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와 야근

20.08.12(수)

by 어깨아빠

[여보. 아침부터 은혜가 필요합니당]


아내의 첫 카톡이었다. 이렇게 보내면서 기도를 해달라고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서로 툴툴대며 티격태격하는 걸 참 보기 싫은데 서윤이는 상대적으로 너무 예쁘다고 했다. 그 대상이 누구든, 그게 자녀라 할지라도, 아니 자녀라면 더더욱. 사람에 따라 사랑과 미움이 나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그런 마음이 드는 것까지야 막지 못하겠지만, 그대로 두느냐 밀어내느냐는 의지의 문제다. 나도 그렇다. 서윤이를 보고 있으면 오만 걱정과 피로가 말끔하게 풀린다. 물론 소윤이와 시윤이도 사랑하지만 얘네는 가끔씩 피를 뜨겁게 만들 때가 있을 뿐.


소윤이는 새벽 5시부터 깨서 바스락거리고 방을 들락날락했다. 이러다 또 아플 거 같았다. 아무리 잠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새벽 5시가 말이 되나. 오늘만큼은 정말 소윤이를 위해 선한 의도의 압박을 가했다.


"소윤아. 얼른 누워서 자. 오늘 아침에 다시 못 자면 오늘은 낮잠 자야 돼"


출근하면서부터 소윤이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왠지 그렇게 해야만 할 거 같았다. 안 그러면 또 탈이 날 거 같았다. 대신 재우고 말고는 아내에게 맡겼다. 입법(?)은 내가 했어도 현장에서 적용하는 건 아내니까. 낮잠 재운다고 괜한 씨름을 할까 봐 힘들면 꼭 안 재워도 된다고 했다.


오후 늦게 아내가 애들 사진과 함께 카톡을 보냈다.


[축 야근]


아내가 보낸 사진은 소윤이와 시윤이, 서윤이가 모두 자는 사진이었다. 소윤이는 1시간 20분, 시윤이는 1시간 40분을 잤다고 했다. 이것도 꽤 놀라운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건 소윤이, 시윤이, 서윤이가 동시에 잤다는 거다. 덕분에 아내는 1시간 남짓한 시간을 고요 속에서 혼자 보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달콤한 시간이었을 거다. 아내가 구한 은혜가 이런 식으로 응답 된 건가.


아내의 말대로 야근을 피할 길은 없었다. 아내에게 오늘도 회사 근처로 나오겠냐고 물어봤는데 이미 아내의 친구가 집에 왔다고 했다. 애들을 데리고 잠깐이라도 나갔다 와야겠다고 생ㄲ하며 퇴근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오랜만에 집에 놀러 온 이모(아내 친구)와 이모의 아들(4살)이 반가웠는지 엄청 들뜨고 흥분한 상태였다.


아니나 다를까 소윤이는 아내에게, 낮잠을 잤으니 밤에 아빠랑 놀아도 되겠느냐고 물어봤다고 했다.


"그래. 소윤아. 밥 먹고 아빠랑 나갔다 오자. 엄마는 서윤이 재우라고 하고"


저녁 먹고 꽤 늦은 시간에 밖으로 나갔다. 그냥 '산책'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도 미리 말해줬다. 그래도 기쁘게 따라나섰다. 밤공기가 좀 시원하면 더 기분이 좋았을 텐데 그야말로 사우나 같았다. 두 녀석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 계속 생각했다. 산책이기는 하지만 바로 집에 돌아가면 그건 너무 야박하니까. 마침 생일 때 받은 기프티콘이 떠올랐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먹을 아이스크림 두 개, 집에 가서 아내에게 줄 아이스크림 한 통을 샀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잘 먹었다. 짧아서 성에 차지 않을 산책 시간에 작은 위로였을 거다.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시윤이가 업어 달라고 했다. 시윤이는 놀이터에서 아파트 건물 입구까지, 소윤이는 거기서부터 집까지 업고 왔다. 업으면 소윤이와 시윤이가 뭔가 애기가 된 느낌이라 기분이 좋기는 한데, 느낌일 뿐 진짜 애기는 아니니까 엄청 힘들긴 하다. 특히 소윤이를 업었을 때는 거의 이삿짐 나르는 기분이었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애들 재우고 나오니까 10시였다.


"헉. 10시라니"

"그러게. 대가가 혹독하네"


너무 늦어서 그렇지 아빠도 너네랑 밤에 놀면 좋긴 좋아. 그래도 너무 자주는 말고 어쩌다 한 번씩 만나자. 밤에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