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가람이 사라지고, 자유가 찾아왔다

20.10.01(목)

by 어깨아빠

소윤이와 시윤이는 엄청 일찍 일어났다. 이 정도면 선방이라고 생각한 시간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너무 이른 시간이니 얼른 다시 자라고, 지금 다시 자지 않으면 오늘 밤에는 일찍 잘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시윤이는 다시 눈을 꾹 감고 잠을 청했고, 금방 잠들었다. 소윤이는 다시 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누워만 있을 뿐,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소윤아. 아빠랑 산책 나갈까?”

“지금여?”

“응”


소윤이는 의외의 제안에 살짝 당황했다. 약간 귀찮나 싶기도 했고. 막상 나가니 아침 산책의 즐거움에 금방 빠졌다. ‘아침 산책의 낭만’을 소윤이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 얘기했다.


“소윤아. 엄청 좋지 않아?”

“맞아여”

“이거 집에서는 못 하는 거야”

“왜 못해여? 집에서도 산책하면 되잖아여”

“집에는 이런 자연이 없잖아”

“우리 동네에도 자연이 있잖아여?”

“아 그래도, 산책할 곳이 없잖아”

“아파트 단지나 동네 이런 데서 산책하면 되잖아여”

“그렇기는한데 여기랑 또 다르지”

“왜여? 뭐가 달라여?”

“그냥. 여기가 자연이 더 많잖아. 거긴 차도 많고”

“그렇긴 하져”


아무튼 즐겁게 산책을 마쳤다. 시윤이는 다시 잠들어서 두고 나왔는데, 우리가 나가자마자 깼다고 했다. 시윤이는 산책에서 돌아온 나에게 물었다.


“아빠아. 왜 더는 같이 안 가떠여어?”

“시윤이는 자고 있었잖아”

“깨우먼 되다나여어”

“시윤이 졸리니까”


다행히 다시 나가자거나, 혼자 남겨져서 슬프다며 울거나 하지는 않았다.


운명 공동체가 된 아내와 서윤이는 어젯밤에도 혹독한 수면 고문을 주고받았다. 주는 이 강서윤, 받는 이 이가영. 초특급 육아 도우미가 즐비한 여행이지만, 수유만큼은 대체자가 없으니 아내는 여전히 피곤했다. 그나마 아침에는 서윤이가 기분이 좋았고, 하루 만에 경계심이 많이 누그러졌다. 엄마, 아빠가 아닌 사람하고는 눈만 마주쳐도 울던 게, 기분이 좋을 때는 같이 어울려(?) 있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밤에는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낮에라도 아내에게 좀 자유가 생겼다.


아침 먹고, 아침만큼 거한 간식 먹고, 금방 또 점심이었다. 서윤이는 낯가림은 완전히 잊은 듯,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스스럼없이 안겼다. 서윤이의 굴레에서 벗어날 여유를 확보한 아내도 좋아했고, 서윤이의 굴레에 갇힐 은혜를 입은 장모님은 더 좋아하셨다. 장모님은 그동안 보기 힘들었던 자신만만한 태도로 일관하셨다. 서윤이가 울어도 당신이 다가가면 더 우니 멀찍이서 지켜만 보셨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어이구, 어이구. 우리 강아지를 누가 그랬어. 할머니가 안아줄까"

"가영아. 이리 줘. 내가 안을게"

"강서방. 내가 안을게"


이미 손주들과의 여행에 활력이 가득했는데, 서윤이까지 협조해 주니 완벽하게 생기가 도셨다. 서윤이가 여럿한테 효도하네.


오후에는 사람이 없는 공원을 찾아 바람을 쐬러 나갔다. 그 안에서도 더 인적이 드문 곳에 자리를 잡고 한참 앉아 있었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하늘과 바람을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맑고 선선한 날씨였다. 특별히 뭘 한 건 아니었다. 애들 노는 거 보고, 같이 놀고, 사진 찍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좋은 시간이었다. 평화의 열쇠를 쥐고 있는 서윤이가 협조한 것도 주요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기분이 안 좋을 틈이 없었다. 마음껏 뛰고 소리 지르고, 먹고. 거기에 엄마, 아빠의 잔소리가 떨어지기 전에(그럴 일도 별로 없었지만) 빠르게 보호막을 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계시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만큼 부드럽지만 엄마, 아빠에 준하는 체력을 지닌 삼촌과 숙모도 있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딱 소윤이와 시윤이의 마음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카페에 들렀는데 거기도 소윤이와 시윤이가 마음껏 뛰고 놀기에 좋은 정원이 있었다. 맨날 집에만 있거나, 나와도 동네 산책하고 마트 가는 정도였던 소윤이와 시윤이도 스트레스가 많이 풀렸을 거다.


저녁에는 어제처럼 불을 피워서 이것저것 구워 먹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하루 종일 뛰고 놀며 들떴다. 자기 직전까지도. 아침에 소윤이한테 “다시 자지 않으면, 저녁 먹고 바로 자야 돼”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는데, 그대로 되기는 했다. 다만, 어제처럼 저녁 먹고 씻는 것까지 마친 시간 자체가 워낙 늦은 시간이었다.


아내는 먼저 서윤이를 재워서 눕히고 나왔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그것보다 조금 늦게 자러 들어갔다. 왜 또 아빠랑 들어가냐며 약간의 불만을 나타냈지만, ‘엄마는 서윤이 재우는 데도 이미 충분히 힘들었다’는 말로 잠재웠다. 서윤이가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가는 거라 ‘절대 떠들면 안 된다’는 주의를 몇 번이나 주고 방에 들어갔다. 다행히 서윤이는 깨지 않았고, 소윤이와 시윤이도 눕자마자 잠들었다.


어른들은 둘러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다들 피곤해 보였다. 특별히 고된 일정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피곤했다. 아마 다들 애들 수발드느라 적잖은 체력을 소모한 듯했다. 그래도 마지막 밤이라는 아쉬움 때문에 꽤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계속했다. 그러다 서윤이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렸고, 그게 오늘 상황의 종료를 알리는 신호가 됐다.


“오늘은 좀 깨지 말고 푹 자라, 서윤아”


이미 세 시간 자고 한 번 깬 거였다. 어제처럼. 그제처럼.


서윤아, 기대는 하지 않지만 그래도 자비를 베풀어 주면 어떻겠니. 아빠의 기억에 니 언니, 오빠도 그 정도는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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