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6(토)
소윤이와 시윤이가 아내와 나에게 늦은 성탄 선물을 준 걸까. 아내와 내가 정신을 차려 보니, 9시 50분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보다 이른 시간에, 애들이 막 잠에서 깨 한창 소란스러울 때 잠결에 이런 소리가 들렸다.
“시윤아, 서윤이 데리고 거실에 나가자. 엄마, 아빠 좀 쉬시게”
딸도 좋고 아들도 좋지만 기왕이면 첫째는 딸이 좋긴 좋다고, 누군가 물어보면 조심스럽게 얘기하는 이유가 이런 거다. 소윤이의 특성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이런 구석이 있다. 6살 답지 않은 속 깊음이랄까. 나나 아내, 서윤이에 대한 배려는 깊고도 깊다. 유독 시윤이에게는 좀 야박하다.
시윤이가 기쁜 표정으로 아내의 편지를 읽는(누나의 대독을 듣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시윤이의 뿌듯함이 느껴졌다. 시윤이는 엄마가 써 준 편지를, 누나의 도움을 받아 냉장고에 붙였다.
아내가 파주에 가도 장인어른이 퇴근하기 전에 돌아왔기 때문에, 장인어른은 애들을 보신 지가 한참 되었다. 손주를 그리워하시는 장인어른의 소식을 듣고, 파주에 가기로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깜짝 놀라도록.
파주로 가는 길에 형님(아내 오빠)네 잠깐 들러서, 소윤이와 시윤이의 성탄 선물을 받았다. 아내는 집에서 형님네 집으로 가는 길에 느닷없이 애들한테 말했다.
“얘들아. 오늘 할머니 집에 가서도 말 잘 듣고…”
“엄마. 뭐라구여?”
“여보? 응?”
“?”
아내의 어처구니없는 폭로였다. 소윤이는 명확히 듣지는 못했는지 긴가민가한 눈치였다. 아내는 스스로의 허술함에 웃음을 금치 못했다.
오늘의 파주 방문은 예정에 없었기 때문에, 장모님과 장인어른이 형님한테 맡기고 대신 전달을 부탁한 스케치북과 색연필, 크레파스를 비롯해서 퍼즐 등이 있었다. 그중 형님네가 예전에 사용하던 디지털카메라도 있었는데, 원래 소윤이 선물이었지만 분쟁 방지를 위해 공동 선물로 둔갑시켰다. 공동 명의로 해 놔도 수시로 갈등이 일어날 게 뻔한 선물이라 조속한 대책 마련이 필요해 보였다.
파주에 가는 걸 모르는 소윤이와 시윤이는 삼촌 집에 잠깐만 들어가면 안 되냐고 졸랐지만, 당연히 거절했다. 파주에 가야 하니까. 선물을 모두 받고 다시 차에 타서 파주로 가는데, 길눈이 밝은 소윤이가 바로 물어봤다.
“아빠. 왜 집으로 안 가여?”
“아 엄마, 아빠 커피 좀 사려고”
시윤이와 서윤이는 바로 잠들었고 소윤이도 무척 졸렸지만 쉽게 잠들지 않았다. 졸린데 자지 않고 깨어 있으니, 차에 오래 타는 게 힘들다고 괜한 짜증이나 부렸다. 중간쯤에는 꾸벅꾸벅 졸기도 했지만, 누구랑 내기라도 했는지 잠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게 보였다. 거의 자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라 일부러 조금 멀리 있는 카페에 들렀다 갔지만 소윤이는 난공불락이었다. 결국 파주에 도착할 때까지 자지 않고 갔다.
시윤이는 잠을 푹 잤는지 깨자마자 잠투정 없이 바로 일상으로 복귀했다. 서윤이도 마찬가지였다. 파주에서도 물론 집에만 있었다. 저녁도 포장해서 먹고. 사실 엄청 늦게 도착해서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소윤아, 시윤아. 오늘은 이미 시간이 늦은 시간이야. 그래서 조금밖에 못 놀아도 어쩔 수가 없어. 이따 집에 가자고 하면 너무 조금 놀았다느니 더 놀고 싶다느니 이러면서 짜증 내면 안 돼? 알았지?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지만 짜증 내지 말라는 말이야. 알았지?”
이제 서윤이의 파주 낯가림은 거의 없다. 물론 엄마가 사라지면 여지없이 울기는 하지만 그건 파주가 아니라 우리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선물로 받은 크레파스와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기에 열중했다. 크레파스가 아내와 나의 마음을 아주 시원하게 했다. 스케치북이 아닌 곳에는 잘 묻지 않는, 거의 묻지 않는 좋은 제품이었다.
소윤이는 끊임없이
“할머니. 빨리 와여. 같이 놀자여”
라고 말했고, 장모님은
“그래. 알았어. 같이 놀고 있잖아”
라고 하시면서 몸은 다른 걸 하고 계셨다. 소윤이 앞에 앉아 계셔도 서윤이를 보시거나, 뭔가를 닦으시거나 치우시거나. 장모님이 조금만 할 일을 포기하시고 소윤이에게 집중하면 소윤이가 훨씬 더 만족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쉽지 않으실 것 같다. 차라리 소윤이가 장모님의 일을 도우며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소윤이는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자기 얼굴을 찍었다. 너무 신기했다. 카메라를 거꾸로 들더니 브이도 하고, 고개도 꺾고, 베란다로 나가서 꽃 옆에서도 찍고. 표정도 다양하게 바꾸고. 아내도 나도 셀카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애들이 본 적도 없을 텐데, 이런 것도 본능인가 보다.
아내와 나의 예상대로 디지털카메라는 갈등을 야기했다. 그래도 소윤이는 시윤이한테 많이, 아니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양보했다. 시윤이는 95% 이상 점유하고 있었으면서도, 누나가 잠깐 가지고 노는 그걸 못 참아서 자기도 하겠다고 징징댔다. 다른 걸 하다가도 누나가 가지고 노는 걸 보면 꼭 와서 그랬다. 얌체같이. 시윤이에게 잘못을 지적했더니 자기는 혼자 있을 거라면서 방으로 들어갔다. 집에 갈 시간이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굳이 따라 들어가서 시윤이가 민망하지 않게 다시 나올 수 있는 기회를 줬다.
“시윤아. 이제 우리 딱 15분만 있다가 갈 거야. 그때까지 혼자 방에 있어도 되긴 하는데, 시간이 되면 집에 가야 돼. 시윤이가 잘 생각하고 결정해”
바로 다시 나왔다.
역시나 모두 피곤했다. 나도 아내도 장인어른도 장모님도. 그래도 내일이 주일이니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물론이고 서윤이까지 장모님이 싹 씻겨 주셨다. 미리 약속한 게 있어서 그런지 소윤이와 시윤이도 순순히 일어섰다.
집에 도착하니 10시가 넘었고, 아내는 애들을 재우고 11시가 넘어서 퇴근했다. 그래도 아내의 얼굴이 밝았다.
“아, 여보. 내일이 주일이라니. 아직 하루 더 남았다니. 너무 좋다”
나의 말이 아닌, 아내의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