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의 난리

20.10.30(금)

by 어깨아빠

아내와 아이들이 집 근처 조그마한 공원에 가려고 집에서 막 나왔을 때, 정전이 됐다고 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아내는 서윤이는 아기띠로 안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양손으로 잡고 10층을 걸어 내려갔다. 마침 집에서 나오신 옆집 아주머니가 소윤이와 시윤이 내려가는 걸 도와주셨다고 했다. 시윤이가 어렸을 때 화재경보기가 잘못 울린 이후로, 두 번째다. 이런 일은 꼭 아내 혼자 집에 있을 때만 일어난다.


화재경보기 소리를 듣고 혼비백산일 때보다는 훨씬 여유로웠지만, 챙겨야 하는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났기 때문에 힘들었을 거다. 홀몸으로 10층을 걸어 내려가는 것도 힘들뿐더러, 평생 그런 경험을 하지 않는 사람도 많을 거다.


평일 낮이라 공원에 사람도 없고, 아내와 아이들은 잘 놀다 왔다고 했다. 뭐 아내가 노는 건 아니었겠지만. 물론 내가 모르는 어두운(?) 시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내가 세세하게 전하지 않을 뿐, 아내는 여전히 죽을 만큼 힘들지도 모르고. 어쨌든 아무리 힘들어도 아내가 우울감에 지배 당하는 일이 아직 없다는 건 다행이다. 아내는 요즘 입버릇처럼 얘기한다. 특히 서윤이를 보면서.


“아, 밤에 그렇게 힘들게 하는데. 이렇게 귀엽단 말이야”

“그러니까 버티겠지. 안 그러면 못 버티지”


아내는 저녁으로 파스타를 만들고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졸리지만 기분은 좋았다. 서윤이도 요즘은 바닥에 엎드려 잘 놀고 있을 때가 많아졌다. 한동안 아내에게 업혀서, 퇴근하는 나를 맞이했던 때가 있었는데. 요즘은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무릎을 대고 배를 드는 자세를 할 때도 많다. 배밀이는 수준급으로 올라섰는데, 잘 보여주지는 않는다. 곧 배를 떼고 제대로 길 것 같다. 매일 보는데 언제 이렇게 컸는지 모르겠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이제 제발 천천히 크면 좋겠는데, 서윤이는 빨리 컸으면 좋겠다가도 천천히 컸으면 좋겠고. 뭐 이런 거다. 얼른 커서 퇴근하는 나를 향해 번개같이 기어 오면 좋겠고, 어눌한 발음으로 엄마, 아빠를 불러주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자란 게 보이면 또 아쉽고.


교회에 가야 해서 마음이 분주했다. 물론 순전히 나의 취미와 쾌락을 위한 축구를 하러 갈 때와는 조금 다르다. 교회에 가는 건 놀러 가는 건 아니니까. 그건 그거고, 남은 아내가 애 셋을 홀로 챙겨야 한다는 현실은 똑같다.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어서 어느 것 하나도 도와주지 못하고 나왔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진심 어린 당부를 남기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소윤아, 시윤아. 엄마 말 잘 듣고 바로바로 움직여. 알았지? 엄마 힘드시지 않게”


아내와 나는 며칠 전부터, 오늘(금요일 밤) 영화를 보자고 했다. 영화까지 미리 정해놨다. 예배를 마치고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는데, 답이 없었다. 몇 번 보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아쉬웠다. 주말 밤에 아내랑 오붓하게 영화 보는 게 축구와 더불어 큰 낙이었다. 집에 거의 다 왔을 때쯤, 아내에게 카톡이 왔다.


“봉봉. 나는 방에 있음”


서윤이가 깨서 재우러 들어간 거였다. 과연 아내가 다시 나올지 못 나올지.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결국 아내는 다시 나왔다. 다만 시간이 꽤 늦었다. 영화는 내일 볼까 속으로 고민하고 있는데, 아내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영화 볼까? 너무 늦었나?”

“아니. 보지 뭐”


오늘은 아예 마음을 접었다.


‘서윤이는 분명히 중간에 한 번은 깰 거야’

‘소윤이랑 시윤이가 깰지도 모르지’


아내도 오늘은 그냥 각오하고 보자며, 내려놓고 시작했다. 오늘 낮에는 소윤이가 갑자기 아내에게


“엄마. 그때 엄마, 아빠 영화 다 못 보게 해서 미안했어요”


라고 했다고 했다. 정말 뜬금없이, 갑자기. 그냥 애답게 좀 뻔뻔하지. 그걸 또 굳이 그렇게 기억하고 마음을 쓰기는. 미안하게.


아니나 다를까 서윤이는 영화가 중후반부에 이르렀을 때, 깼다. 당연히 아내가 들어갔고 ‘오늘도 결말을 보지 못하는 영화가 또 하나 생기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 때쯤, 아내가 다시 나왔다. 그 후로는 방해받지 않고 끝까지 시청했다.


돈을 갚지 못한 채무자의 딸을 담보로 잡았다가, 오히려 그 여자아이를 떠맡게 된 인정 넘치는 사채업자와 여자아이의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었다. 주인공인 여자아이가 연기를 너무 잘 했다. 자꾸 소윤이 생각이 났다. 너무 몰입이 되어서 보기 힘들 정도로. 지나치게 영화스러운 설정과 장면의 전환을 일부러 떠올리며 몰입을 깨뜨리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엄마에게 음성 메시지를 남기며 흐느끼는 장면, 부산의 룸살롱에 팔려 가서 겪으면 안 되는 일을 겪는 장면. 자꾸 소윤이가 겹쳐졌다. 너무 과장하는 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진짜다. (슬픈 기운을 가득 품은 영화는 아니니 오해는 마시고. 오히려 유쾌한 영화에 가깝다.) 안 보는 장르는 있어도 못 보는 장르는 없었는데, 애들 낳고 나서 그런 장르가 생겼다.


아무튼 다 보고 나니 소윤이가 엄청 보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소윤이와의 시간들이 떠올랐고, 앞으로도 그런 시간이 가능해서 다행이었다. 자려고 방에 들어갔을 때 소윤이는 혼자 바닥에 누워 있었고, 시윤이는 아내와 나의 매트리스에 올라와서 대자로 자고 있었다.


“여보. 그럼 여보가 시윤이하고 자. 난 소윤이 옆에서 잘게”


타고난 천성이 1년 365일 두부처럼 말랑하고 부드러울 수 없어서 실수를 많이 하지만, 소윤이는 나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다. 영화 한 편에, 이렇게 마음이 요동치는 게 좀 이상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왠지 내일은 소윤이를 보고 있어도, 애틋할 거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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