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잡는 날

21.01.03(주일)

by 어깨아빠

드디어 두통이 거의 사라졌다. 눈을 뜨자마자 누운 채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봤는데 멀쩡했다. 아주 조금, 흔적이 남은 정도의 통증이 있기는 했지만 무시할 만한 수준이었다. 다행이었다. 연휴의 끝날 이라도 온전히 보낼 수 있어서.


아침은 애들만 먹었다. 난 조금 늦게 일어나기도 했고 원래 아침을 안 먹기도 하고. 아내는 오전부터 뭔가 체력을 많이 소진해서 별로 입맛이 없다고 했다. 아니, 아침부터가 아니라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해서 그런 거다. 쪽잠 서윤이는 새벽에도 아내를 많이 고달프게 했다. 서윤이도 서윤인데, 시윤이까지 가세했다. 시윤이가 자꾸 서윤이가 자는 자리로 넘어오면서 서윤이를 깨운다. 찌그러져 자고 있는 아내도 깨우고. 힘들게 재웠는데, 와서 이리저리 뒹굴며 깨우면 열이 안 받을 수가 없지.


“시윤아. 밤에 자면서 자꾸 서윤이 자리로 넘어오지 마”

“엄마아. 더느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여어”


시윤이는 정말 하나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래, 너도 고의로 그러지는 않겠지. 고의였으면 내 새끼가 아니라 나쁜 새ㄲ…아무튼 아내도 알고 있다. 시윤이가 고의도 아니고, 무의식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걸. 그래도 너무 괴로운 일이다. 온전히 자도 분절된 잠인데 그마저도 방해받는다는 건.


어제는 징징이었던 서윤이가 오늘은 순둥이가 됐다. 잘 안 울고 혼자서도 잘 놀았다. 아니지, 혼자 놀 틈이 없었지. 혼자는 무슨, 온 식구가 울음소리 한 번에 다 맞춰 주는데. 호사다 호사야.


새해의 첫날이 지난 지 얼마 안 된 따끈한 연초였지만, 뜻하지 않게 발생한 큰 지출 때문에 아내는 긴축 재정을 선포했다. 재정 실무자가 아내니까 난 대체로 아내의 재정 정책에 적극 따른다. 긴축 재정의 첫 실천 방안은 냉장고 파먹기다. 점심은 냉동실에 있던 갈치를 튀겨서 먹었다. 사실 반찬보다 앞서는 아내의 걱정이 있었다.


“여보. 나 이제 빵하고 커피도 안 사 먹을 거야. 하아. 어떻게 참지”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소윤이의 바람대로 ‘걸어서’ 바람을 쐬러 나갔다. 역시나 목적 없는 동네 한 바퀴. 불쌍한 아내를 위해 내 용돈으로 빵을 샀다.


“아빠. 아빠는 왜 엄마가 먹고 싶은 것만 사 줘여?”


한살림에 가서 애들이 고른 과자와 음료수(라고 쓰고 과일즙이라고 읽자)도 샀다.


“여보. 롯데슈퍼도 갈까?”

“왜? 장 안 본다며?”

“그냥 산책하러”

“그래”


그야말로 눈으로만 이것저것 둘러보며 걸었다. 소윤이는 생연어를 회 뜨고 있는 아저씨 앞에 멈춰 서서 그걸 한참 구경했다. 시윤이는 아내와 나를 따라 걷다가 고기 냉장고 앞에 멈춰 서더니 얘기했다.


“엄마아. 우디이 오늘 고기 먹으까여어? 더 고기 먹고 디퍼여어”

“시윤아. 고기 먹고 싶어? 무슨 고기?”

“돼지고기이”

“그래? 우리 그럼 다음에 한 번 사서 먹자. 알았지?”

“오늘 먹자여어”

“오늘은 말고, 오늘은 아빠가 볶음밥 해주신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신파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으니 오해하지 마시길. 아주 유쾌한 분위기였다. 물론 시윤이의 그 아담하지만 간절한 요청이 계속 귀에 맴돌기는 했다. 평소에 고기를 안 먹이는 것도 아니고 굶는 것도 아니지만, 시윤이가 그렇게 직접적인 요청을 한 건 드물었다. 혼자 고민했다.


‘아, 고기도 용돈으로 사 줄까’


지나친 출혈이라 많은 고민을 거듭했다. 그냥 무시하기에는 시윤이의 음성과 표정이 자꾸 떠올랐다. 얼마나 잘 먹을까 상상이 되기도 했고.


“여보. 오늘 고기 구워 주자”

“진짜?”

“어, 우리 돼지 저금통 뜯기로 했잖아”

“아, 맞다”

“그걸로 사 주지 뭐”

“그래. 그러면 되겠네”


애들 먹일 양만 샀다. 아내와 나는 원래대로 볶음밥을 먹기로 했다. 아내는 원래 돼지고기의 욕구가 잘 없는 사람이고, 난 배불리 먹을 게 아니면 굳이 안 먹어도 되는 사람이고. 쌈 채소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고기 사 준 사람 기분 나도록, 시윤이는 정말 잘 먹었다. 그 작은 손으로 야무지게 쌈을 싸서 작은 입에 터지도록 밀어 넣었다. 소윤이도 잘 먹기는 했는데, 고기가 식고 나서는 젓가락질이 뜸해졌다. 소윤이는 시윤이에 비해 식은 음식을 잘 안 먹는 편이다. 아내와 나는 애들 고기 구워 주고 남은 유산인 돼지고기 기름에 김치볶음밥을 해 먹었다. 이것 또한 꿀맛이었다. 아내도 극찬했다.


아, 저녁을 먹기 전에 우리에게 돼지고기를 선사해 준 돼지 저금통의 배를 갈랐다. 현금을 하도 안 쓰다 보니 저금통에 동전 넣을 일이 없었다. 아주 예전에 모으다가 만 돈이 조금 있었다. 어쨌든 돼지 잡아서 고기 먹은 셈이었다.


그렇게 연휴가 끝났다. 아내는 올해의 예산 계획을 세워야겠다며, 애들을 재우고 나와서 한참 동안이나 식탁에 앉아 뭔가를 했다. 긴축으로라도 운영할 돈이 있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여보. 나 내일 출근해. 열심히 벌어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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