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아무 잘못이 없다

18.11.06(화)

by 어깨아빠

도저히 피로가 풀리지 않아 차를 가지고 출근했다. 시간이 줄어들 뿐 차를 가지고 출근한다고 덜 피곤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더 위험했다. 아침부터 졸음을 떨쳐내느라 아주 고생했다. 어제와 비슷한 양상으로 졸음에 허덕였다. 그래도 어제와는 다르게 오후가 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기는 했다. 아내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서 재밌게 놀고 있었다. 물론 이제 다들 홀몸은 아니고 아내를 제외한 나머지는 한 명씩, 아내는 두 명의 혹을 달고 만나긴 했지만.


퇴근하면서 헬스장에 들렀다 가겠다고 했다. 친구들이 좀 늦게까지 있을 줄 알고 그랬는데 사무실에서 막 출발할 때 이미 다 갔다고 했다.


"그럼 그냥 바로 집으로 갈까?"

"아니야. 운동하고 와"

"그래. 그래야 이따 애들 재우면 여보도 바로 운동하러 가지"


하긴 운동하고 가도 대중교통으로 퇴근하면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랑 비슷하니 아내에게도 내성이 생기기 않았을까.


요즘은 소윤이, 시윤이가 나의 퇴근을 너무 반갑게 맞아줘서 좋다. 소윤이가 좀 크면서 점점, 뭐랄까 조금 더 깊은 정을 나누는 느낌이랄까. 그런 게 있다. 대신 내가 조금만 뭐라고 해도 잘 삐지고, 서운해한다. 오늘도 밥 먹다가 살짝 위기가 있었다. 언제나처럼 꾸물꾸물 딴짓하면서 밥 먹기를 더디 하는 소윤이에게 한마디 했다. 입술을 샐룩거리면서 억지로 한 숟갈을 떠 넣은 소윤이는 그때뿐이지 조금 지나면 또 밥 안 먹고 장난을 친다. 오늘은 좀 강하게 나갔다. 소윤이의 밥그릇을 치우며 얘기했다.


"소윤아. 자. 먹기 싫으면 먹지 마. 먹겠다고 했으면 열심히 먹고. 먹을 거야 안 먹을 거야"

"먹을 거야"

"먹겠다고 했으면 장난치지 말고 열심히 먹어야지.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 진짜야"

"안 먹을 거야"

"어?"

"안 먹을래여"

"진짜지?"

"네"


사실 좀 당황했다. 먹겠다고 할 소윤이의 약속을 보다 강력히 각인시키기 위한 과정이었는데 소윤이는 안 먹겠다고 했다. 뱉은 말이 있으니 되돌릴 수는 없었다.


"알았어. 그럼 먹지 마"


소윤이를 아기 의자에서 내려주면서도 당황은 가시지 않았다. 괜히 꼬장을 부렸다.


"소윤이는 이제 간식 못 먹어. 내일 하루 종일"

"다섯 밤 잘 동안?"

"아니. 다섯 밤은 아니고 내일"

"내일이 다섯 밤이야?"

"아니. 두 밤 자면 먹을 수 있지"

"다섯 밤은 아니고 두 밤?"

"어. 내일은 간식 못 먹어. 그러니까 내일은 엄마한테 간식 달라고 조르지 마. 알았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억지스러웠다. 미리 얘기해 준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간식을 주지 않으면 발생할 소윤이의 히스테리도 온전히 아내의 몫이었고. 거기에 소윤이는 당장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중에 아내가 나에게 넌지시 얘기했다.


"내일 목장모임인데 어떻게 해"

"몰라. 그냥 줘"


시윤이는 요즘 세상 애교쟁이가 따로 없다. 어찌나 실실거리면서 눈웃음치고 엉겨 붙는지. 소윤이만 아니었으면 더 격렬하게 반응했을 텐데 소윤이 눈치 보느라 참을 때가 많다. 아무튼 요즘은 시윤이도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말귀도 잘 알아듣고 말도 잘하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두 권의 책을 읽고 나서 소윤이는 금방 잠들었다. 나도 소윤이랑 같이 아주 살짝 잠들었다가 깼다. 아내는 내가 소윤이 책 읽어줄 때 이미 잠든 듯한 숨소리가 들렸었다. 아내를 흔들어 깨우고 휴대폰 불빛을 비췄는데 시윤이가 여전히 안 자고 있었다. 일단 나는 거실로 나오고 아내가 남아 시윤이의 수면 인도를 담당했다. 조금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시윤이를 재우고 아내도 탈출에 성공했다.


"여보는 얼른 운동 갔다 와"

"그래야겠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아 아내의 평균 운동 시간은 약 40-50분이고 단지 안에 있으니까 이동 시간까지 포함해도 1시간이면 충분한데 아내는 1시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 빵집을 갔거나 아니면 마트에 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예상은 놀랍게 적중했다. 아내는 빵집도 가고 마트도 갔다. 운동 끝나고 롯데슈퍼에 가서 이것저것 한참 구경하다가 카야잼을 샀고 돌아오는 길에 카야잼을 발라 먹을 식빵을 사기 위해 빵 집에 들렀다고 했다.


"하아. 런닝머신을 뛰면서 100칼로리 빼는 게 이렇게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아내는 그 말을 하고 잠시 후 프라이팬에 버터를 두르고 식빵을 굽고 있었다. 잘 구워진 식빵에 카야잼을 바르고 맛있게 먹었다. 난 아내 다 이해한다. 이 세상에는 맛있는 게 너무 많으니까. 다이어터들의 잘못이 아니다. 조물주인 하나님 잘못이지. 돼지살도 좀 질기게 창조하시고 밀이라는 곡물도 안 만드셨으면 빵을 먹을 일도 없고 닭을 창조하지 않았으면 치킨도 없었을 거다.


차라리 헬스를 안 하는 게 여러모로 더 이득일 것 같은 건 나의 착각적인 착각적인 느낌적인 느낌이겠지.


한껏 배를 채운 아내와 자려고 방에 들어갔는데 소윤이랑 시윤이가 제 멋대로 늘어져 있었다. 여느 때처럼 아내와 나는 자고 있는 소윤이와 시윤이를 한참 감상했다. 소윤이는 침대에, 시윤이는 바닥에, 아내는 소윤이 옆에, 나는 시윤이 옆에.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시윤이의 볼을 손에 가득 차도록 넣고 살짝 힘을 주니 시윤이가 뒤척거렸다. 그러더니 그 작은 손으로 살의 감촉을 찾는 것처럼 더듬거리더니 내 팔을 만지고는 가만히 손을 올려놓는다. 아마 엄마 팔이라고 생각했겠지. (아무리 엄마, 아빠 덜 가리는 시윤이라도 울 때, 잘 때는 무조건 엄마다)


그 작은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기운, 그거 때문에 살고 버티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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