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란 리더를 선택하여 조선을 세운 삼봉 정도전

리더를 성공으로 이끈 참모

by 미운오리새끼 민

정도전은 고려 말 사람으로 멸망의 기로에선 고려를 대신할 새로운 나라 건설이라는 큰 뜻을 품고 신권(臣權) 국가를 꿈꾸었던 이상주의자이다. 정도전은 이색의 제자이며, 정몽주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그러나 정몽주가 고려 개혁을 통한 나라의 정비를 주장한 반면 정도전은 이미 수명을 다한 고려는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나라 건설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하면서 두 사람의 운명도 달리하게 됐다.


결국 정도전은 자신과 뜻을 같이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울 인물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정도전은 왜 자신이 직접 왕이 되려 하지 않고 왕이 될 만한 인물을 찾아 나선 걸까? 당시 정도전은 제자를 가르치고 있어서 따르는 무리들도 상당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것보다는 새로운 인물을 내세우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정도전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정도전은 관직도 없었으며, 또 유배까지 갔다 온 상태였다. 그러기에 고려 정권에 자신의 생각을 함께할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모름지기 역성혁명을 하려고 하면 정권 주변에 자신의 생각과 함께 할 사람들이 많이 포진해 있어야 했는데 당시 신진세력의 힘은 미미했다.


둘째, 대중적 인지도에서 고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상당했다 할지라도, 그 제자들 또한 아직 관료로 진출해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정도전이 고려 민중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존경받는 인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방 관료나 사람들의 핍박을 받고 있었다.


셋째, 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필수인데 정도전에게는 그게 없었다. 하다 못해 그를 따르는 장수도 없었다. 한나라 유방에게는 초기에도 번쾌라는 걸출한 장수가 항상 그의 곁에 있었기에 세력을 키울 수 있었지만, 정도전은 혼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민군을 조직하여 정권에 맞선다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것을 정도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무신정권하에서 자신과 같은 문인 출신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직접 왕이 되어 새로운 국가를 이끄는 것보다는 참모가 되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여 운영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정도전은 자신을 조선의 장량(長良)이라 자처하며, 왕보다는 한고조를 도와 나라를 세운 장량처럼 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말로는 장량처럼 아름답지 못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정도전은 이런 자신의 계획이 세워지자 전국의 수많은 인재들을 만나러 다녔다. 즉 왕이 될 만한 인물을 선택하러 다닌 것이다. 왕이 신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가 왕이 될 만한 인물을 선택하러 다녔으니 정도전의 기개도 참 대단하다 할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말이 있었는데, 조선 개국 후 정도전은 술이 취하면,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즉 이 말의 뜻은 조선이란 나라를 세운 것은 자신이며 단지 이성계의 힘을 빌렸을 뿐이라는 말이다.


정도전은 사람을 만나면서 그 사람이 왕이 될 만한 인품을 갖고 있는지,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켜줄 수 있는 사람인지를 확인했다.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찾은 사람이 바로 이성계였다. 이성계는 당시 함흥 동북도도지휘사로 있으면서 함흥 일대에 침범하는 오랑캐를 물리쳐 그 주변 일대뿐만 아니라 개성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만나서 이성계에게 변방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라고 했다. 정도전은 현재 고려 정권의 문제, 명나라 원나라 등 국제정세와 향후 변화 가능성, 고려의 민심, 개혁의 방향 등을 논리 정연한 말로 역설하며 이성계에게 새로운 시대의 역사적 소명의식을 심어 줬다.


변방의 야인에 불과했던 이성계는 정도전의 막힘없는 현란한 말솜씨에 놀랐으며, 그가 펼치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설명에서 충분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깨달았다. 한편으로는 죽음을 감수해야 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이성계에게도 자신이 중심이 되어 개혁을 해보겠다는 피 끓는 열정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쿠데타를 통해 고려 정권을 잡게 되었으며, 정도전도 중앙무대로 진출하여 대사성(大司成)이라는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왕조 창업을 위해 정도전은 하나씩 치밀하게 일을 준비해 나갔으며 마침내 조선왕조 창업이라는 대업을 달성했다.


조선 창업 후 정도전은 국가시스템 개조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민본, 위민 사상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민본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래서 제일 먼저 단행했던 것이 농지 개혁이었다. 즉, 백성들의 생활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백성이 편한 나라를 목표로 했다.

또한 능력 있는 인재 양성을 위해 교육기관을 설치하였으며, 시험을 통해 능력위주의 관리를 선발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이 책임 있는 정치를 할 수 있도록 왕권은 제한하고, 신하들에게 실권을 부여하고자 하였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책과정에서부터 다양한 의견수렴을 하고자 언로를 개방하였으며, 오늘날 부정청탁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듯이 그 시대에도 간관과 사헌의 기능을 강화하여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방지하고자 하였다. 그가 초기에 만든 각종 제도들은 후에 조선왕조 500년 역사 동안 꾸준히 이어졌으니 그의 안목은 실로 대단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정도전이 꿈꾸던 새로운 나라는 민본주의와 민생정치였다. 즉 백성이 주인이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근 470년이 지나서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주창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와 다를 바 없는 내용이었다는 점에서 정도전이 꿈꾸는 이상적인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도전은 나라를 통치하는 것도 왕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와 관료가 통치하는 재상 중심의 중앙집권적 통치체계를 지향했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그가 처음부터 이성계의 간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이성계를 택했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조선왕조를 세우는데 자신은 기획자이고 이성계는 단지 이를 실행에 옮긴 사람으로 생각한 것이다. 때문에 실질적인 왕은 자신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오늘 날로 따지면 입헌군주제와 비슷할 것이다.


왕은 존재하지 통치하지 않는다는 그의 선진적 사고방식은 세자 책봉에서도 나타났다. 정도전은 조선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방원이 세자로 책봉되어 왕위를 계승한다면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국가를 경영하려고 하는 이방원과 끊임없이 대립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어린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는 것에 찬성한 것도 방석이 왕이 되어야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나라의 기틀을 차질 없이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정도전이 자신이 생각한 신권 중심의 국가를 이루기 위해 본인 혼자의 힘으로 하려 하지 않고 좀 더 시간을 갖고 점진적인 개혁을 단행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자신이 살아 있을 때 모든 것을 완성 지으려고 했기에 결국 이방원에 의해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것이 아닌가 싶다.

즉, 좀 더 시간을 갖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많은 인재들을 양성하고, 그들이 관료로 진출할 수 있게 끔 하여 왕을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다면 정도전이 생각하듯 왕은 누가 되던 상관없었을 것이다. 이방원이 왕이 되더라도 신권이 강력하다면 왕권 주의인 이방원도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란 얘기다.


정말 능력은 장량과 견주어도 비할 바 아닐 만큼 출중했지만, 그의 처세술은 장량만 같지 않았고, 오히려 한신과 비견된다. 모든 것을 나만이 할 수 있고 내가 다 해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이런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나 싶다. 참모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사례로 삼아야 할 거 같다.


PS : 주위에 나를 대신하여 리더가 될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를 응원하겠습니까? 경쟁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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