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2(금)
서윤이의 자비 따위는 없었다. 아내는 어제도 서윤이에게 시달리며 잠을 설쳤다. 서윤이를 벽 쪽에 붙여서 재웠는데 이리저리 뒤척이며 손과 발로 벽을 칠 때마다 온 집안을 울리는 굉음이 났다. 그 작은 손과 발로 아무리 힘을 줘 봐야 얼마나 세다고, 서윤이의 힘이 센 게 아니라 벽이 부실했다. 아무튼 각각 다른 공간에서 자는 나머지 식구까지 방해를 받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됐다.
그래도 어제와 크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해가 뜨고 난 뒤, 그러니까 서윤이 입장에서는 마지막 밤잠(밤새 하도 쪼개서 자니까)을 마치고 일어났을 때, 아래층에 있던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맡겨도 괜찮았다. 밤새 수유 고문에 시달린 아내가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서윤이를 바닥에 눕혔다. 서윤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고도 울지 않았다. 아내는 아쉬운 대로 소파에 누워 부족한 잠을 다시 청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아래층으로 데려다주고 왔다. 세 자녀를 모두 품에서 떠나보내고, 혼자 방에서 밀린 일기를 끄적였다. 꽤 오랫동안. 소윤이와 시윤이는 당연하고 서윤이도 내내 전혀 울지 않았다.
아침은 숙소 앞 정원에 나가서 먹었다. 밖에서 먹지 않으면 아쉬울 날씨였다. 마지막 시간이기도 했고. 서윤이도 앉아서 이유식을 먹었다. 마스크 따위 쓰지 않고 마음껏 얘기하는 게 그토록 감사한 일이었는지 새삼 느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오랜만에 맨 얼굴로 뛰어다니며 마음껏 공기를 들이켰다.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난 믿는다. 놀 때의 시간은 분명히 빠르게 간다. 하나님이 그렇게 조작하시는 게 틀림없다. 어느덧 3일이 흘렀고 모두 숙소에서 나왔다. 우리 가족은 신림동(나의 부모님 댁)으로 이동했다. 2박 3일이나 함께 보낸 만큼 헤어지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소윤이와 시윤이는 의외로 덤덤했다. 집에 가는 게 아니라, 또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니까 괜찮았을 거다. 거기에 고모(내 동생)와 고모부까지 있었다. 이렇게 명절이나 되어야 만나는, 뜸한 사이지만 그래도 핏줄은 다른 건지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함 없이 잘 논다.
난 허리에서 신호가 왔다. 어제, 오늘 조금 무리해서 서윤이를 안아준 게 원인이었다. 엄청 심하게 아픈 건 아니었지만, 제법 묵직한 통증이었다. 다시 새로운 장소, 어색한 사람과 만나야 하는 서윤이가 또 낯가림하느라 울면 많이 안아줘야 했는데, 그것도 힘겨운 상태였다. 걱정을 하며 신림동에 입성했다. 역시나 서윤이는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눕혀 놔도 울고, (어색한 사람과) 눈만 마주쳐도 울고, (어색한 사람이) 안아 줘도 울고. 오로지 엄마 품에 안겨야만 울음을 그쳤다. 그래도 나름 2박 3일 동안 낯가림 훈련이 됐는지, 조금 덜한 느낌이었다.
끊임없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도전(?)에 못 이기고, 서윤이는 결국 낯가림을 포기했다. 다행이었다. 서윤이가 우는 건 생각보다 몸과 마음의 생기를 금방 빼앗아 간다. 모두 평온한 연휴를 보내려면 서윤이의 빠른 적응은 꼭 필요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거리낌 없이 안기고, 웃고. 덕분에 아내와 내가 편했다. 심지어 고모부의 품에 안겨서도 멀쩡했다.
그렇게 육아를 관람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방에서 자고 있는 서윤이 옆에 잠깐 누웠는데 금세 잠이 들었다. 잠이 드는 건 금방이요, 깨는 건 함흥차사라. 2시간을 잤다. 중간에 서윤이가 깨서 울었는데 애써 합리화를 하며 잠을 이어갔다.
‘어차피 내가 일어나서 안아도 울 거야. 가영이가 와서 수유를 하겠지’
나중에 들어 보니 아내도 막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을 무렵이었다. 겪어본 사람은 안다. 이때 잠을 떨쳐 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남편이 외면하니 아내는 별 수 없었다. 여보, 미안. 잘 때는 제정신이 아니야.
소윤이와 시윤이는 오늘도 늦게까지 놀았다. 소윤이는 신림동에 오면 할머니(내 엄마)에게 재워달라고 할 때가 많다. 아니 항상 그런다. 오늘은 재워주는 걸 넘어서 아예 할머니랑 같이 자겠다고 했다. 그렇게 하는 대신, 자러 들어가서 장난치거나 얘기하면서 늦게 자지 않기로 약속했다.
“소윤아. 만약 오늘 약속을 잘 지키면 다음에도 또 할머니하고 잘 수 있지만 안 지키면 다음부터는 그렇게 못하겠지? 계속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서 소윤이 아플까 봐 그러는 거니까 들어가면 얼른 자. 알았지?”
시윤이에게도 선택권을 줬는데 엄마, 아빠와 자겠다고 했다. 소윤이는 할머니, 할아버지 방으로. 시윤이는 엄마, 아빠, 서윤이 방으로 들어갔다. 운명 공동체인 아내와 서윤이는 마지막 모유를 주고받으며 함께 잠들었다. 시윤이도. 거실에 나와 보니 아빠가 소리를 잔뜩 줄이고 TV를 보고 계셨다. 엄마도 잠시 후 소윤이를 재우고 나오셨다.
그렇게 한참 엄마, 아빠와 함께 TV를 봤다. 참 희한한 게, 어색할 게 하나도 없는 내 엄마, 아빠의 집인데 아내가 없으니 뭔가 허전하고 어색하고 심심하고 그랬다. 들어가서 슬쩍 깨워볼까 고민도 했지만, 재우러 들어가기 전부터 거의 자는 상태였던 아내의 얼굴을 떠올리며 참았다.
(위험한 발언이지만) 차라리 전 부치고, 음식 하고, 상 차리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6개월도 안 된 쪼그만 녀석이, 밤마다 아내에게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