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21(목)
아내는 애들을 데리고 밖에 나갔다. 낮에 아내 혼자 애들을 데리고 나간 건, 꽤 오랜만이다. 물론 어제도 파주에 다녀 오기는 했지만. 아내는 소윤이와 시윤이가 그네를 타는 사진을 찍어서 보내줬다. 그네를 참 좋아하지만 나가는 일도 드물뿐더러 가끔 나가더라도 너무 추웠다. 서윤이랑 함께 있으면 제대로 밀어주는 것도 힘들고. 아내는 2시간 정도 밖에 있다가 들어왔다.
아내는 점심 사진을 보내면서 “오늘은 양푼 비빔밥 스타일”이라고 했다. 양푼은 없고 작은 글라스락 반찬통에 담긴 밥이 보였다.
“양푼이 너무 작은데?”
“그래도 양은 충분했어요”
꾹꾹 눌러 담아도 충분하기 어려운 크기였는데, 의아했다.
나의 허리는 어제보다 조금 나아졌나 싶다가도 똑같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엉망이었다. 오늘도 애들하고 제대로 놀아주지 못했다. 어차피 퇴근하면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그 없는 시간조차도 제대로 놀지 못했다.
저녁은 돼지불고기였다. 뭐 먹는 건 다 좋아하고, 고기는 더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돼지불고기는 각별히 선호하는 음식이다. 오늘 저녁은 뭐냐고 묻는 나의 물음에
“여보. 기대해”
라고 자신감 넘치게 말한 아내의 대답이, 집에 가서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이해가 됐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배가 별로 안 고팠는지 다른 고기 먹을 때처럼 잘 먹지는 않았다. 내가 제일 잘, 많이 먹었다.
“여보. 고기 좀 더 남았는데? 갖다 줄까? 다 먹을 수 있어?”
아내의 질문이 귀여웠다. 다 먹을 수 있냐니. 아내와 애들 생각 안 하고 내 속도대로 먹었으면 진작에 끝났을 텐데.
서윤이는 기분이 안 좋았다. 의자에 앉히니 자꾸 일어섰다. 허리띠를 조여 놓으면 그건 또 싫다고 난리고. 하아. 다시 바닥에 내려놓고 과자를 하나씩 줬다. 과자를 먹으면서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잠깐씩이라도 시간을 버는 건 가능했다.
애들이랑 놀아주지 못한 아쉬움에 씻겨주기라도 했다. 고기를 먹었으니 치실질도 해 주고. 물론 아내도 엄청 힘들어 보였다. 서윤이는 계속 칭얼거리며 매달리지, 애들은 재워야 하지, 또 책도 읽어줘야 하지. 버거워 하는 아내를 위해, 책이라도 내가 읽어줄까 싶어서 애들한테 물어봤다.
“소윤아, 시윤아. 아빠가 책 읽어줄까?”
소윤이와 시윤이는 대답 대신 표정으로 ‘엄마가 읽어줬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밝혔다. 아내는 서윤이에게 젖을 물린 채,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책을 읽어줬다. 난 인사를 하고 거실에 나와 쉬었다. 책을 다 읽고 잠깐 다시 방에 들어갔는데 서윤이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잃었던 미소를 되찾고 체력도 회복했다.
“여보. 어떡하지? 잘 생각이 없어 보이네”
“그러게. 안 되면 그냥 데리고 나와”
나는 다시 거실로 나오고, 아내와 아이들은 잠을 청했다. 방에서 꽤 한참 동안 아내와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체력이 방전되었을지언정,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너그러운 밤 시간을 허락하기 위해 아내가 애쓰는 소리로 들렸다. 소윤이와 시윤이의 웃음소리도 많이 들렸다. 엄마의 체력과 정신력을 팔아서 산 고귀한 웃음이랄까.
아내는 간만에 오래도록 기척이 없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아픈 허리를 이리저리 틀어가며 쉬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누가 올 시간이 아니었다. 깜짝 놀라서
“누구세요? 누구세요?”
물었지만 답이 없었다. 복도에 자전거와 유모차 세워둔 것 때문에 경비 아저씨가 오셨나 싶었지만, 그러면 대답을 하셨을 거다. 광고 전단지 붙이러 오면 굳이 문을 두드리지 않을 테고. 그 뒤로도 두어 번 정도 더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살짝 긴장하고 문을 열어볼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아내가 보낸 카톡 알림이 울렸다(아내가 보낸 카톡 소리만 다르게 설정해 놨다).
“여보. 내가 배달시킴. 나가서 설거지랑 빨래랑 할 생각하니 갑자기 지쳐서. 주문해 버렸네”
그제서야 안심하고 문을 열어보니, 문고리에 종이 상자가 걸려 있었다. 커피와 빵이 담겨 있었고. 아내도 곧 나왔다. 덕분에 나도 맛있는 르뱅 쿠키를 먹었다. 아내는 커피를 순식간에 마셨다. ‘커스터드크림라떼’라는 이름만 들어도 단 커피라 그랬나 보다. 급속으로 당 충전을 마친 아내는,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했다.
아까 퇴근했을 때, 소윤이가 나에게 “다단계를 끝냈다”라고 얘기했었다. 소윤이가 공부하는 한글 교재의 ‘다’ 단계를 모두 끝냈다는 말이었다. 소윤이는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칭찬을 해주기는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부족했나 싶었다. 그때 나에게 달려드는 건 소윤이 말고도 두 명이 더 있으니까. 낮에도 소윤이는 아내에게
“엄마. 저 다단계 끝났어요”
라고 이야기했는데, 아내가 뭔가 집안일을 바쁘게 할 때라 아내가 다소 건성으로 반응을 했더니
“엄마. 저 다단계 끝났다는 말이에요”
라고 다시 콕 집어서 얘기하길래, 아내도 아차 싶어서 소윤이와 눈을 맞추며 얘기했다고 했다.
“소윤아, 그랬구나. 미안해, 엄마가 지금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못 들었네. 오늘은 엄마가 여유가 없어서 소윤이한테 진심을 담아서 칭찬을 못해줄지도 모르니까, 내일 엄마가 제대로 칭찬해 주면 안 될까?”
소윤이의 대답이 압권이었다.
“엄마. 당연히 괜찮져. 그리고 엄마가 대충 대답해도 저 다 이해해여”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아까 나의 칭찬도 너무 무미건조한 건 아니었는지 되짚어 보게 됐다. 소윤이가 의외로 감정에 오래 갇혀 있거나, 감정의 기복이 심한 편이 아니고 굉장히 시원시원하고 털털한 면이 많지만, 그렇다고 그걸 자꾸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 아내와 늘 다짐하는데, 우리도 모르게 잊곤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사실 칭찬이 아니라 반응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훈육할 때는 건조하게, 칭찬하고 반응할 때는 축축하게. 잊지 말아야지. 실천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