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31(주일)
소윤이와 시윤이는 어제 할머니, 할아버지와 실컷 놀고 와서 그런지 집에 있는 게 별로 답답해 보이지 않았다. 아침 먹고, 예배드리고, 자기들끼리 놀기도 하고. 오히려 내가 답답했다. 잠깐이라도 나갔다 오고 싶었다. 어디 멀리 갈 일은 없으니 나가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동네 산책은 하고 싶지 않았다.
“소윤아, 시윤아. 어디 가고 싶은 데 없어?”
“아빠아. 저느은 임짐가악”
시윤이의 말이 농담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제 갔으니 오늘은 좀 그렇다’는 어른의 정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5살의 순순한 바람이었다. 물론 순수하다고 다 들어주지는 않는다.
“아빠. 저는 호수공원 가고 싶어여”
“호수공원?”
내키지 않았다. 내 마음속 허용 거리보다 조금 멀었다. 동네 산책은 싫었지만 행정 구분상 ‘구’를 벗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왠지 사람도 많을 거 같았다. 무엇보다 내 허리가 정상이 아니었다. 소윤이는 거기 가서 온 가족이 함께 타서 페달을 구르는 마차같이 생긴(?) 자전거를 타고 싶어 했다(그게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지만). 그게 없다면 아빠가 끌어주는 자전거에, 트레일러를 달고 그걸 타고 싶어 했다. 허리가 좀 괜찮나 싶었는데 금세 또 안 좋아졌다. 정확히 말하면 나아지지 않고 계속 비슷한 상태다.
“소윤아. 아무래도 호수공원은 조금 힘들 거 같은데”
“왜여?”
“아빠 허리가 너무 아파서 가도 그 자전거는 못 탈 거 같아. 만약에 가도 너희끼리 자전거 타야 될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으면 가고”
“그래여? 음, 그럼 그냥 가지 말자여”
어디 가고 싶냐고 먼저 물어봐 놓고는 이래저래 안 되는 이유를 늘어놓는 아빠를 용서하렴.
지난주에 갔던 동네 개천 옆에 딸린 공원에 가기로 하고 준비하는데 아내가 다른 곳을 제안했다. 차 타고 지나가다가 본, 정말 생뚱맞은 장소에 조그맣게 만들어 놓은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그야말로 큰 길가에 있는 곳이니 놀이터는 아니고, ‘누가, 저기에, 저런 걸 만들었지?’ 하는 생각이 들법한 곳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거기를 보고는 ‘다음에 꼭 한 번 와 보자’라며 관심을 보였다. 아내가 거기를 가 보자고 한 거다.
집에서 10분 정도 거리였다. 그 짧은 시간에 서윤이는 잠들었다. 아내와 서윤이는 차에 남고 나와 소윤이, 시윤이만 내렸다. 막상 가서 보니 별 거 없었다. 아무 의미 없던 공터에, 푹신한 바닥을 깔고 동네 놀이터에 없는 신기한 놀이기구 두 개 정도 갖다 놓은 게 끝이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도 드러 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바닥에 땅따먹기(공식 이름이 맞나 모르겠다. 커다란 네모를 8개 공간으로 나누고 각 공간에 1부터 8까지 쓴 다음, 1에 돌을 던져서 안착하면 ‘깽깽이’와 ‘양발’로 나머지 숫자 공간을 밟고 8까지 도달한 뒤 다시 역순으로 2까지 와서 1에 놓인 돌을 집는 놀이)를 위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거기서 한참 놀았다.
이런 걸 하면 시윤이가 아직 한참 ‘아기’라는 걸 느낀다. 소윤이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꽤 능숙하게 각 단계를 성공하지만, 시윤이는 아직 아니다. 규칙은 잘 이해한 거 같은데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 일단 ‘깽깽이’가 안 된다. 부쩍 말도 잘 하고, 할 줄 아는 게 많아져서 컸다고 느낄 때가 많은 요즘, 시윤이의 그런 어설프고 아기 같은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반가웠다. 소윤이 때도 그랬던 것처럼. 점점 사라져 가는 ‘아기 시윤이’, ‘어설픈 시윤이’의 모습을 만나는 건 참 소중하다. 혼자 보는 게 아까워서 열심히 영상에 담았다.
잠시 커피를 사러 간 아내가 전화를 했다. 형님(아내 오빠)네랑 통화를 했는데 잠깐 집에 오겠냐고 했다면서, 갈 거냐고 물었다(형님네 집에서 차로 5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곳이었다). 나야 상관없었고 소윤이와 시윤이가 어떨지 몰랐다. 삼촌, 숙모 집에 간다고 하면 당연히 좋겠지만 대신 밖에서 노는 시간이 줄어드는 건 아쉬울 테니. 소윤이와 시윤이는 놀이터(?)옆 공터에서 놀고 있었다. 돌멩이가 깔린, 주차장으로 쓰는 공간이었는데 돌멩이를 가지고 둘이 뭔가 규칙을 정해서 놀았다. 재미있게.
“소윤아, 시윤아. 엄마가 숙모랑 통화했는데 놀러 오라고 했다는데, 너네는 어떻게 할래?”
“좋아여”
“그래? 숙모 집에 가면 이제 밖에서는 못 노는데 괜찮아? 아니면 조금 더 놀다가 갈래? 지금 바로 갈래?”
“음, 그럼 조금만 더 놀다가 가도 돼여?”
“그래, 그럼”
한 20분 정도 더 놀았다.
삼촌과 숙모 집에 들어가서 옷을 벗고 손을 씻자마자 바닥에 앉더니 보드게임을 펼쳤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숙모. 이거 하자여. 빨리 와여”
거의 내내 보드게임만 했다. 보드게임이 다 좋은데, 시윤이가 문제다. 문제라기보다는 배려가 필요하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배우기에는, 아직 규칙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조차 힘들다. 소윤이게 항상, 규칙을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동생을 배제하지 말고 배려해 가면서 어떻게든 함께 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가르치기는 하지만, 소윤이도 집에서는 그나마 그게 잘 돼도 이렇게 누군가를 만나면 그럴 정신을 놓치곤 한다. 얼마 전에는 시윤이가 이런 얘기를 했다.
“누나는 집에 있을 때는 나랑 잘 노는데 누구 만나면 나랑 안 노니까 저는 그게 속상해여”
물론 시윤이도, 자기가 잘 모르고 배려 받아야 하는 입장이면 알아서 기어야 하는데 또 자기 잘났다고 고집을 피울 때도 많긴 하다. 아무튼 시윤이는 오늘도 나름의 배려 속에 게임에 참여했지만, 결국 울고 말았다. 자기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니까 화가 났나 보다. 정말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났을 때만 보이는, ‘드러누워 울기’를 보여줬다. 그럴 때는 울음의 색도 다르다. 시윤이를 불러서 안아주며 위로도 하고, 지는 일은 얼마든지 생긴다고 알려주기는 했지만 길게 붙잡고 이야기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시윤이는 그 뒤로는 게임에 참여하지 않았다. 삼촌이랑 따로 도미노를 하며 놀거나 혼자 놀았다. 그때쯤 소윤이와 시윤이는 놀이터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고, 소윤이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도 숙모와 보드게임 하는 게 너무 재밌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시윤아. 시윤이는 아빠랑 먼저 놀이터에 갈까?”
시윤이는 잠깐 고민하더니 그러겠다고 했다. 오늘은 왠지 시윤이가 불쌍했다. 시윤이는 놀이터에 가서 계속 그네만 탔다. 허리가 온전치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그네를 밀었다. 시윤이는 그네를 타면서 많이 웃기도 했지만, 계속 누나를 찾았다.
“아빠. 누나는 언제 나올까여어”
“그러게. 곧 나오겠지. 누나 없으니까 심심해?”
“네”
곧 소윤이도 나왔고, 조금 더 놀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해가 졌고, 집에 가서 저녁 차리기가 굉장히 귀찮은 시간이었다. 아내와 나는 아이들은 듣지 못하게, 은밀한 소리로 귀찮은 걸 표현했다.
“여보. 저녁 차리기 귀찮다”
“그러니까. 언제 가서 또 먹이고 씻기냐”
“그러게”
아마 누구 하나라도 ‘그냥 사 갈까?’라고 했으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서 가도 안 차린다 뿐이지 먹이고 씻기는 본질은 똑같으니 그냥 집에 있는 걸로 차려 먹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부와 김, 김치, 시금치 같은 기본 반찬을 놓고 먹었다. 난 그중에서도 김치만 먹었다. 무엇보다 옆에 앉힌 서윤이가 정신없게 만들었다. 잘 앉아서 이유식 먹을 때는 빨리빨리 달라고 소리 내고, 그러다 느닷없이 일어나서 탈출하려고 난리고. 다른 반찬 집어먹을 여유가 없었다. 또 소윤이와 시윤이가 너무 잘 먹기도 했다. 처음 차려진 양과 애들이 먹는 속도, 의지를 보면 대략 계산이 선다. 내가 참전해도 되는지 아니면 조금 자제해야 하는지. 오늘은 자제해야 하는 날이었다. 서윤이 덕분에 정신없었던 게 더 크긴 했다.
애들 샤워를 시켜야 했는데 미뤘다. 언제라고 기약도 없이 미뤘다. 일단 오늘은 너무 귀찮았다.
“괜찮아. 겨울이니까”
난 거의 맨날 샤워를 한다. 겨울이지만.
소윤이와 시윤이를 씻기고, 재우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어제가 편하긴 했구나’
그래도 불편한 게 낫다. 세 녀석들과 함께 불편한 게 낫지, 얘네 없는 편한 삶은 이제 상상도 잘 안된다. 상상이 된다 한들 바랄 리도 없고. 우리의 불편하지만 행복한 삶을 위해, 아빠는 또 새벽을 깨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