을 했을 거다. 그럼 나는 나가자고 하고서 파스타 집을 찾았겠지.
"나도 돼지국밥 먹을 수 있어. 냄새 안 나면"
이라고 말하는 아내의 말이, [나도 요거트 좋아해, 시큼하지만 않으면], [나도 치즈 좋아해, 구린내만 안 나면]이라고 말하는 거랑 도대체 뭐가 다르냐고 생각하는 나에게 오늘 저녁은 치유였다.
"소머리 국밥 특으로 하나 주세요"
가장 돼지 냄새가 진하게 나는 소머리국밥을 주문했다. 노키즈존에서 누리는 여유로움 못지않게, 노가영존에서 누리는 누린내의 짜릿함을 한껏 만끽했다. 또 혼자 백종원 놀이하면서 팔짱 낀 채 국밥을 음미하고 분석했다. 어제 주문진이 이번 강릉 여행 장소 부문 MVP였다면, 오늘 소머리 국밥은 이번 여행 먹거리 부문 MVP였다.
아내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내가 하루에 세끼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이 돈까스 말고도 또 있다. 국밥류. 해장국밥, 순대국밥, 돼지국밥 등등. 그렇게나 좋아하는데 결혼하고 아내랑 같이 먹은 건 두어 번 정도밖에 안되니 내 안의 욕망이 얼마나 가득하고 숙성됐겠나.
* 수정사항 *
내가 먹은 건 소머리 국밥이었고, 내가 맡은 건 돼지 누린내였는데. 어찌하여 소머리 국밥에서 돼지 누린내가 난다고 생각했을까. 너무 흥분하여 소머리국밥을 먹으면서도 돼지국밥을 먹고 있다고 착각했나 보다. 골목에 진동하는 돼지 누린내에 흥분해서 잠시 환각에 빠져 있었던 듯. 이 글을 쓸 때까지 난 돼지국밥을 먹고 왔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먹으면서도 돼지국밥에 들어간 고기가 왜 이렇게 부드럽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소였구나 0.0
아무튼 광덕식당은 소머리국밥을 비롯해, 순대국밥, 닭국밥, 내장국밥 등을 파는 가게임.
(왜 소머리국밥에서 돼지 냄새가 나느냐는 김기글 님의 질문 및 제보로 인해 오류를 발견하게 됐음. 읽는 이로 하여금 혼란을 유발한 점 사과드립니다.)
다 먹고 나와보니 시장거리 한쪽에서 작은 공연을 하고 있었다. 무슨 공연인가 싶어서 가 봤는데 [상인 여러분, 힘내세요]가 캐치프레이즈였다.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개최되는 공연 같았다. 내가 막 갔을 때는 누가 봐도 가수 박상민을 따라한 게 느껴지는 한 가수가 한껏 성대를 긁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가수가 내려가고 힙합 듀오 한 팀이 올라왔다. [챠밍키즈]라는 팀이었는데, 내가 보기에 아직 군대도 안 갔다 왔을 만큼 어려 보였다. 사람이 많지도 않았는데 그나마도 온통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들 뿐이라 고전하겠다고 생각했다. 힙알못이지만 생각보다 잘해서 놀랐고, 진짜 즐기는 것 같아서 놀랐고, 공략 불가능해 보이는 관객층을 잘 휘어잡아서 놀랐다. 자작곡도 한 곡 보였는데, 괜찮았다. 기분이 좋았다. 나에게서는 점점 소멸되어가는 종류의 기운이 그들에게는 가득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나중에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오게 되면 한 표 던지겠노라고 혼자 약속했다.
잠시 숙소에 들러 샤워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어제 그 여자는 퇴실하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온 것 같았다. 남은 방이 두 개였는데 두 방에 모두 사람이 찼다. 신발이 네 켤레인 걸 보고 추측했다. 숙소에서 나와 숙소 근처의 카페로 갔다. 그냥 대로변의 평범한 위치에 있는 카페인데, 어제 보니 늦게까지 영업을 하고 있었다. 늦게까지 머물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들어갔는데 생각보다 분위기가 좋았다. 분위기만큼이나 커피 맛도 평균 이상이었다. 카페에 앉아 아까 산 엽서북에 열심히 편지를 썼다. 소윤이, 시윤이가 혹시라도 아빠를 더 이상 볼 수 없을 때 이 편지를 보고 아빠를 추억하거나, 아빠의 생각을 엿볼 수 있도록. 다소 유언의 느낌을 가미해 썼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느라 초벌로 따로 써놓고, 옮겨 적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채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
원래 아내한테도 편지를 쓰려고 했는데 그건 손도 못 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과자 한 봉지를 샀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라디오스타를 보며 과자를 먹고,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