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01(월)
서윤이 턱이 여전히 빨갛다. 침독이 올라서 볼과 턱이 벌겋게 달아오른 게 한참 되었다. 수시로 크림을 발라줘서 볼은 좀 나아졌는데, 턱은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 아내는 셋 중에 서윤이가 피부가 제일 약하다며 걱정을 하고 있다.
아침에 아내가 카톡을 보냈다. 표정이 밝은 서윤이의 사진과 함께.
“피 좀 봐”
사진 한쪽 귀퉁이에 찍힌 휴지에 묻은 빨간 피가 그제서야 보였다.
“어디 부딪힌 거야?”
표정이 너무 밝은 게 이상했다. 꽤 아팠을 텐데. 게다가 피는 보이는데 상처 부위가 안 보였다. 일어서다가 입 안쪽을 부딪힌 건가 싶었다. 잠시 후 아내와 통화를 했다. 알고 보니 아내는 침독이 올라서 까슬까슬해진 서윤이의 턱에서 피가 좀 난 걸 보라는 말이었다. 서윤이 옷에 살짝 묻은 걸 보라는 말이었고. 아까 내가 본 빨간 피는, 피가 아니었다. 서윤이 옷에 달린 토끼가 하고 있는 리본이었다. 어쩐지 표정이 너무 밝더라니.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 의사 선생님이 통증 지수를 1에서 10까지의 숫자로 표현해 보라고 하셨다. 그때는 6에서 7 정도 된다고 얘기했다. 오늘은 한 4에서 6을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었다. 계속 그 안에서 오르락내리락한다. 이번에 허리가 아프면서 덜컥 겁이 났다. 이렇게 점점 안 좋아져서 평생 허리 통증 환자로 살기에는, 아직 젊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오랫동안 애들도 안아주고 힘센 아빠 노릇을 하려면,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퇴근하니 역시나 정신이 없었다. 아내는 저녁 준비에 한창이었고, 소윤이와 시윤이는 신나게 놀다가 뛰어나와서 인사를 하고는 다시 하던 걸 계속했다. 서윤이가 안 보였다. 웬일로 그 시간에 자고 있다고 했다. 입고 있던 옷을 벗으려고 작은방에 들어갔는데, 의자에 옷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순간적인 짜증 지수가 확 치솟았다.
‘그래, 아내가 이걸 정리할 틈도 없이 바쁘고 정신이 없었겠지’
라며 애써 아무것도 아닌 일 취급하려는 나의 의지와, ‘그게 아니라 그건 애들 없을 때도 똑같이 그랬잖아’라는 악마의 속삭임이 충돌했다. 눈 한 번 질끈 감고 나왔다. 그래서였을까, 애틋해도 모자랄 월요일 밤에, 나도 모르게 소윤이와 시윤이에게 박하게 대했다. 나 홀로 매 순간순간이 위기였다. 끓는점에 도달한 주전자처럼.
다들 자러 방에 들어가자 스르륵 가라앉으며 빠른 후회가 밀려왔다. 애들한테 다정하지 못했던 게 좀 미안했다. 그렇다고 뭐 화를 내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말 그대로 조금 더 다정하지 못한 게. 잠시 누그러졌던 마음은 작은방에 들어가니 다시 끓어올랐다. 이제 보는 사람도 없겠다 아까보다 더 빠르고 높게 치솟았다. 의자에 있던 옷을 바닥에 다 내팽개쳤다. 자동차 사고도 대인 사고가 가장 위험하다. 다르게 말하면, 대물 사고나 자차 사고는 뭐 괜찮다는 거다. 대인 분노는 위험하지만 대물 분노, 자가 분노는 괜찮지 않을까 싶다. 땅바닥에 옷을 내던지면서 혼자 씩씩거렸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원래 그러려고 했다. 소중하게 오래도록 써야 하는 나의 허리를 위해. 걷고 뛰려고 했다. 거기에 화도 삭힐 겸. 아내에게 말을 하지 않고 나왔기 때문에 애들을 재우고 나온 아내에게 카톡도 오고 전화도 왔다.
1시간 정도 걷고, 뛰니 땀이 많이 났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과 오줌, 확찐자가 된 남자가 흘려야 할 것은 땀. 머리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증기와 함께 쌓인 화도 많이 빠져나갔다.
“여보. 어디 갔다 왔어?”
“아, 그냥 좀 뛰고 왔어”
“갑자기?”
“운동하려고. 그래야 애들이랑 오래 살지”
“여보. 아까 화났어? 옷 다 바닥에 던져 놨던데”
“아니야 무슨”
이미 화가 식은 사람이, 화가 잔뜩이었을 때 남긴 흔적을 누군가 보고, 화가 났었냐는 질문을 받는 것처럼 머쓱한 일이 세상에 또 없다. 샤워하러 들어간 사이 서윤이가 깼고, 아내는 카톡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금방 재우고 다시 나왔다.
다른 날처럼 아내와 수다를 떨다가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