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5(목)
갑자기 비염이 심해졌다. 사무실 근처 약국에 가서
“저기, 여기서 제일 효과가 세고 바로 나타나는 게 뭔가요?”
라고 약사 선생님에게 물어보고, 가장 효과가 빠르고 강하다는 약을 사서 먹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보건소에 갈 일이 있었다. 아내는 여느 날처럼 아이 셋을 데리고 외출을 했다. 보건소에 갔다가 잠시 카페에도 들렀다. 내가 일을 쉴 때 자주 갔던, 단독 공간이 있는 카페였다. 마침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아내와 아이들이 잠시 머물기에는 아주 좋았다. 거기서 찍은 사진이 참 보기 좋았다. 카페에 있다가 형님(아내 오빠)네도 들렀다. 형님이 애들을 보고 싶다고 했다. 잠시 스타필드에도 들르고. 생각 보다 고된 하루였을 거다. 아내에게도, 애들에게도.
야근이 예약된 날이었다. 오전에 먹었던 비염약의 효과가 좋긴 좋았다. 점심 먹고 나니 금세 코와 눈이 마르고, 증세가 완화되었다. 다만, 엄청 졸렸다. 안 그래도 오후에 많이 졸린데, 약 기운이 어마어마했다. 퇴근할 무렵까지도 그 여파가 남았다. 거기에 코와 눈이 바짝 마르는 데서 오는, 만성 비염 환자는 공감할 피로감까지. 아내는 내 얼굴을 보더니
“오늘 많이 힘들었어?”
라고 물었다. 역시, 어제 나의 예상처럼. 난 마라토너가 되었다. 소윤이도 나랑 비슷해 보였다. 소윤이도 나처럼 코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 거기에 하루 종일 여기저기 많이도 돌아다녔으니 그럴 만했다. 무지하게 피곤해 보였다. 얼굴도 퀭하고. 소윤이도 ‘피곤하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자꾸 바닥에 눕고. 아내와 나는 걱정이 되었다. 소윤이의 과로(?)가. 내가 분위기를 좀 만들고, 아내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래, 소윤아. 아빠 말씀처럼 너무 피곤하면 아파. 자전거는 내일 낮에 엄마랑 타고, 오늘은 그냥 집에서 좀 놀다가 자는 건 어떨까?”
소윤이는 거절했다. 약속한 거니까, 아내와 나의 뜻을 따르도록 할 권리는 없었다. 밤공기가 꽤 차가워졌으니, 옷을 아주 두껍게 입혀서 나갔다. 오늘 저녁 외출의 가장 큰 이유는, 자전거였다. 새로 산 (비록 중고였지만) 분홍 자전거를 타 보는 것. 소윤이와 시윤이는 서로 분홍 자전거를 타고 싶어서 갖은 수를 썼다. 그걸 가지고 다투는 순간, 외출이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기 때문에 대놓고 그러지는 않았다. 둘 다 최대한 서로에게 예의(?)를 갖춰가며, 자신의 뜻을 따르도록 설득했다. 소윤이나 시윤이나 같은 내용이었다.
“일단 내가 먼저 분홍 자전거를 탈게. 그다음에 바꿔서 타 보자”
어쨌든 소유권을 보유한 시윤이가 먼저 분홍 자전거를 탔다. 건물 밖으로 나와 자전거에 앉아 첫 페달을 구르는데, 바퀴가 헛돌았다. 왜 그런가 보니 보조 바퀴가 너무 내려와서 그런 거였다. 잘 가긴 했는데 한 번씩 헛돌았다. 타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답답할 일이었다. 동네 상가 앞 광장에 가서, 소윤이와 시윤이가 자전거를 바꿔 탔다. 소윤이도 알게 됐다. 자꾸 바퀴가 헛도는 분홍 바퀴의 비밀을. 당장 공구가 없으니, 일단은 그대로 타야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태도가 바뀌었다. 집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서로 분홍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했는데, 한 번씩 타고나니 ‘소윤이 자전거’의 인기가 높아졌다. 둘이 주로 이런 대화를 나눴다.
“누나아. 누나 더거 삥끄댁 다던거 탈래에?”
“아니. 괜찮아. 그거 시윤이 자전거니까 시윤이가 더 타”
“아니이. 나는 많이 타뜨니까 누나도 타아”
“아, 괜찮아. 시윤이가 일단 실컷 타고 나중에 또 바꿔 타자”
“누나아 아까는 이거 따고 딮다고 했따나아”
“괜찮다니까. 누나는 지금 이거 타도 돼”
잠시 자전거에서 내리기라도 하면 그 틈을 타서 ‘소윤이 자전거’에 앉는 일도 많이 벌어졌다. 원래 금기된 ‘얍삽한 행동’이지만, 귀여운 수준이라 그냥 웃으며 지켜봤다. 언니와 오빠가 치열하게 전략을 주고받는 동안, 서윤이는 아내의 품에 안겨서 잤다. 그래도 꽤 한참 놀았다.
엄청 피곤했다. 이게 비염약의 여파인지, 자전거의 여파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몸이 축축 늘어졌다.
“아, 여보. 오늘은 좀 일찍 자야겠다”
“그래. 그게 좋겠다”
그게 11시 30분쯤이었나. 아내와 나에게 ‘일찍’은 ‘12시’가 기준이다. 아무리 피곤해도, 몸이 아프지 않은 이상 그것보다 일찍은 못 자겠다. 나야 그렇다 쳐도, 밤마다 고문에 가까운 수유 폭행에 시달리고 있는 아내야말로, 진짜 일찍 자는 게 좋을 텐데. 차마 아내에게도 더 일찍 자라고 말을 못 하겠다.
잠시 육아인이 아닌 척하는 시간도 있어야 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