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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운오리새끼 민 Oct 24. 2018

사즉생생즉사(死卽生生卽死)의 이순신

불운한 참모

임진왜란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이순신은 왜 죽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마쳤어야 했을까? 그의 말처럼 사즉생생즉사(死卽生生卽死)의 마음으로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 임했던 것일까? 즉, 살기 위해 그렇게 끝까지 왜적을 뒤쫓아간 것일까?

권율 장군처럼 끝까지 살아남았을 수는 없었던 것인가? 물론 권율도 행주대첩의 승리로 도원수에 올랐었지만 도망병을 즉결처분한 사건으로 해직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처럼 두 번이나 감옥에 간 적도 없었으며, 임금에 의해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없었다.

이순신의 죽음에는 몇 가지 의문이 있다. 즉, 전사의 의미보다는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사즉생생즉사’ 의 말처럼 그는 죽음으로서 영원히 사는 것을 택한 것이 아닐까? 

이순신이 왜 이런 결정을 하게 됐는지는 임진왜란 전후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왕은 14대 선조였다. 선조는 명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명종은 후사 없이 임종을 했다. 명종의 아버지는 중종이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선조는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왕이 되었던 것이다. 조선은 적장자 왕위 계승이 원칙이었으나 사실 적장자가 왕위를 이은 것은 5대 문종이 처음이었으며, 조선의 적장자 왕은 27대 임금 중 7명뿐이었다. 그나마 적장자가 없을 경우 차자나 형제, 적손이 왕위를 이어오던 전통은 선조에서는 이도 없어 방계에서 왕위를 이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선조는 방계에서 첫 번째 왕이 되었던 것이다. 

선조는 정통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왕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처럼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은 이미 사망한 상태라 아버지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으며, 세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왕위에 올라 군왕에 대한 교육 또한 받지 못해 즉위 초반 인순왕후의 수렴청정까지 받아야 했다. 


선조는 어쩌면 불안함에 떨며 왕위를 지켜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자신의 신변에 더 위협을 느꼈을 수 도 있다. 백성들의 임금에 대한 원성, 몽진 과정에서 신하들의 배신, 자신의 아들이 조선 사람들에 의해 왜군에게 넘겨지는 상황, 싸움에서 이긴 장수들을 자신보다 더 신망하는 백성들을 보면서 연산군을 몰아냈듯이, 선조는 이들이 언제든지 자신을 몰아내고 역성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선조의 이런 생각의 변화는 임진왜란 직전과 그 이후 이순신의 직위 변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초기 이순신이 왜적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을 때 선조는 그의 품계를 진도군수에서 전라도 좌수사로 임명하였다. 사간원에서 조차 문제 삼았지만 선조는, 

"이순신은 충분히 그 임무를 감당할 만한 인물이니 더 이상 언급하지 말라."

고 하며 좌수사 임명을 강행하였다. 

또한 권율과 이순신이 군사를 잃어버렸을 때에도 사간원에서 신문하여 처형할 것을 요청하였지만 선조는 그렇게 할 수 없다며 이순신을 두둔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순신에 대한 전공이 쌓이고 민심도 이순신에게 기울어지는 듯하자 선조는 이제까지 두둔했던 이순신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돌렸다. 원균과 이순신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보고를 듣고 선조는 이순신을 나무라며 이순신을 통제사에서 해임할 것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명나라 장수 경리가 전공을 올린 이순신을 칭찬하고 비단과 은을 주어 표창하자고 할 때에도 선조는 장수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며 애써 그 의미를 희석시키려 했다. 

이처럼 이순신은 두 번의 옥사와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며 마지막 노량해전까지 오게 된 것이다. 

노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의 마음은 얼마나 복잡했을까? 삶과 죽음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마등처럼 임진왜란부터 정유재란까지의 격전을 벌였던 수많은 전쟁들이 스쳐 지나갔을 것이며, 죽어간 병사들의 모습도 떠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살아서 돌아가는 것보다는 명예롭게 죽는 게 더 낫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죽음을 선택했을 때 살아남아 있을 가족에 대한 연민에 얼마나 가슴 아팠을까? 


이순신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이 두 번의 옥사 때 받았던 죄명과, 자신과 같은 의병장 김덕령의 죽음이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김덕령이란 인물은 당시 전라도 지역의 의병장이었다. 김덕령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호남 지역에서 크게 세력을 떨친 인물이다. 김덕령은 선조로부터 초승장군의 군호까지 받았으며, 권율의 막하에서 의병장이 되어 영남 서부 지역의 방어 임무를 맡았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김덕령은 이몽학의 난 때 이몽학 군과 내통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써 죽임을 당했다. 


결국 이순신도 자신의 공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었으며, 지금은 전시상황이고 자신이 필요하기 때문에 살려두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면 자신도 김덕령처럼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거 같다.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성심이 없었다면 이순신은 역성혁명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의롭게 죽음을 택함으로써 명예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선조는 이순신의 죽음을 보고 받았을 때에도 애통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 이후 자신에게 큰 위협의 대상이었던 이순신의 죽음은 선조에게는 커다란 고민거리를 해결해 주는 소식이었을 것이다. 명나라에서는 제사를 지내주고 그의 죽음을 애통해했지만, 정작 선조는 전쟁의 승리는 명나라가 도와줘서 이겼을 뿐이라고 하며 이순신의 업적을 깎아내리기까지 했다. 

앞서 한신의 경우처럼 참모의 공적이 리더를 능가할 때 리더가 느끼는 불안감은 상당하다. 러더의 입장에서는 언제든지 참모가 자신의 자리를 치고 올라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고, 주변 사람들도 자신과 참모를 끊임없이 비교하며 평가할 것이며, 자신보다 참모를 더 신뢰하게 된다면 이를 편안하게 받아들일 리더는 없을 것이다. 선조에게 이순신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기는 게 하나 있다. 

명나라 장수 진린이 이순신과 함께 전쟁을 수행할 때 이순신은 진린을 항상 깍듯이 대우했으며, 전쟁에서 더 많은 공을 세웠을 때에도 오히려 자신의 공을 진린에게 양보하였다. 이순신은 절대로 자신의 공적 이진린보다 더 높게 보이려고 하지 않음으로써 그를 예우해 주고 그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참모는 자신이 공이 아무리 리더보다 뛰어나다 할지라도 절대 내세워서는 안 되며, 리더보다 두드러지게 부각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순신은 알고 있었다. 즉, 전시 상황에서 진린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야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이런 상황들을 살펴보면 이순신이 처세에도 상당히 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왜 선조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아마도 그건 임금으로부터 두 번의 죽으라는 어명과 명랑에서 해군을 해체하고 권율의 육군에 합류하라는 임금의 어명을 거역하고 12척의 배로 끝까지 항전하겠다는 출사표를 던진 이유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순신만이 알았을지 모르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적 같은 명랑의 승리는 더 이상 선조와 자신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선조와의 결별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순신에게 남은 것은 백성과 명예였을 것이다. 

이미 이순신의 공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백성들의 신망도 두터웠다. 이건 이순신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백성들의 선조에 대한 실망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였다. 

나라와 백성을 위기에서 구하고 선조의 왕위를 지켜준 이순신이지만 정작 자신은 리더에게 사랑받지 못한 불운한 참모였던 것이다. 

PS : 더 이상 리더에게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을 때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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