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가림의 여파

20.09.12(토)

by 어깨아빠

아침이었는데 우중충했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는데, 쏟아지지는 않고 추적추적 내리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아침에 텃밭에 가야 했다. 비가 와서 갈까 말까 고민을 했는데 비가 그치는 모양이기도 했고, 사람 없는 오전 시간에 얼른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장비가 하나도 없었다. 특히 장화가 없었다. 막상 텃밭은 물을 잔뜩 머금고 있어서 거의 갯벌이었다.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발이 푹푹 빠졌다. 한 20-30m 정도 되는 텃밭까지 가는 동안 이미 옷이며, 신발이며 만신창이가 됐다. 그냥 오지 말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숨이 들고 날 때마다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배추 모종 두어 개 심고 다시 나왔다. 고생에 비해 너무 짧은 활동이었다. 사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갈아입을 옷 안 가지고 갔는데 누가 갑자기 물에 빠뜨린 기분이었달까.


짧은 텃밭 활동을 마치고 나서는 함께 갔던 처치홈스쿨 교감 선생님 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이것도 원래 그럴 계획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분위기가 그렇게 됐다. 갈아입을 옷을 제공받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간단하게 물로 샤워도 했고. 덕분에 고초 아니 고생에 비하면 쾌적하게 밥을 먹기는 했는데, 무척 피곤했다. 진짜 별로 한 게 없었는데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어서 그런가, 점점 피곤했다.


저녁에는 파주에 가야 했다. 형님(아내 오빠)과 장모님의 생신 기념 식사였다. 코로나 시국이니 밖에서 먹지는 못하고 집에서 먹기로 했다. 서윤이는 역시나 낯을 가렸다. 교감 선생님 집에서도 낯을 가리긴 했다. 일단 무조건 나나 아내에게 안겨 있었고, 그 자세에서도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 다가오면 바로 울었다. 파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더 심한 느낌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그러다가도 결국 진정이 되는데 파주에서는 떠날 때까지 계속 그랬다.


덕분에 장모님과 장인어른은 서윤이를 제대로 안아 보지도 못하셨다. 뭐 눈만 마주쳐도 울어버렸으니. 거기에 오늘은 아내나 내가 안고 있어도 많이 울었다. 잘 자지도 않고, 눕혀 놓으면 울고, 안고 있어도 울고, 서서 안고 있어도 울고. 정말 오랜만에 집 안에서 아기띠를 했다. 아기띠 하기 전에 이미 팔과 허리가 끊어지도록 안고 있었다. 아내가 안고 있겠다고 했지만 평일에 지겹도록(?) 안을 텐데 주말까지 그러기가 미안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으니 엄마, 아빠의 관심이 없어도 좀 괜찮았고. 아무튼 서윤이는 정말 내내 울고, 안겨 있고, 울고, 인상 쓰고 그러다 왔다.


형님네 부부가 오고 나서는 소윤이와 시윤이가 한층 재밌어했다. 처음으로 ‘스무고개’를 했는데 의외로 시윤이도 장단을 잘 맞췄다. 얘가 정답을 정말 정해 놓고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어영부영 분위기 봐서 아무거나 정답이라고 하는 건지 의심이 되기도 했지만, 확실하게 정답을 품고 게임에 임하는 순간도 분명히 있었다. 물론 오랫동안 흥미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소윤이는 끝을 모르고 ‘더더더’를 외쳤지만 시윤이는 먼저 자기는 그만하겠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도 형님네랑 같이 왔다. 덕분에 소윤이와 시윤이는 차 안에서도 스무고개를 하느라 신이 났고, 아내는 정신을 못 차리고 졸았 아니 잤다. 아내는 서윤이가 하도 울어서 그것 때문에 더 피곤한 거 같다고 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오늘은 정말 역대 최고였다. 많이 울고, 길게 울고, 짧게 자고. 정신과 육체에 모두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그나마 서윤이라 기쁨으로 감당했을 뿐.


소윤이도 시윤이도 서윤이도 모두 피곤했지만, 그중에 으뜸은 아내였다. 파주에서 떠나기 전에 다 씻겼기 때문에 애들은 손만 간단히 씻겼다.


“여보. 여보도 아예 씻고 들어가”


오늘은 다시 나오지 말고 자라는 말이었다. 아마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했을 것 같지만. 어쨌든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잠들었다. 나는 거실에 남아서 ‘아, 조금만 쉬다가 할 거 해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조금만 쉬다 보니 피곤이 몰려왔고 졸다 깨다를 반복하며 허망한 시간을 보냈다. 그나마 소파에 앉기 전에 파주에서 가지고 온 각종 짐과 텃밭에 갈 때 입었던 옷들을 정리해 놓은 게 다행이었다(빨래를 한 건 아니고 그저 세탁기 앞에 고이 가져다 놓았다는 말이다). 그거라도 미리 안 했으면 내일 아침, 아내의 혈압이 급상승할지도 모른다.


할 걸 해 놔도 성에 안 차면 열 받고(나의 경우에는 주로 ‘설거지, 청소’ 같은 건데, 내 나름대로는 열심히 한다고 해도 높은 아내의 기준을 만족시키기 어려울 때가 많 아니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높은 아내의 기준에 비해 나의 섬세함과 기준치에 달성하고자 하는 의욕은 개미 오줌 같다), 안 해도 되는 걸 안 해 놔도 열 받고(‘건조된 빨래 개기’ 같은 게 해당된다), 할 거 같았는데 안 해 놔도 열 받고(어질러진 거실 정리 같은 거), 해야 할 걸 안 해 놓으면 당연히 열 받고(화장실 청소).


우리 집처럼 아내가 육아와 집안일을 담당하는 정도가 압도적으로 많은 경우, 자주 관찰되는 ‘육아 및 집안일과 분노의 상관관계’다. 물론 아내가 저런 걸 나에게 미주알고주알 말하며 들들 볶지는 않는다.


어쨌든 엉덩이가 접착되기 전에 최소한의 정리라도 해 놔서 천만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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