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거리

1. 우정을 위한 이별은 1-2.

by 미운오리새끼 민

“결혼을 왜 한다고 생각하니?”

“그걸 왜 해요? 전 결혼 안 할 거여요.”

범수의 질문에 가영이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왜 안 하려고 해?”

“제 생활을 할 수 없으니까요.”

가영의 대답은 명쾌했다. 범수는 가영이의 말이 이해가 가면서도 결혼을 안 한다는 말이 거짓말처럼 들렸다.

“너 결혼 안 한다는 말 장담할 수 있어?”

“모르죠. 오빠처럼 좋은 사람 만나면 생각 좀 해 보고요.”

가영이가 범수를 빤히 쳐다보면서 웃으며 말했다. 범수는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했다. 범수는 잠깐 동안 가영이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상상을 했다.

“놀라셨나 봐요? 얼굴 빨개졌어요. 농담인데. 하하.”

“야 갑자기 훅 들어와서 당황했잖아.”

범수는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거 같아 가영이에게 핀잔을 주듯 말했다.

“가영아, 넌 죽을 때까지 너와 만날 수 있는 친구가 몇 명이나 될 것 같니?”

“글쎄요, 한 열 명은 될 것 같은데요.”

범수의 질문에 가영은 고개를 들고 한번 생각해 보고 나서 말했다,

“그럼, 그 친구들은 항상 네가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이니?”

범수가 웃으며 가영에게 물었다.

“그야 물론이죠.”

가영이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지금은 그렇다 치더라도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해도 그게 가능할까?”

“…….”

가영이는 갑자기 말문이 막힌 듯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는 거 같았다.

“넌 결혼을 왜 한다고 생각하니? 아니 넌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으니까 그럼 사람들이 결혼을 왜 한다고 생각하니?”

“글쎄요. 외로우니까? 아니면 정말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겠죠. 안 보면 미칠 거 같고 뭐 그런 거 아닐까요?”

가영이 생각나는 대로 가볍게 말하며 범수에게 대답을 구했다. 범수는 그런 가영이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난, 결혼은 진정한 친구를 얻기 위해서 하는 거라 생각해.”

전철 안에서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은 느긋하면서 평화스럽게 보였다. 논두렁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나, 군데군데 누런 들판에서 콤바인으로 벼를 베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이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평화스럽고 한가롭게 만 보였다.

‘저쪽에서 나를 보고 있는 시선도 나와 같을까?’

범수는 지금 자신이 바라보는 저 밖의 풍경이 자신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대로 느끼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상인데.’

범수는 아내라는 존재, 남편이라는 존재는 어찌 보면 삶 속에서 우리를 한가로이 만들어 줄 수 있는 휴식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결혼을 해서 더 좋은 친구를 얻으니까, 그 전에 만나던 친구는 안 만나도 된다는 건가요?”

가영이는 범수의 말이 이해가 될 듯 하면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건 아니야. 친구들이 니가 만나고 싶을 때 항상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마찬가지로 너도 다른 친구가 보자고 했을 때 무조건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범수는 가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 번 숨고르기를 했다. 가영은 범수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했다.

“뭐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요? 다 개인 사정이 있는 건데.”

“그런데 아내나 남편이란 존재는 언제나 니가 집에 가면 만날 수 있잖아. 그리고 누구보다 더 너의 고민해결사이자, 영원한 니 편이 아닐까?”

범수는 가영의 얼굴을 부드럽게 보았다. 가영이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누런 들판이 사라지고 차츰 회색 빛깔의 아파트 숲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철은 어느 새 또 다른 도시로 들어가고 있었다. 북적이던 전철안의 사람들도 거의 사라져 이제는 그 수를 셀만큼의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전철을 타기 전 봤던 갈색머리의 그녀도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범수와 눈길이 마주치자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에게서는 여전히 슬픈 그림자가 겹쳐 보였다.

‘왜 저리 슬퍼 보일까? 장례식장은 아닌 거 같고. 나처럼 사랑했던 사람의 결혼식장에 가는 걸까?’


‘아름다운 거리를 위한 결혼식이야.’

범수는 결혼식장엘 가기로 마음을 먹고 나서 이렇게 최면을 걸었다.

언제부턴가 범수는 지원이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원이는 범수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지원이는 항상 범수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그 와 반대로 범수는 지원이의 작은 관심과 행동에 지원이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착각을 했었다.

지원이는 범수를 만날 때나 전화 통화를 할 때면 그동안 쌓아 놓았던 수다를 범수에게 다 뱉어 냈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친구와의 얘기들, 주변의 신변잡기들까지 지원이는 범수가 궁금해 하지 않아도 쉴 새 없이 말들을 쏟아냈었다. 그리고 지원이와의 대화는 어느 순간부터 이루어지지도 않은 시시콜콜한 지원이의 연애사가 주요 주제가 되었다. 지원이는 범수의 마음이 어떤지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범수가 친구가 아닌 이성으로 만나기를 원하는 것을 지원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만날 때마다 그 화재의 인물은 매번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범수는 그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범수는 지원이의 말을 그저 들어주는 식이였다. 다분히 그 나이 때 느낄 수 있는 일시적인 감정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 지원이에게 자신의 진심을 말할 날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지원이도 범수가 느끼는 그런 감정을 느낄 때가 오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더 컸었다. 하지만 그런 날은 좀처럼 오지 않았고, 또한 지원이의 연애 같지 않은 그런 이야기는 언제나 변함없는 레퍼토리가 되어 있었다.

“나 좋아하는 여자 있다.”

하루는 범수가 지원이의 마음을 떠 보기 위해 있지도 않은 여자 친구를 만들어서 지원이에게 이야기를 했었다.

“오, 정말? 니가 게 좋아하는 거 아니고?”

“아냐, 그 애가 나 좋아하는 거 같아.”

범수는 정색을 하며 지원이에게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음, 그냥 내가 있는 곳에 그 애가 항상 있어. 나를 의식하는 거 같기도 하고.”

범수는 소설을 쓰듯 상상의 나래를 펴며 지원이에게 말했다.

“넌 마음에 있어?”

“아직 잘 모르겠어.”

“싫지 않은가 보네. 그럼 함 만나봐. 사귀자고 해 보던지. 널 좋아하는 여자라면 니가 말해주면 좋아할걸? 아마 그 애도 니가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라.”

지원이는 어느 새 범수의 고민을 해결해 주려는 해결사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다 아니라고 하면 나만 이상한 놈 되는 거잖아.”

“걔가 너 좋아하는 거 같다며?”

지원이가 범수의 말에 반색을 하며 물었다.

“그렇다고.”

범수는 더 이상 어떻게 상황을 진전 시켜야 하는지 몰라 대충 얼버무렸다.

“뭐야? 확실하게 알아봐. 여자는 자기가 좋아해도 잘 표현 안 해. 남자가 와 주길 바라지.”

‘그게 너라면 받아줄 거니?’

범수는 아무 말 없이 지원이를 바라봤었다.

지원이는 그 이후에도 여자의 마음이 어떻다는 등 하며 범수에게 연애상담을 해 주었다. 그럴 때면 지원이는 아무런 감정변화 없이 자기 일처럼 범수에게 코치를 해 주었다. 범수는 어느 순간부터 지원이가 마치 커다란 벽처럼 느껴졌다. 지원이가 자신을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다는 생각들이 굳어질 때마다 그 벽은 하나씩 더 높아 가고 두꺼워졌다. 그리고 그 통곡의 벽 앞에서 범수는 하염없이 울다 조금씩 지원이에 대한 이성으로서의 감정을 접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감정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다. 만나지 않을 때는 마음의 정리가 된 것처럼 느껴졌지만 막상 얼굴을 보고 얘기를 할 때면 숨겨졌던 지원이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다시금 솟아났었다.

‘아직도 그런 감정을 갖고 있다니. 참 질기다.’

범수는 가영이를 바라봤다. 피곤한지 가영이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그 남자의 입장이라면 난 어땠을까?’

범수는 한동안 지원의 남자가 되어 보려고 했다. 지원의 남편 될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던 생각들이 다시 범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얘도 나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금이라도 말을 하면 돌아올까?’

‘쓸데없는 생각이지, 돌아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야.’

군대를 재대한 이후 지원을 만나는 횟수는 눈에 띠게 줄어들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만남이 사라지고 연락도 거의 없는 상태가 한동안 이어지기도 했었다. 지원이를 향한 범수의 마음은 그대로였지만, 지원은 그렇게 범수를 자신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지우고 거리를 두기 시작했었다. 그것이 지원이의 의도된 행동인지 결혼할 사람의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범수 또한 그런 지원이의 행동을 시나브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제 와서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야.’


“야, 남자가 첫사랑을 왜 못 잊는 줄 아니?”

혀가 꼬부라진 말로 규석이가 물었다.

“첫 사랑이니까.”

범수의 혀도 이미 꼬여 있었다.

“그럼 두 번째 사랑은? 그건 잊어지냐?”

규석이가 범수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글쎄, 그냥 추억이니까 기억하는 거 아닐까?”

범수는 술에 취한 규석이의 넋두리를 그렇게 받아내고 있었다.

“그게 아냐 인마. 남자의 마음속에는 사랑을 담을 방이 여러 개 있어서 그래. 그래서 못 잊는 거야. 그런데 여자는 어떤지 아니?”

규석이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갖다 대며 말했다,

“여자도 방이 여러 개 있겠지. 푸우, 여자는 남자보다 방이 더 많냐?”

범수가 술잔을 비우며 얼굴을 찡그린 상태에서 말했다.

“아냐, 넌 그래서 아직도 연애를 못하는 거야. 에이 불쌍한 놈.”

규석이가 안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범수를 무시하듯 말했다.

“…….”

“여자에게는 방이 하나 밖에 없어.”

규석이가 남은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남자보다 여자가 났네. 그래도 한 사람을 사랑하고.”

범수가 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 그게 아냐 인마. 여자는 방이 하나지만 대신 그 방의 주인이 자주 바뀐다고.”

범수는 지난번 술을 먹으면서 규석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농담처럼 받아들였는데, 지원이의 행동을 생각하면 규석이의 말이 맞는 거 같았다.

‘지원이도 그래서 날 밀어낸 건가? 이제 지원이의 방에는 내가 없는 걸까?’

범수는 지원이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이제는 지원이를 놓아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쉽게 되지 않았다. 벌써 몇 년째 혼자서 지원이를 두고 내면의 마음에서는 씨름을 하고 있었다. 범수 마음의 방에 이미 들어가 있는 지원이를 내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사실 범수도 지원이를 잊기 위해 다른 여자를 안 만나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애를 할 때 뿐 헤어지고 나면 지원이는 터줏대감처럼 범수의 마음에 떡 하니 다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치 잠시 동안 범수의 마음속에서 방문을 닫고 있다가 기회가 되자 다시 열어 놓은 것 같았다.

‘정말 내 마음에 방이 여러 개가 있어서 그러는 걸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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