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오늘은 리허설이었어

21.03.17(수)

by 어깨아빠

서윤이는 새로운 개인기를 장착했다. 많은 아기들이 인생 첫 개인기로 선택하는 ‘예쁜 짓’이다. 아직 정확히 볼 중앙을 조준하지 못해서 귀도 찌르고 눈꼬리도 찌르지만, 검지를 쭉 펴고 볼을 향해 이동하긴 한다. 아내와 내가 공통으로 느끼는 건데, 서윤이가 요 며칠 사이에 확 커버렸다. 자라는 아이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즐겁지만 한편으로는 옛 모습을 잃게 돼서 아쉽기도 하다.


서윤이는 여러 영역에서 고집도 세졌다. 특히 원하는 걸 가지지 못했을 때나 가지고 있던 걸 빼앗겼을 때 두드러진다. 밥 먹을 때 넙죽넙죽 잘 받아먹던 녀석이 요즘은 자꾸 숟가락을 달라고 한다. 안 주면 짜증 내면서 울고. 벌써부터 걱정이다. 나중에 말귀를 알아들을 때가 되면 훈육을 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그렇다고 그대로 두면 망나니로 자랄 테니 하긴 해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 이유를 막론하고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할 거 같은데. 그냥 서윤이가 알아서 바른 말과 행동만 하면 좋을 텐데, 그럴 리는 없겠지. 애석하게도 소윤이, 시윤이보다 더 센 느낌이다. 누구 하나 미워하고 질투하는 사람 없이 모두 ‘우쭈쭈 부대’를 자처하니 그럴 만도 하다. 자기 오빠 정도나 경쟁 상대로 여기려나.


아내와 아이들은 오후 늦게 밖에 나갔다. 장도 보고 바람도 쐴 겸 나갔다고 했다. 나는 저녁에 일정이 있어서 시간이 많지 않았다. 거의 집에 가서 옷만 갈아입고 나와야 했다. 부지런히 집에 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여보. 어디야?”

“아, 우리 아직 밖이야. 여보는?”

“나 집에 왔는데”

“아 벌써? 여보한테 전화라도 해 볼걸. 그럼 여보가 여기로 와서 잠깐 애들 얼굴 보고 갈래?”

“그래. 알았어”


옷을 갈아입고 나가서 차에 탔는데 다시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이미 출발했으니 동네 상가 쪽에서 보자고 했다. 저녁으로 먹을 김밥을 사야 한다고 했다. 잠시 후 동네 상가에 차를 대고 아내와 아이들을 만났다. 아내가 김밥을 사러 간 사이 소윤이, 시윤이와 함께 놀이터에 갔다. 20여 분 남짓한 짤은 시간이었지만 아예 못 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아빠가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기구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매달리기, 봉 잡고 내려오기 등등. 그러고 보니 놀이터에서 논 것도 오랜만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밖에 많이 못 나가긴 했나 보다.


아내는 김밥을 사 왔고, 난 아내와 아이들에게 인사를 고하고 헤어졌다. 엄마 혼자 너희들을 챙기고 재워야 하니 특별히 엄마 말씀을 잘 들으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났는데, 10여 분 만에 유언을 철수하게 됐다.


“여보”

“어, 무슨 일이야?”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네?”

“뭐? 진짜?”

“어. 나 다시 집으로 갈게”


날짜를 착각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오늘은 끝난 줄 알았던 아빠와의 만남이 다시 허락되자 기뻐했다. 아내에게는 그다지 좋을 게 없었다. 이미 남편의 부재에 맞춰 마음의 각오도 다지고 애들도 부지런히 씻겨 놓은 뒤였다. ‘어쨌든 오늘은 끝냈다’라며 한숨을 돌렸는데, 내일 다시 남편의 부재가 생긴 거다.


아내가 이미 애들을 씻겼으니, 내가 책이라도 읽어주겠다고 했다. 소윤이와 시윤이는 씻는 것도, 책 읽는 것도 ‘엄마’가 해주는 걸 더 좋아한다. 내가 보기에는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본능에서 비롯된 엄마를 향한 사랑의 습관적 확장이랄까. 쉽게 말해 별 이유 없이 무조건 엄마를 찾고 본다는 거다. 막상 내가 책 읽어주면 재밌어하면서.


시윤이가 책을 고르는 날이었는데 엄청 긴 책을 골라왔다. 아내가 지난번에 읽었을 때 무려 20분이 걸렸다고 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읽었는데, 역시나 생각보다 만만하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떤 글이든 20분 동안 소리 내어 읽을 일이 그렇게 많지가 않다. 꽤 인내와 집중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중간에 몇 번이나 ‘이제 못 읽겠다. 나머지는 내일 읽자’라고 할 뻔했지만 잘 참았다. 그랬으면 소윤이와 시윤이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거다.


긴 책도 끝까지 잘 읽어줬으니 누워서 떠들지 말고 바로 자야 한다는 마지막 유언까지 남기고 방에서 나왔다. 마지막 말이 좀 먹혔는지 아내는 평소보다 빨리 방에서 나왔다.


여보. 미안. 어쩌다 보니 오늘이 내일의 리허설이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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