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04(월)
연휴를 보내고 홀로 남은 아내가 걱정이 돼서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전화를 해 봤다.
“여보. 괜찮아?”
“매우 힘드네”
그 이후에도 잠깐씩 통화할 때마다 아내의 힘듦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특히 서윤이는 이제 너무 빨라졌다. 그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자꾸 현관 쪽으로 나가려고 하니, 아내는 다른 일을 하다가도 수시로 서윤이를 옮기느라 진이 빠진다고 했다. 현관으로 나가는 통로를 막는 무언가를 설치하면 간단히 끝날 일인데, 아내와 나는 왜 가만히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소윤이와 시윤이는 안 그랬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서윤이는 앞선 언니, 오빠와는 다른 모습을 많이 보여 준다. 셋째인데 처음 겪는 일이 많다. 아무튼 서윤이는 이제 엄청 빠르고, 꼭 가면 안 되는 곳만 골라서 간다. 이를테면 현관이나, 문 열린 냉장고, 화장실 등등. 시야 밖에 있는 곳이어도 소리가 들리면 타다다다닥 어찌나 빨리 기어 오는지. 요즘 우리 집의 유행어가 생겼다.
“여보. 서윤이 서윤이”
“소윤아, 서윤이 서윤이”
“아빠. 서윤이 서윤이”
“여보. 문 닫아 문 닫아”
“시윤아. 문 닫아 문 닫아”
하루 종일 챙겨 먹이고 상대하고 가르치느라 진이 다 빠졌을 아내를 위해 회심의 한 수를 준비했다. 남녀 사이란 모름지기 고난 중에 사랑을 꽃피우는 것이 아니던가. 퇴근 30분 전,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사랑하는 가영. 만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요. 조금만 더 힘내. 먹고 싶은 빵 있나요?”
“으앗. 빵으로 스윗하기 있나요”
제대로 먹혔다. 긴축 재정의 여파로 금빵령을 스스로 선포한 아내에게 가장 파괴력 있는 제안은 역시 빵이었다. 우리 애들이 누굴 닮아 이렇게 소박한가 했더니, 이유가 있었구만.
아내는 라우겐과 라즈베리 바게트 중에 남아 있는 걸 사 달라고 했다. 퇴근하면서 빵집에 들렀다. 둘 다 남아 있었다. 둘 다 샀다. 둘 다 아내 몫은 아니었고 하나는 애들 먹이려고 샀다.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빵(빵 전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두 가지 빵에 한해서)을 들고 그렇게 기분 좋은 발걸음이란.
현관으로 나오는 서윤이의 통로는 미끄럼틀로 막혀 있었다. 서윤이는 그 엎어진 미끄럼틀을 새로운 놀이기구 삼아 놀고 있었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서윤이를 지킨다는 핑계로 미끄럼틀 위에서 놀고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손에 든 빵 봉지를 보고도 별 반응이 없었다. 당연히 엄마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소윤아, 시윤아. 빵 너네 것도 있어”
“진짜여? 무슨 빵이여?”
“두 종류야. 라우겐이랑 바게트”
“어떤 게 우리 꺼에여?”
“음, 글쎄. 그냥 반반씩 먹으면 되지 않을까?”
아내는 열심히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냉장고에 있던 재료를 이용해 반찬을 만들다 보니 처음 보는 전이 등장했다. 돼지감자 가루를 이용해 만든 부침개였다. 모양과 질감은 생소해도 맛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맛은 아니었는데 소윤이와 시윤이도 무척 잘 먹었다.
소윤이는 어디서 제비뽑기를 본 건지 들은 건지 종이를 잔뜩 오려서 그 안에 숫자를 써 놓고는 제비뽑기 놀이를 하자고 했다. 열심히 호응했다. 제비 뽑아서 당첨된 사람이 아빠한테 뽀뽀하기, 엄마한테 뽀뽀하기, 서윤이한테 뽀뽀하기, 아빠 안아주기, 엄마 안아주기, 서윤이 안아주기.
자기 전에는 책도 읽어주고. 그렇게 아름답게 저녁 시간을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물론 아내와 아이들만. 오늘 저녁부터 일주일 동안, 특별새벽기도를 대신한 저녁 기도회가 있었다. 난 미리 준비하고 아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방에서 서윤이의 거센 울음소리가 먼저 들리더니, 이어서 아내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귀를 기울여 보니 소윤이와 시윤이가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안 자고 장난을 치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시윤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아빠아. 쉬이 하러 나왔더여어”
“응, 얼른 하고 들어가”
시윤이가 들어가고 나서 아내도 나왔다. 물론 지치고 화나는 표정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세게 울던 서윤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아내는 서윤이의 기분도 가라앉힐 겸, 안 자는 소윤이와 시윤이 때문에 달아오른 화도 가라앉힐 겸 나온 거다. 아내가 다시 방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들어가서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엄하게 주의를 줬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듣는데, 옆에 앉은 서윤이는 자꾸 소리를 내며 웃었다. 서윤이는 언니와 오빠가 혼이 나거나 울고 있으면 그렇게 웃는다.
아내는 다시 들어갔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고 다시 나왔다. 함께 기도회를 드리고 나서 아내는 빵을 먹으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아내가 평소보다 애정표현을 많이 하는 것처럼 느낀 건 그저 나의 착각이겠지. 고작 라우겐과 바게트 때문에 그런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