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되돌리는 마법

21.02.10(수)

by 어깨아빠

아내와 아이들은 낮에 파주에 갔다. 이번 설 연휴에는 양쪽 부모님 댁 모두 가지 않기로 해서, 그걸 대신한 사전 방문이기도 했고 거의 매주 시행하는 정기 방문이기도 했다. 연휴 전날이라 나도 조금 일찍 퇴근할 것 같았다. 다만 정확히 몇 시쯤인지는 결정이 되지 않아서 끝나는 대로 파주에 가기로 했다. 파주에 가는 김에 미용실도 예약을 했다.


생각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퇴근했다. 기쁜 소식을 아내에게 알리고 바로 파주로 갔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딸기를 먹고 있었다. 얼핏 봐도 할머니 집의 자유로움에 한껏 취한 분위기였다. 시윤이도 미용실에 가야 했다.


“시윤아. 아빠랑 머리 자르러 가자”

“네? 어디들 간다구여어?”

“아, 엄마가 말 안 해주셨어?”

“네에. 어디들 간다구여어?”

“미용실. 머리 자르러”

“왜여어?”

“시윤이랑 아빠랑 머리가 많이 길었잖아”

“가기 시른데에”

“왜?”

“딸기 다 먹으면 어떡해여어”

“에이. 괜찮아. 딸기 많으니까 또 씻어서 먹으면 되지”

“안 갈래여어”

“뭘 안 가. 그건 시윤이가 결정하는 거 아니야. 갔다 와야 돼”

“아빠아. 그러다 시간 다아 가면 어떡해여어”

“안 그래. 오늘 저녁도 먹고 갈 거니까 시간 많아. 금방 자르고 와”

“빠주 할머니 집에저 가까워여어?”

“어, 금방 가. 머리도 금방 자르고”


카시트를 조수석에 옮겨서 태웠다. 가까운 거리고, 둘이 이동하는 일이 생기면 종종 이렇게 한다. 데이트 느낌을 주기 위한 장치다. 시윤이의 원래 성격도 세거나 우악스럽지 않지만 둘이 있으면 더 순한 맛이 된다. 희한하게 누나랑 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 더 아기 같다. 시윤이도 언젠가는 남자 냄새 물씬 풍기는 아들이 된다는 걸 생각할 때마다, 너무너무 아쉽다. 부디 나 같은 아들이 아니길 바라지만, 애 셋을 키워 보니 그건 헛된 희망이라는 걸 많이 느낀다. 소름 끼치도록 내 자식들 같을 때가 허다하다.


아내와 서윤이도 미용실로 왔다. 당근 마켓으로 산 물건을 받으러 나왔다가 바로 집(처가)으로 가지 않고 미용실로 왔다고 했다. 홀로 남은 걸 즐거워하며 만끽하고 있을 소윤이가 생각났다. 엄마와 아빠의 통제권에서도 벗어났고, 만사를 동생과 나눠야 하는 ‘공유제’에서도 해방되었으니 얼마나 신났을까 싶었다. 안 그래도 나오기 전에, 당근 마켓 물건도 내가 찾아가겠다고 했더니 ‘엄마가 찾으러 갔으면 좋겠다’면서 속내를 드러냈다.


저녁으로는 족발과 치킨을 먹었다. 족발은 나와 장인어른의 것, 치킨은 아내, 장모님, 아이들의 것이었다.


“아빠. 저는 족발은 안 먹고 치킨만 먹을래여”


소윤이는 요즘 조금씩 식성의 변화가 생기고 있다. 돼지고기를 먹을 때 비계 부분을 즐겨 먹더니 요즘에는 잘 안 먹는다. 더 커서 그런가 같은 음식이어도 선호하는 바가 뚜렷해졌다. 족발을 안 먹겠다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었다. 예전에는 엄청 잘 먹었다.


치킨이 생각보다 매콤했다. 기본 치킨을 시켰는데도 요즘에는 밑간 자체를 약간 맵게 하는지 어디서 시켜 먹어도 비슷하다. 아직 매운맛을 능숙하게 즐기지 못하는 소윤이와 시윤이에게는 버거울 정도의 매운맛이었나 보다. 소윤이는 말을 번복했다.


“아빠. 매워서 못 먹겠어여. 족발 먹을래여”


처음에 왜 안 먹는다고 했는지 궁금할 정도로 잘 먹었다. 배불리 먹고 한참 놀았다. 소윤이와 시윤이가 할머니, 할아버지 집을 떠나는 걸 아쉬워하지 않을 정도로 실컷 놀았다. 설에 드리지 못하는 세배도 미리 했다.


엄청 늦은 시간에 도착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둘 다 잠들지 않고 무사히 왔다. 예전에는 집에 오는 길에 잠들면 좋아했는데, 요즘은 꼭 그렇지가 않다. 셋 다 잠들면 집까지 한꺼번에 옮기는 게 불가능하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그렇다. 물론 셋 다 자는 일이 자주 벌어지지는 않는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어차피 금방 잘 테고, 서윤이가 어떻냐에 따라 아내의 퇴근 시간이 결정될 터였다. 거실에 앉아 아내를 기다리는데 카톡이 왔다.


“막내 똥 쌈. 황당하다”


밥 먹을 때 똥 싸는 건 그저 밥맛이 떨어질 뿐이고, 방금 기저귀 갈았는데 똥 싸는 건 그저 귀찮을 뿐이고, 밖에서 똥 싸는 건 그저 번거로울 뿐이다. 그에 비해 거의 다 잠들었는데 똥 싸는 건 시간을 되돌리는 거나 마찬가지라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경우다.


아내는 서윤이를 데리고 나왔다. 똥과 함께 아내의 수고로운 수유와 토닥임도 씻겨 내렸다. 연휴의 첫 밤은 외로운 독수공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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