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를 받고 오는 효도 방문

20.12.23(수)

by 어깨아빠

아내와 아이들은 파주에 갔다. 코로나 때문에 쉽게 아니 최근에는 거의 오시지 못한 장모님을 위한 효도 방문. 오늘 갈지 내일 갈지 고민하다가 오늘 갔다고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모르고 있다가 가기 직전에 알게 됐고, 물론 엄청 흥분했고.


파주에 있는 아내와 한두 번 통화를 했는데 그때마다 서윤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내의 목소리도 그다지 힘이 넘치지는 않았다. 서윤이는 열도 완전히 떨어지고 멀쩡한 아이가 됐지만, 아프든 안 아프든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우는 건 똑같다. 안 아플 때는 엄마가 사라져도 버티는 시간이 조금 더 긴 것뿐이다.


퇴근 무렵 전화했을 때는 아내의 목소리가 더 지쳐 있었다.


“여보. 어디야?”

“우리도 이제 출발하려고”

“목소리가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맨날 똑같지 뭐”

“왜?”

“가자고 하면 안 간다, 조금 놀았다 이러는 거지 뭐”


서윤이는 열꽃이 피었다고 했다. 열이 많이 오르지는 않았는데, 나름대로 힘든 싸움이었나 보다. 그래도 열꽃이 핀 걸 보면 완전히 나은 거니 다행이다. 소윤이도 처음 열감기를 앓고 나서 아주 심하게 열꽃이 폈었다. 그때는 온몸에 울긋불긋 핀, 이름만 꽃이지 하나도 꽃 같지 않은 열꽃이 걱정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는데. 서윤이의 열꽃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 이제 진짜 나았나 보다’


아내, 아이들하고 주차장에서 만났다. 집에 도착한 시간이 비슷했다. 시윤이는 아예 낮잠을 재웠다고 했다. 덕분에 해 떨어진 뒤의 귀가였는데도 둘 다 쌩쌩했다.


“여보. 반찬이 없어. 그냥 먹자”


장모님이 싸 주신 곱창김, 물김치, 빨간 김치, 야콘전, 간장. 이게 전부였다. 이런 반찬으로도 엄청 맛있게 한 끼를 해결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나이 먹은 걸 깨닫는다. 그건 나이랑 상관없이 너의 식욕 때문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맞다. 코끼리 같은 거다. 풀 먹고도 찌는 이유는 하나다. 뭐든 많이, 잘 먹으니까.


“그러게. 거의 리틀포레스트네”


항상 감사 기도를 드리고, 정말 감사히 먹긴 하지만 맛이라고는 찾기 힘든 바깥 음식으로 점심을 먹고 나면 집 밥 그 자체가 간절해진다. 저녁 먹을 때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집밥우월론’, ‘엄마요리사론’을 설파한다. 감사하게도 소윤이와 시윤이는 이런 자연주의 건강식 반찬도 무척 잘 먹는다. 아내와 내가 애들 어렸을 때부터 웬만하면 직접 해 먹인 노력도 있겠지만, 타고난 것도 클 거다. 수많은 엄마들이 아무리 정성을 쏟아부어도 입이 짧은 아이 앞에서는 꼼짝 못 하는 걸 보면. 간이 전혀 되지 않은 구운 김에 밥을 싸서 간장 콕 찍어 먹는 맛을, 나는 30살이 넘어서 겨우 알았는데 소윤이와 시윤이는 벌써 깨달았다. 감사한 일이다.


서윤이는 요즘 손을 빨 때마다 자기를 안아주는 사람의 머리를 만진다. 아내가 안으면 잡아당기고 내가 안으면 꼼지락대면서 감촉을 느낀다. 누구의 머리카락도 만지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하느냐. 자기 머리를 쓰다듬는다. 한 손은 입에 넣고 빨고, 나머지 한 손은 자기 머리를 빙빙 돌려가며 쓰다듬는다. 아주 가끔은 내 다리와 허벅지를 비슷한 느낌으로 쓰다듬는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시윤이도 그렇고 서윤이도 그렇고 ‘털’ 애착이 있다.


“소윤아, 시윤아. 오늘은 파주 할머니랑 많이 놀았어? 일 많이 안 하셨어?”


나의 물음에 소윤이는 특유의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어서 시윤이가 내 말을 받았다.


“아빠아. 파주 할머니는 맨날 일만 하뎌여어어. 우리랑 안 놀으고오”


소윤이와 시윤이가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지. 파주 할머니의 사랑의 언어가 ‘먹여주고, 입혀주고, 해주고’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신림동 할머니랑 다르게 애를 셋이나 낳은 딸의 엄마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긴 어른이어도 다른 언어로 사랑을 구사하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렵긴 하지.


질문을 바꿔봤다.


“소윤아, 시윤아. 오늘 뭐 먹었어? 점심은? 간식은?”


그랬더니 줄줄 늘어놓는다. 무슨 전에 뭐에, 고구마에 과일에. 또 이것저것. 거 봐라. 신림동에 가면 불량식품(?)의 향연인데, 파주에서는 그런 게 없잖아.


“소윤아, 할아버지는 못 보고 왔지?”

“네, 할아버지는 우리 온 다음에도 한참이나 더 있다 오셨대여”


아내는 아빠에게도 효도가 하고 싶었겠지만, 진짜 자유는 ‘내 집’에 와서 모두를 재우고 완전히 퇴근한 상태에서만 누릴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효를 저질렀을 거다. 퇴근한 아내는 파주에서 사 온 커피를 마셨다. 나에게는 땅콩 크림빵을 건넸다. 나도 맛있게 먹었다. 아내에게도 권했는데 자기는 괜찮다고 하며 한 입 먹고 말았다.


한 30분쯤 후에, 아내가 갑자기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며 움직였다.


“여보. 아까 땅콩 크림빵 맛있었어?”

“어. 맛있던데”

“그거 원래 우리 거 하나 사고, 아빠도 드리려고 하나 더 샀거든. 우리 먹을 건 차에 두고. 근데 엄마가 그걸 다시 싸 주셨더라. 그래서 하나가 더 있어”


그러더니 싱크대 밑 장을 열어서 땅콩 크림빵을 꺼냈다.


“조금만 먹어야지”

“뭘 조금만 먹어. 그냥 다 먹어”

“아니야. 나 이런 거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


그러고는 앉아서 두 입 정도 먹더니 일어나서 냉장고 문을 열고 우유를 꺼냈다.


“왜 웃어?”

“그냥. 여보가 웃겨서. 별로 안 좋아한다면서 우유까지 갖춰서 먹네?”

“이런 거 먹을 때는 우유가 있어야지”


10분쯤 뒤에 보니, 빈 봉지만 보였다.


여보의 그 귀여운 식욕이 부디 오래 가길 바라. 나의 낙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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