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옷 입은 그대에게, 커피를

21.03.17(목)

by 어깨아빠

아내가 상처 난 발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애들 블록을 밟았는데 살이 까졌고, 생각보다 매우 아프다고 했다. 사실 어제 시윤이도 아내랑 똑같이 다쳤다. 시윤이는 엄청 아프다고 했다. 난 다쳤을 당시에는 없었지만, 퇴근하고 저녁 먹을 때도 아프다고 했다. 사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내도 비슷했던 모양이다. 자기도 똑같이 다치기 전까지는.


“생각보다 매우 아프네. 더 많이 공감 못 해줘서 미안하다”


역시 애나 어른이나 공감이 필수인 시대다. 아이들의 감정을 십분 공감하라는 걸 귀에 못이 박히게 듣고 배웠는데, 여전히 이러고 있다. 사실 이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긴 하다. 뭐 먹다가 손에 좀 묻어도 묻을 때마다 닦지 말고 나중에 다 먹고 물로 씻으면 된다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막상 내가 묻어보니 너무 찐득거려서 불편하고. 양치하고 물 뱉을 때 사방팔방에 튀지 않게 조심하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막상 내가 뱉어보면 안 튀게 뱉는 게 생각보다 어렵고. 손 씻을 때 대충대충 씻지 말고 꼼꼼하게 씻으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막상 나는 손에 거품이 덕지덕지 묻은 채로 나오고.


얘들아, 아빠가 생물학적으로 너희 탄생에 일조해서 그렇지 아빠도 그냥 사람이야.


퇴근하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아내의 복장이었다. 잠옷 차림 그대로였다.


‘오늘은 한 번도 밖에 못 나갔구나. 얼마나 답답할까’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제 잘 때 입은 옷 그대로였다. 아내는 퇴근하는 나에게 커피가 마시고 싶다며 카페에 들렀다 올 수 있냐고 물었다.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고 커피를 사 왔다. 아내의 모습을 보니 그러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 나갈 수 있게는 못 해줘도 바깥 커피라도 마시게 도와준 셈이라 다행이었다. 이렇게 쓰니 엄청난 애처가 난 줄 알겠지만, 바깥공기 한 번도 못 마신 아내를 집에 두고 나가야 했다.


“여보. 얼른 가”

“어, 알았어. 신경 쓰지 마”


애들은 저녁을 먹었다. 아내는 낮에 점심을 늦게 먹어서(서윤이 똥 닦아주고 어영부영하다 보니 4시가 다 되어서 먹었다고 했다) 배가 안 고프다고 했다. 늦게 먹은 탓도 있겠지만 도무지 입맛이 돌 수 없는 고단한 하루를 보내서 그렇기도 했을 거다. 차마 발길이 안 떨어졌다.


“여보. 얼른 가라니까”

“어, 갈게”

“왜. 마음이 무거워?”

“그렇지 뭐”

“괜찮아. 얼른 가”


마음을 굳게 먹고(누가 보면 뭐 나라 구하러 가는 줄 알겠네) 집에서 나왔다. 아내는 9시가 막 넘었을 때 카톡을 보냈다. 보글보글 맛있게 끓고 있는 라면 사진과 함께.


“헤헤. 라면 불 끄기 직전인데 깸^^”


누가 깬 건지 주어가 생략됐고, 웃음 이모티콘을 동반한 메시지였지만 난 알았다. 누가 깬 건지,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건지.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라면을 먹지도 못한 채 젖을 물려야 하는 수유부의 삶이란. 아내의 슬픈 현실을 작게나마 위로하기 위해 편의점에 들러 과자 하나와 음료수 하나를 샀다.


“여보. 라면은?”

“여보. 대박이야”

“왜?”

“막 울길래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일단 급하게라도 먹었거든?”

“어”

“우는소리가 막 심하지 않길래 서서 계속 먹었어”

“어”

“그랬는데 그냥 혼자 다시 자더라”

“진짜?”


아내가 이겼다. 아니 라면이 이긴 건가. 아니면 모든 걸 아는 서윤이가 져 준 건가. 아무튼 아내는 불안함에 떨며 먹긴 했지만, 적어도 불어 터진 라면을 먹는 일은 모면했다. 맛있게 먹었는지 모르겠다. 방 안에서 아기 우는소리를 들으며, 불안함에 떨며 서서 먹는 라면이 무슨 맛일지 나는 모르겠다. 이유식 공급이 조금만 늦어져도 얄짤없이 울어 젖히는 서윤이를 옆에 두고 허겁지겁 먹는 밥맛이랑 비슷하려나.


어쨌든 모든 걸 마치고 거실에서 잉여로운 시간을 만끽하는 아내의 표정과 기운이 제법 괜찮았다. 힘든 건 언제나 힘들고 고단하지만 그게 회복이 되는 날도 있고 안 되는 날이 있다. 다행히 오늘은 회복이 잘 됐나 보다.


아내에게 한차례 자비를 베푼 서윤이는 칼같이 깨던 시간(자정 전후)에 깨서 울었다. 아내는 여전히 서윤이 울음소리가 들리면 그제서야 양치도 하고 잘 준비를 시작한다. 그래도 요즘은 서윤이가 나에게 안겨서도 울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기분이 좋거나 아빠를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그저 유예 시간을 줄 뿐이다.


‘잠시 아빠에게 안겨 있어 줄 테니 신속하게 마치세요’


이런 느낌이랄까. 엄마의 행동 하나하나를 예의주시하며 압박을 한다. 좀 웃겨 보겠다고 어쭙잖게 장난을 치면, 바로 짜증을 내며 운다. 난 그냥 가마다. 인간 가마. 그러다 아내에게 안기면, 그때 나한테도 웃음을 띄우고 그런다. 괜찮다. 안겨 있는 게 어디냐.


그래도 서윤아. 이제 밤에 깨는 건 좀 줄여 보자. 너 곧 단유 해야 된대. 우리 좋게 좋게 하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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