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거꾸로 가고 있다

21.01.06(수)

by 어깨아빠

새벽에 깨서 우는 서윤이와 달래지지 않아 괴로워하는 아내의 소리가 들렸다. 알람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아내와 서윤이가 안 보였다. 거실에서 자고 있었다. 정확한 상황은 모르지만, 아마 수유도 했을 거다. 수유까지 했는데 놀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울기만 하면 그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도저히 방에서는 버틸 수 없는 정도로 우니까, 거실로 나왔을 거고 거실에서 달래도 보니 잠들었을 거고, 그대로 자리를 잡았을 거다.


불도 켜지 않고 동선도 최소화했다. 혹시라도 서윤이가 깨지 않도록, 방에서 자고 있을 때 조심조심 나오는 것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주의를 기울였다.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옷도 갈아입고 가방도 챙겨서 나왔다. 어제 씻지 못하고 잔 텀블러가 가방에 있다는 게 생각났지만, 그냥 다시 그대로 가지고 나왔다.


아내는 사진으로 첫 소식을 전했다. 보통 8시에서 9시 사이에 아내에게 첫 연락이 오지만 그때 하루를 시작하는 건 아니다. 애들은 그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고, 아내도 그때 깨지만 지난밤의 긴 혈투의 후유증을 털어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나한테 사진을 보내고 연락할 때가 그나마 정신을 좀 차린 뒤인 거다. 사진 속 아이들은 항상 웃고 있다.


“여보는 괜찮아?”

“그냥저냥. 힘겨운 밤이었네”

“몇 시부터 나가서 잤어?”

“2시? 2시 반인가? 아무튼 한시 반에 깨서 수유했는데 한 시간 만에 또 깨서 울고. 도저히 안 달래져서 데리고 나감. 자다 새벽에 추워서 이불 가지고 나오고”

“고생했다”


진짜 고생했다. 잠 못 자는 고통이 정말 큰 고통인데. 낮에 아무리 힘들어도 밤에 편안하게 잘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면 버틸 힘이 생기는 법인데. 괜찮을까 걱정이었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아내가 오늘 파주에 간다고 했다. 물론 파주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것, 파주에서 오기 위해 애들이랑 씨름하는 건 무척 힘든 일이지만, 어쨌든 가면 아주 잠깐씩이라도 쉴 틈은 생긴다. 집에서는 1초도 떨어질 틈이 안 생기지만, 친정에 가면 단 5분이라도 틈을 만들 수 있으니까.


늦은 오후에 아내가 보내준 사진은, 다소 이례적이었다. 온갖 장난감을 잔뜩 펼쳐 놓고 구경하는 소윤이와 시윤이의 사진이었다. 장모님이 신년 선물이라며 잔뜩 사 주신 거다. 아, 이렇게 써 놓으면 뭐 로봇 몇 개에 공주 인형에 자동차에 기차에 뭐 한 보따리인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는 아니고 보통의 다른 아이들이 받는 거에 비하면 아주 소소하고 아담했다. 저렴한 선물이 여러 개였다. 다만 아내와 나는 장난감을 거의 사 주는 일이 없다 보니, 그걸 기준으로 치자면 ‘장난감 폭탄’이 되는 거다.


유별난 딸과 사위를 만난 덕분에 선물도 마음껏 못 해 주는 장모님의 한풀이랄까. 대신 집에는 가지고 오지 않는다. 신림동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 주신 건 신림동에 두고, 파주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 주신 건 파주에 둔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익숙해졌는지 이것에 대해서는 별로 저항이 없다.


잠시 후에는 수제비 반죽을 뜯고 있는 애들 사진이 도착했다. 이런 거야말로 할머니 집에서 할 수 있는, 여러모로 유익한 활동(?)이다. 집에서 하려면 주말에만, 내가 함께 있을 때만, 그것도 가능 여부가 불투명하다. 할머니, 할아버지 특유의 ‘그까짓 거’ 정신이 있어야 한다.


아내와 아이들은 나랑 거의 비슷한 시간에 집에 도착했다. 장모님이 싸 주신 반찬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저녁을 먹으면서 수제비 반죽을 만들어서 끓여 먹은 이야기, 선물 받은 이야기를 신나게 펼쳐 놓았다.


“아빠. 엄마가 얘기해 줬어여?”

“아니?”

“그래여? 그럼 우리가 말해 줄게여”

“그래”


다 들어서 알고 있지만, 세상에 그런 이야기는 난생처음 듣는다는 반응만 잘 해줘도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아빠가 될 수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제비뽑기를 했다. 이제 소윤이도 처음처럼 막 재밌지는 않은 것 같은데, 꼭 해야 한다고 했다. 꽂힌 놀이는 최소 얼마 동안은 해야 하는, 뭐 소윤이 나름의 어떤 선이 있나 보다.


아내와 아이들이 자러 들어간 방에서 서윤이의 매서운 울음소리가 계속 들렸다. 막 화를 내는 듯한 소리가, 꽤 오랫동안. 아내는 한참 있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나왔다.


“여보. 고생했어”

“하아. 서윤이 소리 들렸지?”

“어, 엄청 울던데”

“그러니까”


물론 그렇게 고생시키고도 서윤이는 또 깼다.


“여보. 우리 신생아 키우나?”

“하아. 그러니까”


벤자민 버튼의 시간도 거꾸로 가고, 우리 집의 막내 서윤이도 거꾸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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