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21(수)
이틀 연속으로 대중교통을 타고 갔더니 피로가 배가 되는 것 같아서 오늘 하루는 쉬어 가기로 했다. 아, 물론 진짜 쉬는 건 아니고 차를 가지고 가기로 어제 자기 전에 마음을 먹었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을 지나가며 속으로 얘기했다.
'전 오늘 먼저 갑니다'
다행히 소윤이는 특별히 더 아파지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아침에 잠깐 본 거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최상의 컨디션은 아닌 듯했다. 오후쯤 나란히 앉아 뻥튀기를 들고 있는 밝은 표정의 소윤이와 시윤이 사진을 받았다.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한결 안심이 됐다. 아내와 소윤이는 집에서 호떡을 만들어 먹었다고 했다. 소윤이가 굉장히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호떡 만들기도, 먹기도. 소윤이가 전화를 했다.
"아빠. 호떡 먹을 거에여?"
"아빠? 아빠는 괜찮아. 소윤이 먹어"
"아빠 안 먹을 거에여?"
"응. 소윤이 많이 먹어"
"알았어여"
아빠 먹을 것까지 챙겨주는 딸이 굉장히 기특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내가 전화를 이어받았다.
"여보. 뭐야?"
"뭐가?"
"소윤이가 뭐라고 그랬어?"
"나 호떡 먹을 거냐고 물어보던데?"
"그래서? 안 먹는다고 했어?"
"응"
"그래서 그랬구나"
"뭐가?"
"아니. 호떡 하나 남은 거 아빠 줄 거라고 못 먹게 하고 있었거든. 소윤이는 계속 눈독 들이고. 그랬더니 자기가 방에 혼자 들어가서 여보한테 전화하고 물어본 거야"
"아 진짜?"
그랬구나. 아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었구나. 그랬구나. 그냥 니가 하나 더 먹고 싶은데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구나. 그랬구나.
오후에 시윤이 재울 무렵 505호 사모님과 통화를 했는데 옆에서 그걸 듣고 있던 소윤이가
"이모. 나 시윤이 재울 동안 이모네 집에 가 있어도 돼여?"
라고 물어봐서 소윤이는 505호에 놀러 갔다. 정신없이 놀다가 아내가 들어가서 자자고 하니까 쭐래쭐래 따라 들어가던 시윤이는 갑자기 거실을 가리키며
"어쪄. 어쪄(없어 없어)"
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나가 없다는 걸 그때야 알아차렸나 보다. 한참 동안을
"어쪄 어쪄"
하며 누나를 찾았다고 했다.
차를 가지고 출근하면 생기는 또 하나의 장점은 퇴근이 빨라진다는 것. 물론 내 입장에서도 명확히 장점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으나 아내는 분명한 장점으로 여기고 있다. 무려 1시간을 앞당길 수 있으니. 아내는 많이 많이 지쳐 보였고 소윤이는 아내 말을 엄청 안 듣고 있었다.
"불통이야 불통"
아내의 표현대로 소윤이는 아내의 말을 마치 무시하듯 들은 체 만 체하고 자기 할 일을 했다. 반항과 예민함이 결합된 무언가가 소윤이의 내면에 있는 것 같았다. 상대가 다 큰 어른이라도 자기 말을 듣고도 무시하면 열 받는데 그 상대가 4살 짜리면 '아이구, 어리니까 그렇구나' 하고 이해가 되기는커녕 더 열이 오른다. 그렇지만 화낼 수 없다. 아니, 낼 수는 있지만 그럼 엄청난 자책과 후회가 따라온다. 그래서 부모 노릇이 힘들다.
저녁 준비하기 전까지는 열심히 몸으로 놀고 저녁이 다 차려지고 나서는 둘의 저녁을 책임졌다. 다행히 시윤이도 내가 먹여주는 걸 거부하지 않았다. 밥 다 먹고 아내가 차례대로 애들을 씻기는 동안 난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설거지를 했다. 애들이 앉았던 아기의자도 박박 닦고. 뭔가 빠릿하고 부지런하게 그렇게 움직였다. 수요일이니까.
"소윤아. 아빠가 또 엄청 부지런해졌네? 수요일이라서 그런가?"
응, 맞아.
막상 아빠가 운동하러 간다니까 가지 말고 자기 재우고 가라며 소윤이가 잠깐 매달렸지만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다소 진심이 포함되어 있긴 하더라도 그냥 한 번 해보는 말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부디 둘 다 금방 잠들고 아내의 자유가 빨리 찾아오길 바라며 인사를 하고 방문을 닫았다. 시윤이가 낮잠을 거의 2시간이나 잤다고 해서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아내는 오후 5시쯤 축구할 때 입는 옷을 손빨래로 빨고 세탁기로 탈수를 무한 반복해서 말려 놓는 지극정성을 보여줬다.
"이게 여보의 축구에 대한 나의 지지야"
여보, 고마워.
아내의 사랑이 담긴, 소파에 곱개 정리된 옷을 입고 찬바람을 뚫고 축구장으로 갔다. 신나게 한게임 뛰고 나서 휴대폰을 봤는데 전화가 와 있었다. 무슨 일인가 깜짝 놀라서 전화했다.
"어. 여보 전화했네. 왜?"
"아. 그냥 애들 잔다고"
"아. 다행이네"
"알았어. 재밌게 하고 와"
뭔가 딱 좋다. 이틀 동안 스트레스도 쌓이고 영과 육이 지쳐갈 때쯤 축구하면서 다 날려버리고. 겨울에는 잠시 휴식기가 있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축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아내에게 전화를 했는데 소파에서 졸고 있었다고 했다. 이디야에서 아이스바닐라라떼를 한 잔 사서 들어갔다. 아내는 만족스럽게 마셨다. 어제처럼 아내랑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인지 모습은 드러내지 않았는데 아내는 저렇게 느릿느릿 나오는 건 시윤이라고 했다. 한참 동안 시윤이는 걸어 나오지 않았다. 문을 닫은 것도 아니고 문 연 채로 서 있는 것 같았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낮에 낮잠 자고 일어나서도 그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내가 자리를 옮겨 시윤이랑 눈을 마주치니 그제야 나한테 와서 안겼다. 아내는 소파에 앉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었는데 시윤이는 손으로 가리키며 엄마를 부르면서도 선뜻 다가가지는 않았다.
"소윤아. 엄마 어딨어?"
"음마. 음마"
"시윤이가 가서 만져 봐"
"이이이이"
아내가 이불을 걷고 얼굴을 보여주자 아내에게 가서 안겼고 그 뒤로는 다시 나한테 오지 않았다. 아내가 시윤이를 데리고 들어갔는데 한 10여분 뒤에 카톡이 왔다.
[여보, 얘 안 잠]
나도 방으로 들어갔다.
"시윤아. 아빠 옆으로 올래?"
희한하게 자려고 누워서 내 옆으로 오라고 하면 와서 눕는다. 꼭 강아지처럼, 쓰다듬고 살살살살 간지럽히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어제보다 더 순순히 정말 내 옆에서 잘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아무리 귀엽고 예뻐도 한 번 잠들었으면 잠에서 깨도 그냥 각자 알아서 다시 잤으면 좋겠는데.
왜 꼭 엄마, 아빠를 찾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