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26(토)
오전에는 텃밭에 가기로 했다. 처치홈스쿨에서 함께 가꾸는 텃밭이 있는데 어쩌다 보니 오늘 우리만 가게 됐다. 지난번 텃밭에 갔을 때 고생한 뒤로 아내는 소윤이, 시윤의 가슴 장화와 나와 아내의 장화를 구비했다. 사실 가서 뭔가 거창한 걸 하는 게 아니라 활동에 비해 다소 거한 느낌의 장비긴 했지만 없으면 불편하니까.
소윤이와 시윤이는 새 가슴 장화를 입고 간다는 것만으로도 들떴다. 오늘은 웃거름을 줘야 했다. 심어 놓은 배추 모종 옆으로 작게 홈을 파고 거기에 웃거름을 몇 알 뿌리고 다시 덮으면 됐다. 날씨가 더할 나위 없이 좋긴 했는데, 덥기도 더웠다. 아니, 해가 뜨거웠다.
“소윤아, 시윤아. 텃밭에 오는 건 놀러 오는 건 아니야. 물론 신나게 하는 건 좋지만, 텃밭에 왔으면 땀을 흘려야 돼. 일하러 오는 거야. 일하러. 알았지?”
이렇게 말하면 농사 경력이 아주 많은 농부 같지만, 사실 나도 처음이다. 처음이지만 땅과 땀의 정직한 관계를 알려 주고 싶었다. 나도 아내도 잘 모르니까 ‘이렇게 하는 게 맞나’라고 계속 의심하면서도, 우리의 일을 했다. 소윤이는 제법 알려준 대로 맞춰서 했고, 시윤이는 아직 그 정도의 능숙함이 없었다. 의지는 충만했는데 손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금방 시들시들해졌다.
그래 봐야 고작 한 시간 남짓이었다. 그래도 뜨거운 볕 아래에서 한참 허리를 구부리고 일했더니 꽤 힘들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얼굴이 벌개지고 땀을 주룩주룩 흘렸다. 서윤이는 내내 아내에게 안겨 있었다.
다음 일정이 정확히 정해진 상황은 아니었다. 나랑 시윤이 머리를 자르러 갈까 했는데 너무 많이 기다려야 한다고 해서 일단 보류했다. 점심을 먹어야 했는데, 오후의 일정을 정하지 않았으니 집에 가기도 애매했다. 어쩔 수 없이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서윤이는 아내가 앉자마자 수유를 한 덕분에 밥 먹는 시간에는 조용했다. 너무 신기하게 숟가락 내려놓을 때가 되자 울기 시작했다.
밥 먹고 나서 동네 미용실 여러 곳에 전화를 해 봤는데, 기다리는 건 물론이고 아예 자르지 못하는 곳이 대부분, 아니 전부였다.
“여보. 그냥 파주에 가서 잘라야겠는데?”
“그럴래"
처음 전화했을 때는 두 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각오하고 갔다. 아내는 여차하면 파주(처가)에 가겠다고 했다. 미용실로 가는 길에 시윤이와 서윤이가 잠들었고, 도착해서도 굳이 깨우지 않고 더 재웠다. 나만 내려서 미용실에 들어가 기다렸다. 소윤이는 차 안에서 엄마랑 놀았다.
시간이 꽤 지나도록 시윤이와 서윤이는 깨지 않았다. 나의 순서도 돌아오지 않았고. 정말로 2시간을 기다리고 나서야 의자에 앉았다. 그 사이 시윤이와 서윤이도 깼고, 온 가족이 미용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휴대폰도 안 보여주고, 먹을 걸 사준 것도 아닌데 별로 지겨워하지도 않고 잘 있었다.
머리를 다 자르고 나서는 잠깐, 아주 잠깐, 미용실 앞에서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만났다. 원래 소윤이가 할머니 집에 가고 싶어 했는데 오늘은 바로 집에 가야 하니 마음을 접으라고 했다. 이미 소윤이가 할머니와 통화를 하면서 “할머니 집에 가도 돼여?” 라고 물어봤기 때문에, 장모님과 장인어른도 약간 기대를 하셨을지도 모른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혹은 달래주기 위해 우리가 있는 쪽으로 잠시 오신 거다. 만남은 아주 짧았다.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부터 날씨가 좋았다. 마음의 모든 근심과 짜증이 다 날아갈 정도의 날씨였다. 차에 타서 앞 유리에 보이는 풍경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고. 날씨가 좋으면 들뜨기 마련이고, 들뜨면 관대해진다.
“소윤아, 시윤아. 우리 오늘 밤에 산책 나갈까?”
“좋아여 좋아여”
“그래, 그러자”
“아빠. 엄마도 같이?”
“엄마는 집에서 좀 쉬시라고 하고”
아내가 말을 이어 받았다.
“집에 있는 게 과연 쉬는 걸까?”
“아니, 서윤이도 내가 데리고 나간다고”
“아, 진짜? 왜?”
“그냥. 여보 쉬라고”
“아니야. 나도 같이 나가지 뭐”
“여보 그럼 아예 주먹밥 싸서 나가자”
“그럴까?”
“어, 소풍 기분 나게”
일단 해야 할 일은 서윤이 아기 침대 해체였다. 회전과 이동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된 서윤이이게 아기 침대가 작아 보였다. 밤에 자주 깨는 것도 괜히 작아서 여기저기 걸리나 싶고. 아기 침대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매트를 깔아주기로 했다. 잘 때는 사방팔방 막 굴러다니는 언니와 오빠에게 치이지 않도록 울타리도 세워줬다. 막상 바꿔 놓고 보니 엄청 넓어진 건 아니었다. 그래도 서윤이에게는 충분히 의미가 있을만한 공간 확장이었다.
그걸 하고 나서는 부지런히 주먹밥을 만들었다. 다 만들고 통에 담으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세상 귀찮아졌다. 통 찾아서 넣는 것도, 그걸 설거지해야 하는 것도.
“여보. 그냥 먹여서 나갈까?”
“그래, 그러자”
그 자리에서 하나씩 하나씩 입에 넣어줬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밖에 나가서는 특별히 한 건 없었다. 말 그대로 동네 산책 좀 하고, 장도 보고, 놀이터에서 그네도 좀 타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그 별거 없는 밤 산책에도 흥분이 최고조였다. 막 뛰어다니고 소리 지르고.
집에 와서도 해야 할, 남은 과정이 많았다. 딱 저녁까지만 먹고 나간 거라.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힘들었겠지만 그게 선명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둘이 그렇게 웃으며 뛰어다니는데, 그것만 보고 있으면 나도 같이 웃게 되고 모든 피로가 다 날아간다.
날씨도 좋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