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31(토)
새벽에도, 아침에도 소윤이와 달달했다. 소윤이는 잠결에도 내 손을 찾아 잡았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아내와 시윤이, 서윤이는 먼저 거실로 나갔고 소윤이와 나는 가장 늦게까지 방에 남았다. 안 나가고 나랑 누워서 이야기하는 소윤이가 새삼 신기했다. 억지로 붙잡아 둔 것도 아니었는데.
“아빠아. 이더났는데 왜 안 나와여엉?”
“그냥. 누나랑 얘기하고 있었는데?”
“얼른 나와여어어”
“알았어. 금방 나갈게”
시윤이가 나가고 나서도 조금 더 소윤이랑 있었다.
“소윤아. 아침 뭐 먹을까”
“계란밥?”
“계란밥 먹을까?”
“아, 아빠 계란밥 말고, 그 계란 후라이 같은 거 밥에 올려서 먹는 거 뭐였더라여?”
“오므라이스?”
“아, 맞아여. 그거 먹고 싶어여”
지난밤, 서윤이는 역시나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아내는 거실에서 거의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나와 소윤이가 나오고 나서 잠시 뒤에 아내는 방으로 들어갔다.
“여보. 나 조금만 누워 있을게”
“어, 알았어”
말이 오므라이스지 그냥 ‘계란 지단 얹은 밥’이었다. 무엇보다 케첩이 없었다. 햄버거 먹을 때 받았던 케첩 하나가 냉장고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거라도 있어서 그나마 오므라이스의 케첩밥 느낌을 조금이라도 냈다. 이런 허접한 오므라이스에도 소윤이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빠. 저는 아빠가 해 주는 거 중에 오므라이스가 제일 맛있는 거 같아여”
“아빠아. 더두여어”
식탁에 앉아 반찬 투정하지 않는 습관을 가르친 건, 내 육아 인생 최대의 업적이다.
아내는 꽤 한참 잤다. 그만큼 서윤이가 엄마를 찾지 않고 잘 놀았다는 얘기도 된다. 서윤이는 계속 기분이 좋았다. 거의 2시간 가까이 한 번도 안아주지 않았을 정도로 잘 놀았고, 언니와 오빠가 노는 걸 보며 좋아했다. 그러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울었고 그때 아내가 깨서 나왔다.
토요일이었지만 특별히 해야 할 일이나 약속은 없었다. 아내가 내 옷을 하나 사 준다고 했는데 사이즈가 확실하지 않았다. 직접 매장에 가서 입어 봐야 했다(인터넷이 월등히 싸니, 사는 건 인터넷에서). 가까운 매장은 스타필드에 있었다. 나 혼자 잠깐 다녀오는 게, 소요되는 시간을 따지면 가장 빨랐지만 왠지 아내에게 미안했다. 주말 낮에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혼자 쏙 나가는 건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소윤이와 시윤이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지금 시간도 차 많으려나?”
“글쎄. 그럼 버스 타고 가”
“버스? 애들 데리고 버스 타는 게 왠지”
“왜? 사람 많을까 봐?”
“어”
“잠깐인데 뭐”
“그런가”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내와 나의 대화를 듣더니, 버스를 타고 가고 싶다고 난리였다. 잠깐 바람 쐬러 나가는 느낌으로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내 옷 사이즈를 확인하는 게 목적이었지만, 가서 애들 먹을 것도 좀 사 주고,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으면 구경도 좀 하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아주 멋지게 차려입으신 할아버지(라고 썼지만 나의 아빠, 장인어른 연배셨다) 한 분이 정류장으로 오셨다.
“안녕하세요”(시윤이도 누나를 따라 인사했다)
“어, 어, 그래. 아이구, 어쩜 그렇게 인사를 잘 해.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줬구나”
“………”
난 이 대목에서, 소윤이가 좀 컸다는 걸 느꼈다. 예전 같았으면 자기는 어린이집 안 가고 처치홈스쿨 한다고 얘기했을 거다. 그럼 그게 뭐냐고 되물으실 거고, 소윤이는 열심히 처치홈스쿨에 대해서 설명했을 거고. 소윤이는 굳이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그냥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어디 가?”
“스타필드여”
“어디?”
“아, 스타필드”
“네 옷 사러 가는구나”
“아빠 옷 보러 가여”
“아, 그렇구나. 아빠도 출근하시려면 옷 많이 필요하시니까”
소윤이와의 대화를 마친 할아버지는 나에게 애들한테 어쩜 그렇게 인사를 가르쳤냐고 하시면서, 나도 칭찬해 주셨다. 당신의 아들은 38살이고 손주는 막 돌을 지났다는 얘기도 하시고.
할아버지는 먼저 버스를 타고 떠나셨다. 잠시 후 다른 아주머니 한 분이 정류장으로 걸어오셨다.
“안녕하세여”
“오, 오, 그래 그래. 고마워. 어디 가는 거야?”
“스타필드여”
“어디?”
“스타필드여”
“오, 오, 스타필드. 할머니도 삼송역 가야 되는데”
이번에는 우리가 먼저 버스를 탔다.
“안녕히 계세여”
솔직히, 인사는 나보다 소윤이가 훨씬 잘한다. 엘리베이터에서는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든 먼저 인사하고, 길거리에서는 대충 ’40-50대 이상’인 것 같으면 하고. 이건 아내의 가르침이다. 아내는 소윤이만큼 인사를 잘 한다.
신기한 건 아무리 무서운 표정을 하고 계시는 분이어도, 아이들의 인사는 거의 다 받아 주신다.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엄청 반겨 주시면서, 무척 좋아하신다. 젊은, 내 또래 혹은 그 이하의 사람은 주로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를 받게 되는데, ‘나는 대화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듯한 표정과 자세를 취하고 있는 분들도, 인사를 무시하는 건 한 번도 못 봤다. 물론 할머니, 할아버지에 비하면 훨씬 건조하게 “어, 그래”라고만 대답하는 사람도 많지만.
소윤이와 시윤이의 물불 가리지 않는 인사와 그걸 받는 어른의 모습을 보면, ‘서로 인사만 잘 해도 세상이 좀 밝아지겠구나’라는 생각을 하지만, 난 여전히 인사에 인색하다. 애들이 어른보다 나을 때는 수두룩하다.
스타필드에 사람이 엄청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한산한 건 아니었다. 일단 내 옷부터 보고 어묵을 먹기로 했다. 옷 매장 앞에 자동차 전시장이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거기도 구경하자고 해서 한 바퀴 돌았다. 그러고 났더니 위층에 있는 장난감 매장도 보고 싶다고 해서 가기도 갔다. 소윤이 신발도 하나 사야 해서 거기도 들러서 소윤이 신발도 하나 샀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할 때마다 꽤 많이 걸어야 했다. 시간도 은근히 많이 걸렸다. 스타필드에 가서 걸어 보면 깨닫게 된다. 신세계 놈들이 한 걸음이라도 더 걷게 하려고 얼마나 고민을 했을지. 소윤이와 시윤이는 화장실도 두 번씩이나 갔다. 한 번은 작은 거, 한 번은 큰 거. 둘 다.
“아빠아아아. 도대테 어묵은 언데 머거여어어어어”
시윤이는 인내심과 체력의 한계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래도 기특하게, 짜증내고 그러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위트를 섞어서 호소했다.
마침 점심 시간이라 어묵이랑 빵, 우유도 사 줬다. 그걸로 점심을 대신할 생각이었다. 나도 배가 고팠다. 나도 애들이랑 똑같이 어묵과 빵을 먹었다. 난 하나도 안 힘들었다. 어제 영화의 여파가 남아서 그런가, 앞에 앉아 오물오물 어묵과 우유를 먹는 소윤이와 시윤이가 마냥 흐뭇했다.
“아빠”
“어?”
“사랑해여”
“갑자기? 아빠도 사랑해”
“시윤이도 사랑해”
“더는 안 다랑해여어. 으헤헤헤헤”
딸이 있으면 보다 풍요로운 삶이 되는 이유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가볍게 바람 쐬는 느낌이었는데 의외로 체력 소모가 큰 외출이 되었다. 서윤이가 아내를 좀 쉬게 해 줘야 체력을 소모한 보람이 있을 텐데. 아내와 서윤이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그냥 보통이었다. 엄청 힘들게 한 것도 아니고, 엄청 편히 둔 것도 아니고.
아내와 서윤이가 스타필드에 와서 우리를 태우기로 했다. 다음 주부터 처치 홈스쿨 모임을 재개하는데, 모이는 장소인 교회 청소를 하기로 했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건 아니었고, 교감 선생님 가정과 우리만.
아내와 서윤이를 기다리면서 정문 옆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잠깐 놀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얼음 땡을 하며 놀았다. 옆에 다른 가족이 있었는데 아들은 소윤이보다 두 살 정도 많아 보였고, 딸은 시윤이보다 한 살 정도 적어 보였다. 남자아이는 특유의 익살과 괴기스러움을 섞은 말투로 소윤이에게 말을 걸었다.
(나도 아들을 키우고 있지만, 사내아이’만’ 보이는 특이 행동이 있다. 특히 시윤이도 요즘 부쩍 많이 보여준다.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뷝, 부렉, 붹붹붹붹” 희한한 소리를 내며 오두방정을 떤다던가, “나는 000다” 하면서 “크앙, 크앙” 거린다던가)
그 남자아이도 그랬다.
“이름이 뭐냐”
“……”
“몇 살이냐악”
“여섯 살이야”
“나랑 같이 놀래엑?”
“아니, 괜찮아”
소윤이는 매우 차분하게, 최대한 예를 갖춰서 오빠의 제안을 거절했다. 부끄럽기도 하고, 어색한 게 싫은 것 같기도 하고. 시윤이하고는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아내와 서윤이를 만나 교회(우리가 다니는 교회 아님)에 갔다. 시윤이가 잠들었길래, 교회까지 들쳐업고 올라갔다. 잠에서 깨지 못하는 듯 축 늘어져 있던 녀석이, 도착하니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시윤아. 더 자”
“안 자고 싶어여”
아내는 아예 점심을 걸렀고, 나와 소윤이, 시윤이는 어묵과 빵을 먹기는 했지만 요기하는 수준이었다. 배가 엄청 고팠다. 우리가 먼저 가서 청소를 했고, 교감 선생님 가정은 조금 나중에 오셔서 함께 했다.
“여보. 저녁 뭐 먹을지 미리 골라 놔. 바로 가서 먹게”
“아, 생각이 안 나네”
청소를 다 마치고 코로나가 등장하기 전, 처치홈스쿨 모임을 가질 때 종종 가던 식당으로 갔다. 만둣국, 갈비탕, 녹두전을 시켰다. 비빔국수를 하나 더 시킬까 말까 고민하다가 관뒀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엄청 잘 먹었다.
“아빠. 우리 만둣국 먹을 때는 여기로만 오자여”
주인아저씨가 들으면 뿌듯할만한 평을 남기며 마지막까지 잘 먹었다. 시윤이도. 아내는, 서윤이가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우는 바람에 아기띠로 업고 밥을 먹었다. 내가 안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서윤이 기분이 이미 너무 안 좋았다. 엄마 품에서 떼어내자마자 엄청 울었을 거다. 서윤이는 아내 등에 업힌 채 잠들었다. 아내가 혼자 너무 힘든 자세이긴 했지만, 그래도 모두 배부르고 맛있게 먹었다.
집에 오니 엄청 늦은 시간이었다. 별로 한 건 없었지만, 소윤이, 시윤이와 함께 보낸 즐거운 하루를 망치지 않기 위해, 오늘도 불굴의 정신력을 발휘했다. 뭔가 심사가 꼬였을 때도 말을 안 듣지만, 기분이 너무 좋아도 말을 잘 안 듣는 게 애들이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그랬다. 각자 자리에 누워서 인사를 나누기 전까지, 숱한 위기의 순간이 있었지만 무사히 잘 넘겼다.
결국 아내는 오늘도 탈출에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