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27(금)
퇴근하면서 아내에게 전화를 했는데 목소리가 영 밝지 않았다. 체력의 고갈일 때도 있고, 정신력의 고갈일 때도 있다. 오늘은 후자였다. 아내의 목소리에 지침과 힘듦이 아닌 짜증과 분노가 함유된 게 느껴졌다.
집에 도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기의 흐름이 달랐다. 매우 낮은 압력과 차가운 온도. 소윤이와 시윤이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이것저것 아내에게 요구하거나 물어보는데, 그걸 받아내는 아내의 말과 표정, 태도가 냉동실에 오랫동안 넣었다 꺼낸 칼 같았다.
나에게 날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그 차갑고 무거운 분위기의 온도와 무게를 견뎌야 했다. 사실 퇴근해서 이토록 무거운 분위기와 마주하면 힘이 쭉 빠진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다 연유가 있기 마련이다. 아내는 괜히 그러지 않는다. 더 웃어줄 힘이 없는 거다. 잠시 모르는 척해도 괜찮다. 괜히 어설프게 참전 아니 참견하는 것보다는. 그냥 애들이랑 열심히 놀면 된다. 그리고 나라고 맨날 잘 받아주는 것도 아니다. 서로 아귀가 안 맞는 날에는, 불꽃이 튀기도 하고. 다행히 서윤이 낳고 나서는 작은 불꽃도 튄 적이 없기는 하지만. 대신 서로 ‘기운’을 티내고, 감지한 적은 많다.
교회에 가야 해서 집에 머문 시간이 짧았다. 부디 평화의 밤을 맞이하길 바라며 집에서 나왔다.
“여보. 나 어제오늘 커피를 한 잔도 안 마셨다”
번역기를 돌려 보면 다섯 글자로 바뀐다.
“커피 사다 줘”
예배가 끝난 뒤 커피를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집의 공기가 다시 원래대로 바뀌어 있었다. 아내도 적외선 살균기에서 꺼낸 스테인리스 컵처럼 따뜻했고.
“여보. 아까 퇴근했을 때 기쁘게 환대해 주지 못해서 미안”
“미안은 무슨”
거실에는 이미 영화 관람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이미 낮에, 오늘 밤에는 영화를 보자고 얘기했었다.
“서윤이는 재운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또 안 깨겠지?”
“응? 아니”
“아, 이렇게 기대하면 안 되나”
“어, 당연히 깨지. 그럴 거야. 당연히 깰 거야. 각오하고 보자”
아니나 다를까. 영화 보는 동안 서윤이는 무려 2-3번을 깼다. 아내는 그때마다 들어가서 재우고 나왔다. 그래도 아내가 강력한 의지로 살아나온 덕분에, 오늘은 영화의 결말까지 무사히 봤다.
자, 이제 우리의 주말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