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거리

1. 우정을 위한 이별은 1-1.

by 미운오리새끼 민

“땡, 땡, 땡, 땡.”

“지금 도착하는 열차는 당역을 서지 않고 통과하는 열차입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빠 ~ 앙! 기 ~ 웅!”

기차는 한 마리 독사처럼 사냥감을 발견한 후 입을 크게 벌리고 포효하듯 재빠르게 승강장을 가르며 지나가고 있었다. 기차가 몰고 온 강한 바람과는 반대로 범수의 몸이 기차 쪽으로 쏠렸다. 새우 등처럼 몸이 구부러졌다. 범수는 얼른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바닥에 떨어졌던 낙엽들이 범수 주위를 휘감고 하늘로 올라갔다. 기차의 끝 부분이 플랫폼을 벗어나자 하늘 위로 솟구쳤던 낙엽들이 하늘하늘 서글픈 한을 담은 춤사위를 그리며 철길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더 이상 요동도 하지 않았다.

기차의 꼬리부분이 한 점으로, 그 점마저 공간 속으로 사라졌다. 오직 그 여운만이 가영이의 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가영의 머리 결에서 흘러나오는 아카시아 향을 느끼며 범수는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서 있었다.

“땡, 땡, 땡, 땡.”

“지금 열차가 홈 안전선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주셨다가 질서 있게 승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기차가 떠난 철길 반대편으로 전철이 느리게 들어오고 있었다. 전철은 한 무리의 사람을 토해내더니 다시 그 만큼의 사람들을 삼켜 버렸다. 그래도 배가 볼록 나오거나 굼벵이가 되지는 않았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전철이 움직였다.

범수는 전철이 오는 방향으로 머리를 빼꼼히 내밀고 살폈다. 범수 주변으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말쑥이 정장을 차려입고 한껏 멋을 낸 중년의 부부들과 단정히 차려입은 젊은 연인들이 군데군데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들이 교외로 나가는 전철과 어울리지는 않았다.

범수는 그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면서 자신의 복장을 한 번 쓱 살펴봤다. 예식장을 간다고 급히 사 입은 정장이 범수의 옷이 아닌 듯 아직은 낯설게 느껴졌다. 범수는 옆에 있는 가영이를 바라봤다. 가을바람에 머리카락과 원피스 자락이 하늘하늘 물결치듯 흐르는 거 같았다. 그리고 가영이 뒤편으로 깔끔하게 갈색 줄무늬 정장을 입은 한 여인이 우수에 찬 눈빛으로 먼 곳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 사람도 결혼식장엘 가나?’

옷차림새는 그다지 튀지 않을 수 있으나, 갈색 머리에 구두까지 맞춤을 한 것이 범수의 눈에는 튀는 콘셉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결혼식장에 신부보다 튀는 옷차림으로 와서 민폐를 끼치는 하객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교외선 전철이 시계를 벗어나자 확 트인 가을 들판과 푸른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범수는 답답했던 가슴이 뚫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가영이는 서울을 벗어났다는 것에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다. 고개 숙인 누런 들판의 끝에는 하늘과 들판이 만나는 지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지평선은 그림 위에 칠해 놓은 물감이 채 마르기도 전에 붓 칠을 한 듯 노란색과 푸른색이 서로 뒤엉켜 있어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범수는 갑자기 쓴 웃음이 흘러 나왔다.


“야, 너 다시는 전화하지 마! 그리고 너도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가!”

지원이는 화가 무척이나 나서 말했다.

“지원아,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까? 오해가 있어.”

범수는 애간장이 타들어 가는 거 같았다. 하지만 지원이는 범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됐다니까! 전화 끊어!”


다시는 안 만날 것처럼 전화를 끊어 버렸던 지원이는 그렇게 6개월이 지난 후 대학시험을 앞두고 연락이 왔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범수에게 만나자고 했었다. 범수가 그동안 얼마나 가슴 아파 했고 지금껏 애타게 그리워했는지 지원이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끊어 질 것 만 같았던 지원이와 범수와의 관계는 그 이후로 가느다란 인연의 줄에 의지한 체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었다.

“가영아! 넌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네?”

범수가 엉뚱한 질문을 던지기라도 한 듯 가영이는 차창 밖에서 시선을 때고 범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넌 결혼을 하고 나서도 남자와 여자가 친구로 남을 수 있다고 생각 하냐구?”

범수가 가영이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글쎄요. 그야 될 수도 있겠죠?”

가영은 조금 뜸을 들인 후 말했다.

“왜?”

범수가 목을 뒤로 빼며 물었다.

“오빠는 아니라고 보나 보죠?”

가영이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웃음이 무거웠던 범수의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했다.

“응.”

범수의 여자 친구들은 결혼을 하면 그때부터 얼굴보기가 힘들었다. 오랜만에 연락을 해서 만나자고 하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지금은 만날 수 없다는 답변만 늘어놓았었다.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말은 이제 자신을 피하는 겸손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원이도 이제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범수야 나 결혼해!”

한동안 연락도 없던 지원이가 3개월 전에 전화가 와서 한 첫 마디였다. 예상은 하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지원의 말이 날카로운 칼날로 범수의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범수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너 결혼식 때 올 거지?”

지원의 목소리는 언제나 밝고 쾌활했다.

“그 … 래, 잘 됐다. 축하한다. 청첩장 보내.”

범수는 마지못해 말했다.

“초등학교 친구는 너 하난데 꼭 와야 돼.”

“지원아, 그런데 결혼하기 전에 그래도 결혼할 사람 얼굴이라도 봐야 되는 거 아니니?”

범수는 지원이 어떤 사람과 결혼을 하는지 궁금해 졌다.

“음. 그래 한번 얼굴 보자. 얘기해 볼게.”

지원이는 시원스럽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벼를 베에 낸 황금 빛 들판은 큰 운석이라도 떨어진 듯 움푹 폐인 곳이 군데군데 있었다. 처음 지원이가 그 사람을 만난다고 했던 것이 범수가 군대에서 첫 휴가 나왔을 때였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

범수가 지원을 보며,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

“정신없이 바쁘지. 근데 요즘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어서 좀 귀찮아.”

지원은 남의 얘기 하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떤 사람인데?”

범수는 갑자기 기분이 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편지에서도 그런 얘기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래처 사람. 난 관심 없는데 그냥 자꾸 밥이나 먹자고 해서. 부담되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회사 핑계대고 안 만나고 있어.”

지원이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범수를 보며 말했다.

“싫지는 않은가 보네.”

범수는 지원이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때로는 연인 같으면서도 가까워지면 다시 거리를 두며 친구처럼 대하는 지원의 속마음을 범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무엇보다 군대에 있는 상황에서 지원이에게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기가 미안했다.

“면회는 안 오니? 한 번 온다며?”

범수가 지난번 군대 가기 전에 지원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 가려고 했지. 그런데 엄마가 가지 말래. 위험하다고.”

지원이 배시시 웃으며 범수를 보며 말했다.

“뭐가 위험해?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하냐? 너 와서 나도 한번 외박 좀 나가보자.”

범수가 지원이를 은근히 부추겼다.

“안 돼. 엄마가 가면 큰일 난다고 해서. 미안해.”

지원이는 특유의 웃는 얼굴로 얼버무렸다. 그리고 범수가 재대할 때까지 지원이는 찾아오지 않았다. 이후 범수가 군대를 제대할 무렵 그 사람과 사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왜 그렇게 가슴이 시리도록 아픈지 편지를 붙들고 한 참을 멍하니 있었다. 범수는 그 사람과 한번 같이 만나자고 했지만, 지원이는 범수가 사귀는 사람이 있어야 만날 수 있다고 하며 같이 만나는 것을 거부했었다. 결국 그 만남은 결혼식이 열리는 순간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혼 소식을 알린 후 지원이에게서 연락이 다시 온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 조금 지나서였다.

“범수야, 우리 셋이 만나는 거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지원이가 평소와 다르게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무슨 일 있니?”

범수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 사람하고 싸웠어.”

지원이가 다 꺼져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때문이니?”

범수의 말에 지원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

“왜 무슨 일인데?”

범수는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지원에게 물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지원이는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전화를 끊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오빤 나 안 만날 건가 보죠?”

가영이의 말에 범수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냐.”

범수가 푸념을 하듯 말했다.

“가영아, 사실 오늘 결혼식, 내 가장 친한 초등학교 여자 친구가 결혼해.”

범수가 가영이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 난 후 말했다.

“…….”

“그런데 이 친구 이제는 보지 못할 것 같아서 아쉽다.”

범수의 입에서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그 친구 분이 결혼하고 나면 만나지 말자고 그래요?”

가영이가 범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범수는 가영이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창밖은 확 트인 평야가 사라지고 커다란 산이 지평선을 가리고 있었다. 먼 곳에서 보면 산불이라도 난 것으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화염에 휩싸인 듯 산은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창밖의 풍경은 땅의 황금빛과 산의 붉은 빛, 그리고 파란 가을 하늘 빛이 색동의 옷감을 펼쳐 놓은 듯 조화를 이루며 넘실대며 흘러가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